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visible Hand That Makes A Movie : Domestic Director Interview

지구촌 감독들 만나보기 : 윤가은, 윤성호, 전고운

Domestic Director 

Interview

여전히, 우리들 이야기

윤가은

이거, 묘하게 좋네

윤성호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끼는 면면

전고운

 

 영화감독 윤가은

 

Still, Our Story

여전히, 우리들 이야기

 

스크린에 비친 아기 곰을 자신과 겹쳐보았던 작고 소심한 아이. 오래전 기억이지만 그때의 풍경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미 지나간 것들을 간직해 영화 속에 차곡차곡, 일기처럼 써 내려간다. 어른의 몸과 어른의 생각을 가진 그녀는 아이들의 순수한 힘을 믿고 있었다. 믿음에 답하듯 그 힘은 아주 멀지 않은 곳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제주에 다녀왔다고 들었어요. 요즘 어떻게 지냈나요?

제주에 있는 남동생 부부 집에 놀러 갔다 왔어요. 네 살짜리 조카도 보고요. <우리집>(2019)을 촬영하는 동안 훌쩍 컸는데 계속 못 봐서 무척 보고 싶었거든요.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죠. 최근엔 이번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은 마음으로 갑자기 머리도 잘랐어요(웃음).

인터뷰 전에 옷을 사야 한다고도 했어요(웃음).

맞아요. 그런데 결국 못 샀어요. <우리들>(2015) 기자 시사 때도 옷 때문에 걱정이 많았어요. 제가 무채색 옷밖에 없거든요. 사람들한테 아이들 영화 찍는데 옷이 왜 그러냐는 소리도 듣고요. 나름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들을 산 건데(웃음). 그때 처음으로 핑크색 옷을 사기도 했어요.

그러고 보니 감독님 영화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차분한 톤의 옷을 입어요.

영화 속이지만 일상성을 담고 있는 의상을 구현하려 해요. 제가 나름 정해놓은 규칙들이 있죠. 텍스트가 있거나 너무 화려한 옷은 되도록 피하고 싶어요. 시선을 분산시켜서 배우들의 얼굴이나 연기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거든요. 이번 영화에서는 의상을 새롭게 만들기도 했어요. 무지 티에 칼라나 포켓을 다는 식으로요.

이번 영화 <우리집>은 8월 개봉 예정이죠. 소개 부탁드려요.

<우리집> 소개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네요(웃음). 스태프들끼리는 가족 동네 모험 드라마라고 부르기도 해요. 불화가 심한 가족의 막내인 초등학교 5학년 하나가 또 따른 가족 문제를 가진 초등학교 3학년 유미와 일곱 살 유진이 자매를 만나요. 여름 방학 동안 각자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동네에 모여 여러 가지 일들을 계획하죠.

 
아이들이 작은 일들을 꾸려가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죠. 계획한 일들을 시도하고 성공하고 또 실패하기도 해요. 하나의 목표는 가족을 지키는 건데, 그런 하나의 앞에 마음 맞는 두 동생이 나타나죠. 유미, 유진이는 이사를 많이 다녀서 한곳에 머물렀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있어요. 하나의 고민은 정서적인 고민에 가깝고, 유미랑 유진이 자매는 물리적인 고민에 가까워요. 서로 다른 종류의 고충이지만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은 같죠. 그렇게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 해요.
 
 
가족 문제가 무거운 소재일 수도 있어요. 어떤 식으로 풀어가는지 궁금해요.
 
관객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가지 방식만을 택하지는 않았어요. 어른들은 가정의 불화를 본인들끼리 해결하려 하고, 아이들이 가족의 주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아이들도 주체가 될 수 있고 가족 문제를 자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우리 어른들도 어린 시절을 지나왔고요. 가족 내에서 생기는 갈등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아이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그 위기를 얼마나 자신들의 문제라고 받아들이는지, 그 마음에 집중했어요. 이런 부분서는 진중한 표현 방식을 택했어요. 이전 영화 <우리들>에서는 감정의 밀도가 깊고 한곳에 쏟아내는 느낌이 있었다면, <우리집>에서는 아이들이 조금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요. 이런 장면들에서는 밝은 분위기가 드러나기도 하죠. 여러 표현 방식이 어우러지면서 다양한 감정을 말하고 싶었어요.
 
 
어릴 때 저는 가족의 불화를 숨기느라 급급했는데 남동생은 태연하게 부모님이 싸운 이야기를 말하고 다니더라고요(웃음). 아이들 모두 나이가 달라서 생각하는 고민의 무게도 달랐을 것 같아요.
 
맞아요. 하나는 유미, 유진이에게는 언니지만 집에서는 막내고 중학생 오빠도 있어요. 오빠가 부모님의 싸움을 받아들이는 심각함의 정도도 다르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차이도 있고요. 고민의 깊이가 조금씩 다르게 책정된 부분이 있죠.
 
 
이전 영화들처럼 <우리집>에도 감독님의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 있나요?
 
그렇죠. 기본적으로 제 글쓰기 방식이 그래요. 영화 속의 하나와 유미, 유진이처럼 저도 어린 시절엔 가정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가족 문제가 정말 제 문제처럼 느껴졌어요. 그때 애쓰던 감정들이 지금도 남아 있고요. 그래서 주인공들에게도 제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가족의 위기가, 그 태풍이 모두 지나갔다고 해도 완전히 끝은 아니잖아요. 가족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의 상처도, 행복도 그때가 지났다고 해서 모두 사라진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아픈 가족의 기억을 드러낼 때 스스로 감정적인 어려움도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개인적인 경험이 담긴 거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짜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의 시기를 거쳤어요.
 
