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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 이야기
혹자는 그들의 사랑이 농익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안 좋은 상황을 애써 좋게 표현하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해본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을 앞둔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배낭여행을 갈까,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토익 점수나 받아놓을까 고민하고 있었고,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일들의 총집합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음악을 만들어보겠다며 가장 저렴한 키보드를 구입했고, 들뜬 마음으로 농구화를 새로 장만했다. 밤에는 매일 홍대 클럽에 가서 춤을 췄는데, 스포츠머리에 폴로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일행 중에 가장 인기가 없었다.
그 형은 나와 무척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옷 입는 건 후줄근한 편이었지만 얼굴은 흠잡을 데 없었다. 형은 방학 기간에 홀로 유럽 여행을 떠났고 기차에서 책을 읽다가 한 여자를 만났다고 한다. 둘은 이상하게 이야기가 잘 통해서 하루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희미한 기약만을 남긴 채 다음 날 다시 헤어졌다고 한다. 이성과의 낭만적인 만남과는 거리가 먼, 매일 큰 티를 입고 농구 코트나 기웃거리던 복학생이 듣기엔 무척 심심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가는 시간에 찾아오는 쓸쓸한 기분 같은 것에 완전히 매료되어,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동안 잊을 수 없었다.
그 형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건 내가 지독한 무력감에 휩싸여 있을 무렵이었다. 사회초년생 신분으로 나는 매일 오전 여덟 시에 집을 나서 밤 열한 시에 집으로 돌아왔고, 죽을 때까지 평생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우울해하고 있었다. 취업에 목말라 이곳저곳에 입사지원서를 넣은 지 불과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와 다른 길을 걷던 형은 이미 괜찮은 작가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 보이던 연약하고 수줍은 얼굴은 간데없이 이마에 짙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사실 예전부터 형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칼자국처럼 깊이 파인 주름도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대박인 사실!) 형은 책 출간을 기념하여 파리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이전에 만난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고 한다. 그날의 작은 인연을 잊지 않고 두 사람은 다시 대화를 나누며 걷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언젠가 걷던 파리의 풍경을 떠올렸다. 초록색 풀과 검은색 철과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그들은 아쉬움과 그리움을 털어놓았다. 내가 듣기로 그들도 역시 나름의 지루함과 싸우는 중이었다. 서로를 통해 자신의 지루함을 벗기려는 듯이 그들은 숨 가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주 최근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창 바쁘게 살다 보니 그 형이 소식을 알려온 것을 최근에야 듣게 되었다. 둘은 부부가 되었고, 쌍둥이의 부모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눈에 띄던 사람이었는데, 형은 생각보다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멋있던 그도 아저씨가 되자 배가 나왔다. 이마 주름은 멋있었지만 배는 멋있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대화를 나눴지만 설렘으로 가득 찬 지저귐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체로 애정을 섞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마냥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고, 지루함과 피곤함의 원인이 상대방에게서 오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고 있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서로를 발견한 것이 아니었던가?
사람은 늘 굴레를 돈다. 격렬하게 원하던 것을 손에 넣고 나면 더는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손과 몸을 맞붙이고, 더 나아가 인생 전부를 끈끈하게 붙여버린다. 그리고 곧바로 자유롭기를 갈망한다. 그들이 잠시 말을 멈추는 순간은 높이 던진 공이 떨어지기 직전 잠시 하늘 꼭대기 고여 있는 순간처럼 보였다.
혹자는 그들의 사랑이 농익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안 좋은 상황을 애써 좋게 표현하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해본다. 농익는다는 건 대체 뭘 이야기하는 걸까? 배가 나오는 것도, 나를 지루해하는 상대의 모습도,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까지도, 그런 모든 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태연한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일까? 어떻게 하면 그런 것들로부터 태연해질 수 있을까?
농익은 사람들은 저 멀리 굴레 밖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작점과 끝나는 점이 같은 순환의 고리를 볼 수 있다면 초조해하거나 슬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굴레 안쪽에 있는 사람일 테니,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비포 미드나잇>(2013)
<비포 선셋>(2004)
<비포 선라이즈>(1995)
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