 
이번 영화의 ‘집’이라는 소재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을까요.
 
물리적인 집의 의미도 있고 우리 ‘식구’라는 의미도 가져요. 그리고 꼭 혈연관계만 가족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것이 사람을 진짜 가족으로 묶어주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해요. 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지만 아이들끼리 또 다른 가족의 형태를 이룰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같이 있을 때 그 풍경 자체가 이 아이들의 집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어릴 때 동네에서 친한 언니 동생 사이, 그 끈끈한 우정 있잖아요. 과거의 향수도 담고 싶었죠.

영화 작업으로 마음이 복잡할 때 어린이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고 들었어요.

시나리오 쓸 때 많이 갔어요. 대부분 초반의 이야기와 다르게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인지, 사람들이 봤을 때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지 고민하면서 수정하죠. 그런 갈등을 가지고 방 안에서 혼자 작업을 하면 생각이 제 안을 못 벗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럴 때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실제로 보고 청소년 문학을 살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찾는 거죠. 동네 아이들이 책 읽는 모습을 보면서 저 친구는 어떤 고민이 있을까, 상상을 자주 해요. 이런 과정에서 초고의 자극적이고 큰 사건들을 덜어내고 보통 아이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죠.

 
<우리들>의 초반 트리트먼트도 스릴러 장르였죠.
 
맞아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였고 여고생이 주인공이었어요. 초고 진행 때는 이야기적으로 자극적이고 박력 있는 소재들을 자주 떠올리게 돼요.
 
 
그때 이창동 감독의 따끔한 조언이 있었다고요.
 
이 이야기가 과연 진짜인지 고민해보라는 조언을 주셨죠. 주인공들 이름만 빼고 전면 수정하라고 하셨어요. 충격이었죠. 진짜가 뭘까, 애초에 영화는 진짜가 아닌데 진짜 같은 이야기가 뭘까, 하는 고민의 연속이었어요. 아무래도 장편 시나리오다 보니 오랜 시간 이야기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어요. 그렇게 재미를 추구하면서 진짜 본질은 놓쳤겠죠. 아이들의 어떤 점을 담고 싶어 하는지 찾아가는 과정이었어요.
 
 
감독님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영화 만드는 사람, 야채파, 문방구 습격자라는 소개가 있어요.
 
아직도 영화감독이라는 호칭이 잘 안 붙어요. 뭔가 어색하고요(웃음). 그래서 영화 만드는 사람이라는 소개가 편해요. 문방구는 제가 정말 좋아하고 자주 가는 곳이에요. 옛날 물건을 좋아해서 무조건 사 모으는 버릇이 있어요(웃음). 어릴 때도 문방구에서 물건 보는 걸 좋아했는데 다 살 수는 없으니까 열심히 눈에 담고 부자 된 기분으로 잠들고 그랬죠. 시골로 여행을 가면 문방구에 꼭 들르는 습관이 있어요. 시나리오 쓸 때도, 로케이션 헌팅 때도 자주 가고요. 야채파는 체질상 몸에 안 맞아서 고기를 잘 못 먹는데 <콩나물>(2013)을 만들고 나서는 야채파 감독을 하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어요(웃음). 그렇게 생긴 별명 같은 거죠.
 
 
<콩나물> 이야기가 나왔네요. ‘보리’라는 소녀가 할아버지 제사상에 올릴 콩나물을 사러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죠. 왜 하필 콩나물이었을까요?
 
제가 어릴 때 콩나물 심부름을 많이 했어요. 평범하면서 저렴하고 특별한 게 아니잖아요. 콩나물 이미지가 아이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어요. 색감도, 자라나는 이미지도 닮아 있고요. 사실 후보에 여러 채소가 있었어요. 시금치도, 고사리도 있었죠(웃음). 
 
 
콩나물이 가장 잘 맞는 것 같네요(웃음). 저는 보리가 춤 추는 장면을 가장 좋아해요.

그 장면은 저도 좋아해요. 촬영 전에 수안이랑 친해지려고 어린이 대공원에 같이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역시 아이의 체력을 못 따라가겠더라고요. 저는 지쳐 있었고 수안이는 신났는지 ‘물레방아 인생’을 부르면서 춤을 췄어요. 주위 사람들이 다 모여서 게릴라 콘서트 같은 상황이 벌어졌었죠(웃음). 그렇게 그 장면으로 연결됐어요. 실제로 동네 어르신 분들을 모시고 촬영하기도 했죠. 이런 기억들을 되돌아보면 저의 모든 영화가 다 소중하지만 콩나물은 조금 다른 영화로 여겨져요. 제가 혼자서 이뤄낸 게 많이 없는,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만든 영화라는 느낌이 크죠. 사실 모든 영화가 다 그렇지만요.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장면이 많은 것 같아요. 실제로 정확한 대사없이 상황만 주는 연출 방식을 이어가고 있죠.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 내용이 수정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극 전체를 바꾸는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대신 표현 방식이 바뀌는 부분은 많죠. 감정은 그대로 지켜가면서요.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로 장면 연습을 하면서 배우들에게 자주 물어봐요. 제가 예상하는 대사가 있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실제로 어떻게 할 것 같은지 묻는 거죠. 대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와요. 진행하다 보면 배우들이 예상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어요. 그때는 저도 다시 고민을 해보는 거죠.

 

그렇다면 배우들의 합도 중요할 것 같아요. 이번 영화에서 세 배우들의 합은 잘 맞았나요?

정말 잘 맞았어요. 하나가 제일 언니라서 동생들을 잘 챙겨줬죠. 유미랑 유진이는 언니를 잘 따랐고요. 촬영 말미에 조금 울컥했던 일도 있었어요. 작년 여름이라 현장이 무척 힘든 상황이었고 저는 촬영 들어가기 전에 헤드폰으로 소리를 다 듣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배우들은 인지를 못한 상태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죠. 막내 유진이가 “언니 나 어떻게 하는 거였지?” 했더니 하나가, “유진아 너 들어가기 전에 언니 봐야 하고 그다음에 유미 언니 봐.” 하면서 자기들끼리 합을 다시 맞춰보는 거예요. 촬영 내내 서로 토닥이면서 지친 막내를 언니들이 끌어주고, 혼내기도 달래기도 하면서 잘 해내주었죠. 아직도 무척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에요.

 

<우리들> 촬영하면서는 배우들이 감독님께 혼난 적도 있었다고요(웃음).
 
한번은 아이들끼리 NG 내자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혼내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까 촬영장이 너무 좋아서, 오늘 자기들이 실수를 하면 내일 또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귀여운 꾀를 부린 거죠. “촬영할 시간도 없고 예산도 없으니 우린 빨리 찍어야 해(웃음).” 하면서 대신 끝나고 놀자면서 달랬죠. 
 
 
아이들과는 정이 빨리 들잖아요. 촬영이 끝났을 때는 많이 서운했을 것 같아요.
 
만감이 교차해요. 영화를 찍다 보면 늘 좋은 순간만 오는 건 절대 아니거든요. 실제로 배우들도 제가 미워지는 순간들이 있을 거예요. 저도 어른이면서 감독이고 동료지만 또 보호자 역할도 해야 할 때가 있어요. 나름의 고충들이 있었죠. 그렇게 여러 감정들이 쌓이다가 촬영은 언제나 갑자기 끝이 나버려요. 몇 달을 가족보다 더 많이 보다가 갑자기 서운한 마음이 들죠. 촬영이 끝나고 한번은 막내 예림이가 스태프들이랑 배우 언니, 오빠들을 단톡방에 초대하더라고요. 갑자기 인사를 하고 또 떠나버리고(웃음). 헤어지는 게 아쉬웠나 봐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계속 이어가면서 감독님만의 연출 스타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공통점을 찾으면, <우리들>에서는 주인공 ‘선’의 모습에서, <콩나물>에서는 ‘보리’의 얼굴로 영화를 시작하죠.
 
제 스타일이라고 딱 정해진 것은 없어요. 다만 늘 같은 고민을 해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잘 담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전면에 잘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이죠. 관객은 대부분 어른이라서 아이들을 대상화하는 경우가 있어요. 감정이입의 통로가 좁을 수 있죠. 그래서 어른들도 자기 이야기처럼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아이들이 느낀 감정을 자신의 감정과 함께 겹쳐보길 바라면서요. 그런 고민을 자주 하다 보니 아이들의 얼굴로 영화를 시작하는 게 자연스러웠죠.
 
 
성장 영화를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어떤 영화들일까요?
 
너무 많아서 고민인데, 지금 떠오른 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이요. 제 이상에 가까운 영화죠. <자전거 탄 소년>(2011), <톰보이>(2011), <마이 걸>(1991), <나우 앤 덴>(1995) 같은 영화들을 좋아했어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안녕하세요>(1959)도 너무 좋아해요. 정기적으로 영양소 섭취하듯이 봐요(웃음). 세상에 회의가 들고 작업에 대한 고민이 많을 때 보는 영화예요. 영화에서 아이들은 고민 자체를 단순하게 만들어요. 위로가 되죠. 그래서 마음이 복잡할 때 이 영화들을 찾는 것 같아요. 아이들의 직관적이고 단순한 힘을 발견했을 때, 그게 사람이 살아갈 때 진짜 중요한 것이라는 걸 느껴요. 
 
 
처음 영화를 본 순간을 기억해요?
 
처음 본 순간은 아니지만 강렬하게 남은 영화의 기억이 있어요. 가족들과 다 같이 서울극장에서 <베어>(1988)라는 영화를 봤어요. 곰이 주인공인 영화고 사람도 잘 안 나와요(웃음). 아기 곰이 버려진 후 혼자 숲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였는데 감정이입이 엄청났죠. 그 아기 곰을 저로 생각했어요. 막 제가 넘어지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고요. 곰은 말을 안 하니까 대사도 없고 단순한 내용이었죠. 그런데도 극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반응하면서 영화적 체험을 온전히 다 함께하는 느낌이었어요.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에요.

제가 감독님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들에게 느끼던 마음과 비슷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처음 생각해보는데, 저도 모르게 예전 기억들이 남아서 영화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여러 아이들의 이야기를 했죠. 감독님은 어떤 아이였나요?

말수가 없고 내향적인 아이였어요. 소심하고 겁도 많고요. 혼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했어요. 너무 조용해서 반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친구기도 했죠. 착한 어린이 상을 받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 가장 가만히 있는, 사건사고를 안 일으키는 아이한테 주는 상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아이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어요. 늘 이어가면서 생기는 고민도 있을 것 같고요.

제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아이들과 제 마음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그때 감정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마음은 여전히 같죠. 일종의 책임감도 느껴요. 작은 아이들의 인생 안에 아주 작은 고민도 소중하니까,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자주 다짐해요. 이야기 속에 자극적인 사건을 덜어내고 그 인물에 집중하려는 작업도 이런 생각에서부터죠.

 

처음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 시작이 궁금해요.

정확히 기억해요.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였고, 커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시기였어요. 영화를 너무 좋아했고 그만큼 많이 봤죠. 그때는 영화적 재능이 있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단순하게 좋아하는 걸 하면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너무 평범하고 소심하고 주목받은 적도 없는 보통의 사람인데 영화를 하면 조금 특별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죠. 여러 마음들이 있었어요. 한편으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허세도 부린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일인지 정말 몰랐어요. 잘 안 맞는 것 같은데 계속하고 있네요(웃음).

 

그래도 영화를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요?

많이 방황했어요. 지금도 하고 있고요. 그런데 좋을 때는 너무 좋아요. 양극이 교차하는 거죠. 영화를 만드는 건 한 사람의 인생을 담는 것과도 같은 과정이에요. 그래서 신이 되는 것 같을 때도 있죠. 그런데 다음 날 지옥으로 떨어져요. 여기 어디야 싶고(웃음). 그래도 결국엔 계속하죠.

 

<우리집>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지금 마음은 어떤가요?
 
심장이 터질 것 같죠(웃음). 걱정도 많고 설레기도 하고요. <우리들> 때도 그랬는데 도무지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최근 몇 년 동안 다양성 영화 시장이 어려워지기도 해서, 많은 분들이 극장에서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요. 무척 긴장되네요.
 
 
감독님의 다음 영화는 어떤 이야기일까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우리’ 3부작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농담처럼 스태프들과 다음 영화는 ‘우리나라’로 해보자는 말도 하고요(웃음). <우리들>은 친구, <우리집>은 가족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어요. 세 번째는 새로운 아이들의 또 다른 이야기를 담겠죠. 지금까지 같이 해온 사람들과 마무리하는 여정으로 다음 영화를 시작해보고 싶어요.

명장면 돌아보기

 

S# 김치볶음밥을 먹는 선과 윤 그리고 지아

“시나리오는 단 세 줄이었어요. 상황 묘사뿐이었죠. 원래는 선이가 해야 할 말을 윤이가 하기도 했어요(웃음). 명장면으로 꼽은 이유는 제 개입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기 때문이에요. 감독으로서 아이들의 순수한 순간을 방해하지 않았을 때 얻어진 소중한 결과죠.”

ⓒ <우리들>

<우리들>(2015)

윤가은 | 드라마

 

외로운 아이 ‘선’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 ‘지아’를 만났다. 함께 이야기하며 밥을 먹고 잠도 같이 잘 수 있는 친구를 만나 행복하기만 하다. 꿈같던 한 여름, 이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우정에 모양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과 닮아 있을지 모른다.

 

영화감독 

윤성호

He Will Keep Changing

이거, 묘하게 좋네

 
윤성호가 건네는 가벼운 농담을 입안에 담고 굴린다. 굴리다 굴리다 살짝 깨물었는데, 그 속에 단단한 뼈대가 있다. 농담이라고 가볍게만 봤다가 큰코다칠 뻔했다. 그가 만드는 탄력 있는 이야기는 때에 따라 늘어났다가 줄어들면서 쫄깃한 재미를 건넨다. 단편영화에 번쩍, 장편영화에 번쩍, 웹드라마에 번쩍,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오가는 감독 윤성호는 여기가 어디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이왕이면 잘하고 싶다. 변화하는 세상에 맞추는 대신, 꼿꼿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는 스쳐 가는 장면도 골똘히 궁리하는 생각 많은 이야기꾼이다.

올해도 절반 넘게 지났는데 새 작품 소식이 없어서 아쉬워요.

생각해보면 매년 적게는 두세 개라도 무언가 만들어왔는데 올해는 딱히 연출한 작품은 없네요. 그래도 알게 모르게 작업은 계속하고 있어요. 최근엔 TV 채널을 노리는 드라마와 독립영화, 상업영화 기획에 참여하고 있죠.

 

TV 드라마까지! 이제 영화감독이라고 소개할 수만은 없게 됐어요.

요즘은 영화보다 드라마 쪽에 무게를 싣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 발표한 작품 <탑 매니지먼트>(2018)를 소개하면 답변이 될 것 같아요. 작년 10월에 공개한 유튜브 오리지널 드라마인데, 방영 당시보다 지금 인기가 훨씬 많아진 서은수, 안효섭, 차은우 등이 주연을 맡은 작품이죠. 제가 기획한 건 아니고 웹 소설이 원작인데요. 유튜브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이 확정되자 제작사 측에서 연출을 제안해왔어요. 연출 겸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거쳐 16부작 드라마로 만들었죠.

 

20년 가까이 활동하는 동안 악동, 재치, 솔직 등 많은 수식어와 함께했어요. 본인을 수식하는 가장 진실된 단어를 꼽아본다면요?

음… 실용적이다, 유연하다? 저는 독립영화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출발이 그래서인지 영화는 독립영화, 드라마는 OTT*를 통해 선보이는 식으로 주로 활동해왔어요. 그러면서도 대중적인 작품을 병행했죠.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2018)라는 단편영화는 민주노총의 제안이 흥미로워서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 소박한 예산으로 제작한 온라인용 콩트인데요. 이 작품이 전자의 경우라면, 앞서 언급한 <탑 매니지먼트>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유연하다, 투 트랙two track이다, 라는 말들로 표현하면 적합할 것 같아요. 근데 요새는 이런 방향으로만 활동할 순 없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어떤 이유에서요?

얼마 전에 ‘새로운 플랫폼이 많아지는 시대에 창작에서의 핵심’에 관해 이야기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게 됐는데, ‘영화만 우월하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TV 채널만 고집하지 말고 웹이나 앱도 고려해야 한다.’ 등을 준비하던 중에 불쑥 반드시 유연해질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 바뀌는 세상 속에서 하나의 견해가 절대적일 수는 없겠더라고요. 어차피 우리는 모든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발전시키는 게 옳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저는 유연해지는 게 이제 크게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차라리 하고 싶은 이야기를 꼿꼿이, 다만 지금보다 더 많이 궁리해서 잘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에요.

 

중요한 얘기네요. 그간 워낙 유연하게 작업해와서 고민되는 지점이기도 할 것 같아요.

맞아요. 최근 몇 년 동안의 저는 하나의 기준만을 가지고 작업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컵에 담기는 액체도 만들 수 있고, 그릇에 담기는 음식도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죠. 변하는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강박도 있었어요. 그게 가능하다는 걸 장점으로 여겼고요. 물론 지금도 그런 태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거나 부끄러운 건 아니에요. 그러나 저도 오랜 시간 작업을 해왔고 나이도 제법 먹었는데, 이젠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얘기를 하는 게 중요하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야기네요. 다양한 방향에서 활동한 만큼, 그 출발부터 짚어보고 싶어요. 영화를 만들겠다고 맘먹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나요?

본격적으로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첫 장편영화 <은하해방전선>(2007)을 만들고부터예요. 처음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삼천포 가는 길>(2001)은 본격적인 작품이라기보단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학생들이 모여 ‘우리도 단편영화제에 출품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만든 짧은 영상이었거든요. 졸업을 앞둔 동기들과 캠코더 하나만 들고 찍은 작품이죠. 만일 지금 만들었다면 유튜브에 올렸을 것 같아요. 영화감독을 맘먹게 해준 작품은 아니지만, 첫 작품에겐 고마운 마음이 있어요.

 

<은하해방전선>은 지금도 많이 언급되고 있어요. 2017년엔 10주년 행사도 있었고요.

이 작품은 제안받아서 만들게 된 영화인데, 그 당시엔 짧고 소소한 영상에 집중하던 때라 장편영화를 제작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없었어요. 단편만 만드는 영화감독에게 장편 제의가 들어오는 건 언뜻 멋져 보이기도 하지만, 저에겐 장편에 투입되면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겠단 두려움이 있었죠. 그 당시만 해도 연출 경력은커녕 배우 캐스팅 경험도 없었거든요. 약간은 겁을 먹고 제작했는데, 막상 장편영화를 만들고 나니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됐어요. 그 영화엔 이전엔 잘 하지 않았던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이나 인위적인 내용도 넣고, 살짝이지만 멜로 코드도 담았거든요. 근데 의외로 제가 부끄러워한 대목들을 대중이 좋아하더라고요. 사람들이 제 영화에 공감하고 웃는 걸 보면서, 제가 관객들이 반응해주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를 겨냥한 윤성호식 블랙 유머를 빠르게 내놓는 게 가장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서툴지만 <은하해방전선>을 제작한 이후엔 각본, 연출, 캐스팅하는 즐거움과 관객의 반응에서 오는 재미와 보람을 알게 됐어요. 

 

<은하해방전선>에서 주인공 영재가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되잖아요. 문득 윤성호 감독이 무성영화를 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어! 저 그거 진짜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작정하고 만든 게 <백역사>예요. 강경태, 구교환, 이옥섭 감독과 한 편씩 영화를 만들어 옴니버스로 구성한 <오늘영화>(2014)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데요. 여기에 제가 만든 캐릭터 중 제일 말이 없는 인물이 등장해요. 말을 하더라도 합리적이질 않죠. 아마 이 영화에서 대사를 전부 지워도 크게 문제는 없을 거예요. 본격적인 무성영화는 언젠가 꼭 도전해보고 싶어요.

 

독립영화를 ‘영화의 본질에 비교적 충실하다’고 언급한 인터뷰를 봤어요. 영화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오래전 인터뷰일 텐데 잘 모르고 한 소리 같아요(웃음). 본질이란 게 참 애매하죠. 그 당시 이야기하고자 한 건 ‘영화라는 게 실은 처음엔 모두 독립영화 아니겠느냐’라는 거였어요. 상업영화로 흥행한 작품도 처음엔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살을 붙여나가는 거잖아요. 독립영화만이 최선이라는 뜻은 아니었던 거죠. 오히려 저는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 데는 상업영화의 영향이 크다고 봐요. 우리는 극장에서 클리셰대로 흘러가는 상업영화를 보면서 즐거워하곤 해요. 로맨틱 코미디를 예로 들면, 대개 성향이 다른 두 남녀, 남남, 혹은 여여가 만나서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데, 그걸 부정하다가 마지막엔 공항에서 극적으로 만나 끌어안는 식으로 흐르잖아요. 이런 클리셰의 진행 안에서 수많은 변주가 이루어지는 게 로맨틱 코미디 계열인데, 비슷한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하는 데서 사람들은 재미를 느끼는 게 아닐까 해요. 수많은 표현 방식이 있기 때문에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장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요. 그렇다면 영화의 본질은 ‘재미’ 아닐까요?

 

결국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에 절대 선은 없다는 말이네요.

맞아요. 십여 년 전엔 독립영화를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꽤 많아서 독립영화를 굳이 상업영화와 비교해서 소외시켜버리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당시엔 독립영화 편에 서서 항변한 건데, 사실 독립영화든 상업영화든 어느 하나가 최선일 수 없단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방금 영화의 본질을 ‘재미’라고 답했지만, 사실 본질이란 건 시대적으로, 또 개인의 성장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나 볼 발그레 효과는 감독님 작품의 작은 즐거움이었는데, 최근엔 자주 못 본 것 같아요.

볼 발그레 효과는 영화는 아니고 드라마에서 자주 사용하던 건데, 말씀하신 대로 안 쓴 지 꽤 됐죠. 사실 이런 장치는 예능적이잖아요. 영화적, 예능적의 기준은 볼 발그레 같은 부가 장치 없이도 하고자 하는 말이 전달되는지 여부에 있다고 봐요. 예능은 연기자, 대본, 스토리를 통해 감동을 주는 것보다 문득문득 그 자리에서 재미를 주는 데 더 집중하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재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장치를 동원하죠. 반면, 영화에는 부가적인 장치가 많을수록 튕겨 나가는 것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부가적인 장치를 더하면 과하고 부담스러운 경향도 있고요. 제가 이전에 부가 장치를 즐겨 쓴 이유는 간단해요. 그땐 남들이 하지 않는 요소였거든요. 부가적인 효과를 지양하는 영화감독이 예능에서나 볼 수 있는 효과를 영화제 출품작에 적용했다는 자체가 신선했으니까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장치가 유행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더는 특별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저한테 의미가 없어졌어요. 이렇듯 재미의 기준도 계속해서 바뀌는 것 같아요. 

 
 
 

4분 남짓부터 10여 분, 20여 분, 100분에 가까운 영상까지 러닝타임이 다채로운데요. 여러 가지 호흡법을 익히면서 요령이 생겼을 것 같아요.

그간의 활동을 생각해보면 요령보다는 일종의 패턴이 있었어요. 한창 단편영화를 만들 땐 시나리오를 길게 써야 하는 상황이 오면 좀 난감했는데, 요새는 반대로 긴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짧은 호흡의 작품을 이어서 긴 작품으로 만드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요.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10분 남짓인데,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모두 모으면 100분이 되는 거죠. 유튜브 콘텐츠로 제작한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2010)를 준비할 땐 짧은 호흡으로 작업하던 시기였는데요.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튜브 콘텐츠가 3분이 넘어가면 클릭을 잘 안 하거든요. 그래서 5분 정도로 제작하려 하니 스태프들이 한 에피소드당 10분은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묻더라고요. 2010년만 해도 10분은 되어야 작품처럼 보였던 거죠. 그런데 인생이 참 드라마 같은 게, 지금은 다들 이전에 제가 작업하던 3~5분 남짓의 짧은 영상들을 원하잖아요. 근데 막상 지금의 저는 에피소드 하나에 서브플롯을 포함한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생겨서 긴 호흡으로 작업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어요. 가만 보면 저는 시대 흐름과 살짝 거꾸로 가는 패턴이 있는 것도 같아요. 그래도 제가 원하는 방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고, 시대 흐름이 어떻든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짧은 호흡으로 만든 영상들에는 공통적으로 ‘두근두근’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어요.

장편영화를 한 편 만들고 나면 여러 가지 제안이 들어오는데, 두 개의 갈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장편 상업영화 제안이고 다른 하나는 옴니버스, 콩트, CF 등 길이가 짧은 작업들이죠. 저는 <은하해방전선> 개봉 후 후자의 작품에 많이 참여했어요. 한국영상자료원 재개관 기념 단편(<두근두근 시네마떼끄>(2008)), 인디 배급사 인디스토리 10주년 기념 단편(<두근두근 인디스토리>(2008)) 같은 작품들이죠. 제작비 걱정 없이 기량을 키우는 건 즐거웠는데, 막상 완성된 단편들이 행사에서 한 번 사용되고 끝난다는 게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제목을 전부 ‘두근두근’으로 통일해서 인터넷에 업로드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두근두근’ 시리즈가 쌓여갔는데, 이왕이면 캐릭터도 고정해두고 진행하면 재밌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바로 이 시대의 시트콤일 거라 생각했고요. 독립적으로 시트콤을 만들어보려고도 했는데 의뢰 작업이 많아 제대로 진행하진 못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웹드라마들이 그런 작업의 연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간의 행보를 소개할 때 박희본, 박혁권 배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감독님의 페르소나라고도 불리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두 배우가 나랑 정말 잘 맞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게 돼요. 최근엔 이 두 분보다 이주승, 윤박 등과 함께한 작품이 더 많은데 누군가 그들을 저의 페르소나로 지칭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페르소나의 뜻은 가면이잖아요. 감독이 캐릭터에 많이 투영된다는 건데, 사실 희본 씨나 혁권이 형이 맡은 캐릭터에 제 모습을 담은 적은 없거든요. 우선, 희본 씨는 성별이 다르기 때문에 쉽게 제 모습을 담기 어려웠어요. 또 혁권 형과는 최근 들어 긴 호흡의 작업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을뿐더러 항상 불청객이나 약간 사이비 같은 타입으로 그려지는데, 그에 비해 저는 회사원 같은 평범한 이미지거든요. 닮은 구석이 전혀 없죠. 그런데도 박희본, 박혁권 배우를 제 페르소나로 생각한다는 건 저의 아주 작은, 재미있는 부분을 그들이 훌륭하게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말하자면 궁합이 좋은 거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출출한 여자>(2013), <썸남썸녀>(2014)…. 최근엔 영화보다 웹드라마와 더 가까이 지내고 있는 걸로 알아요. 웹드라마를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요.

어떤 기기로 감상하느냐의 문제지, 웹드라마에 장르적인 의미는 없다고 봐요. 시대가 변하면서 영상 콘텐츠를 감상하는 기기도 계속 변하고 있어요. TV에서 웹으로, 웹에서 앱으로, 또 동시다발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죠. 사실 요즘은 이런 기기 장치에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TV에서 웹드라마를 방영해도, TV 드라마를 유튜브에 업로드해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경우도 많거든요 선남선녀의 젊은 배우들이 약간은 어설프게 연기하고,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도 납작하고, 화면도 평면적일 때 ‘웹드라마 보는 거 같다.’는 표현을 쓰잖아요. 그런데 그런 결의 작품이 TV 메인 채널에서 방영되는 경우도 많아졌어요. 결국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어떤 밀도로 하느냐에 따라 그 분위기는 달라지는 거죠. 이제는 TV 드라마도 웹드라마처럼 플랫할 수 있고, 웹드라마가 상업영화보다 더 밀도 높은 촬영을 할 수도 있는 거예요. 
 
<대세는 백합>(2015), <내일부터 우리는>(2017) 등에서는 동성애를 주요소로 다루기도 했어요. 성소수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2017년에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내일부터 우리는>을 초청해주신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질문과 비슷한 질문을 받았어요. 성소수자가 항상 등장하는 것 같다는 질문이었죠. 정치적인 올바름에 대한 일종의 강박 아니냐고 농담조로 질문하셨는데, 제 답은 무척 간단했어요. 고등학생 때 제가 같은 반 
남자애를 좋아한 경험이 있거든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 성 정체성이 남자를 좋아하는 쪽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성인이 되고 연애를 하면서 아니란 걸 알게 됐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양성성에서 하나의 방향으로 고착되기 전에 느낀 감정이었지 싶어요. 동성애 콘텐츠는 제가 같은 반 동성 친구를 좋아한 경험에서 풋풋하고 귀엽던 모습을 꼽아 그려낸 작품이 많아요. 성소수자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제 과거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라고 봐요.


영화든 웹드라마든 서사를 가진 영상에서 캐릭터 구축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서사에 캐릭터를 맞추는 분도 있고, 캐릭터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품도 많고, 스토리 구조나 플롯이 아니라캐릭터가 제일 중요한 사람도 있을 텐데요. 사실 모두 다 중요해요. 스토리를 만드는 게 캐릭터고, 캐릭터가 있어야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 이전에는 캐릭터를 만들 때 자연스럽게 저나 아는 사람들을 과장하는 식으로 작업했어요. 저의 일부분, 혹은 주변에 있는 걸 부풀리는 식이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를 닮은 남자 캐릭터엔 관심이 없어졌어요. 영화랑 드라마 만드는 사십 대 남자에게 제가 무슨 흥미를 갖겠어요. 오히려 내가, 또 사람들이 어떤 캐릭터를 재미있어하는지 생각해보게 됐죠. 그래서 <출중한 여자>(2014), <게임회사 여직원들>(2016) 같은 작품에 참여하는 게 의미가 커요. 저랑 관계가 없진 않지만, 애초에 등장인물들의 성姓이 다르다 보니 제가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잖아요. 여성들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데 의미를 두게 됐죠.
 

 

좋은 영화, 혹은 좋은 웹드라마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좋은 아이러니로 시작해서 또 다른 의미 있는 아이러니로 끝나는 거요. 모든 스토리에서 제일 중요한 지점은 아이러니라고 생각해요. 정확히는 내가 실제로 살아가는 이야기에는 아이러니한 일이 없을수록 좋지만, 남에게 들려주려고 만들어내는 이야기에는 아이러니가 강할수록 좋죠. 훨씬 재밌거든요. 저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재밌게 들려주기 위해 이야기에 아이러니가 필수예요. 요새는 데이터도 많고 작업해본 사람들이 늘어나니까 시작할 때 강조되는 아이러니는 누구나 잘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긴 여정의 끝에 하나 더 있어야 할 아이러니가 없는 경우는 참 많아요. 이목을 끌기 위해 첫 번째 아이러니에는 힘을 쏟는데 마지막 아이러니가 없어서 용두사미로 끝나버리죠. 
 
 
마지막 아이러니 때문에 대중이 원하는 결말에서 멀어진다면요?
 
아이러니가 대중의 기대를 충족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그게 마지막 아이러니의 핵심이죠. 대중의 기대를 배반하더라도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면 좋은 작품일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마지막 아이러니에 집중해서 고민하곤 해요.
 
 
앞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계속해서 재미있는 작업을 선보이고 싶어요. 꼭 새로운 것에만 도전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저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해요. 대중이 제 작품을 보고 ‘아, 이거 아이러니하네, 그래서 좋네.’라는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아이러니 때문에 극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묘하네.’하고 반응하는 작품이면 좋겠어요. 이 정도 반응만 끌어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믿어요. 앞으로 나아갈 길의 핵심은 연출자 역할만 고집하지 않고 더 넓게 접근하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제 각본을 주거나 타인의 각본을 제가 프로듀싱하는 등 많은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렇다고 연출을 안 하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연출은 하고 싶을 때, 제가 꼭 하고 싶은 작품만 선별해서 하는 게 앞으로의 목표예요. 나머지 에너지는 잘 배분해서 저보다 더 간절하고, 더 재미있게 만들 사람을 견인하면서 같이 달려나가고 싶어요. 
 

다재다능 윤성호 브리핑

워낙 폭넓게 활동하고 있어서 윤성호 감독의 단편적인 부분만 알고 있는 사람들 모여라! 윤성호가 추천하는 윤성호 작품들로 그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보자.

 

ⓒ 윤성호

01 | 윤성호가 누구야?

<탑 매니지먼트>(2018). 무조건 가장 최근 걸 보면 된다. 거기에 내가 있다. 그래서 지금은 <탑 매니지먼트>다(웃음).

 

02 | 윤성호 작품이 웃긴다며?

<썸남썸녀>(2014).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다. 동시에 유통이 가장 덜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 이후 알고 있는 모든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편성팀부터 국장까지 함께 드라마를 하자고 제안해왔다. 난생처음 겪어본 재밌는 시기였다. 지금은 콘셉트도 제목도 진부해 보이지만 그땐 이런 드라마가 희소성도 있고 특이했다. 

 

03 | 윤성호 감독의 매력이 뭐야?

<출출한 여자>(2013). 남 이야기를 제대로 한 거의 첫 번째 작품이다. 등장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고, 다른 동료 감독과 연출을 나누어서 진행했다. 동료들과 함께한 데 의미가 많다. 소소한 웹드라마이긴 했지만, 앞으로 내가 걸어가고 싶은 길이다. 

 

04 | 이거 윤성호 감독 작품 맞아?

<게임회사 여직원들>(2016). 웹툰이 원작인 작품인데, 원작이 있는 경우가 처음이었고 여성 작가가 만든 여성 주인공의 작품을 내가 연출하면 제대로 살리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료 중 가장 재주가 많은 이랑 감독에게 윤색과 메인 연출을 부탁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말을 아끼게 된다. 

 

05 | 윤성호 감독이 영화도 찍었다며? 

<은하해방전선>(2007).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내용과는 많이 다른 작품이어서 추천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래도 영화를 꼽으라면 이 작품을 소개할 수밖에 없는데, 말하자면 윤성호의 사용설명서 같은 작품이다. ‘지금은 바뀌었습니다.’라는 별지를 붙이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도 이 답변은 <은하해방전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영화감독 

전고운

 

The Warmest Person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끼는 면면

 
 그녀는 상상보다 더 해사한 웃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처음엔 <소공녀>(2017)에서 미소가 보여준 따뜻함이, 어떤 순간엔 <키스가 죄>(2019)에서 한나의 대담하고도 천진한 얼굴이 묻어났다. 대화가 끝난 후에는 영화 속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과 마주했다. 그녀는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을 영화 속에 담아내며 그 사이에 자신의 모습도 조금씩 기록해가고 있었다. 내가 본 웃음을 닮은 방식으로, 유쾌함도 잃지 않으면서.
 

요즘 어떻게 지냈나요?

얼마전, 넷플리스 오리지널 영화 <페르소나>(2019)의 옴니버스 작품인 <키스가 죄>를 개봉 하고 조금 바쁜 시기를 보냈어요. 낯선 사람들도 많이 만나면서 틈틈이 쉬는 시간을 가졌고요. 특별한 취미가 따로 있는 건 아니라서, 휴일도 변함없이 평범하게 보낸 것 같아요. 보통 책이랑 영화를 봐요. 요즘엔 게임도 자주 했어요.

 

어떤 게임 해요?

컴퓨터 카드 게임을 즐겨 해요. 요즘엔 조금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하기도 했죠(웃음).

 

원래 게임을 좋아해요?

카드 게임같이 단순한 것을 좋아해요. 사실 <소공녀>(2017)이후로 1년 동안 잘 쉬지 못하고 바쁘게 지냈어요. 그리고 바로 <키스가 죄>개봉으로 바빠졌고요. 영화를 개봉할 때마다 많은 시선에 노출되면서 자연히 따라오는 여러 평가들과 낯선 연락들이 그동안 조금씩 무겁게 쌓였어요. 그래서 생각을 없애려는 노력을 하는 거죠. 그렇게 하게 된 게 컴퓨터 카드 게임이고요. 작은 생각들을 떨치기에 좋아요. 이런 이유로 핸드폰을 바꾸기도 했어요.

 

아까 봤어요. 폴더폰을 쓰고 있더라고요. 불편하지 않아요? 인터넷이 전혀 안 되잖아요.

막상 써보면 불편하지 않아요. 밖에 나오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대부분인데 그 순간에는 그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요. 꼭 필요한 연락은 다 되더라고요. 스마트폰이 유익한 점도 있지만 결국엔 허구잖아요. 사람 얼굴을 직접 보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이 모든 게 마치 모두 진실인 것처럼 믿는 게, 어느 순간 허무하게 느껴졌어요. 예전에는 스마트폰으로 혼자 제 이름을 자주 검색하며 나 자신을 괴롭게 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서 좋아요. 시간이 명확히 구분되는 장점이 있죠.

 

그러고 보니, <소공녀>에서도 미소가 핸드폰을 보는 장면이 없어요.

맞아요. 의도했죠. 핸드폰을 넣으면 많은 것이 빨리 해결돼요. 핸드폰이 안 나오는 영화를 본 지도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그래서 미소에게 핸드폰을 주지 않았어요.

 

위스키도 못 마시고 이야기를 했네요. 마셔볼까요?

(각자 앞에 놓인 위스키를 마신다.)

글랜피딕이라고, 미소가 마시던 위스키예요. 몰트 위스키 중에 가장 대중적인 위스키죠.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미소는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었나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가족도 없고 잃을 것도 없어서 큰 욕심 없이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래도 가난하고 고독하면 힘들잖아요. 이렇게 지친 마음을 달래는 거죠.

 

미소가 가족이 없는 이유는 뭘까요?

외로운 사람을 말하고 싶었어요. 갈 곳 없는, 연고지가 없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을 그리는데 가족은 어쩌면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감독님이 만약 미소라면 집을 포기하고 어떤 것들을 선택할까요?

저는 일단 포기한다면 국가를 포기하고 싶어요(웃음). 다른 나라로 떠나서 살아보고 싶거든요.

 

국가를 포기하다니(웃음). 그런데 제가 드린 질문은 어떤 것을 선택할 건지였어요.

예리하시네요(웃음). 사실 제가 집을 너무 사랑해서 집을 포기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차라리 죽음을 택할까요(웃음). 제 성격으로는 미소처럼 못 해요. 집순이라서.

 

그럼 미소와 감독님은 정반대의 사람일까요?

그런 점도 있고 아닌 점도 있어요. 미소는 제가 닮고 싶은 부분을 가진 사람이에요. 저는 약간 세속적인 사람인데, 미소는 그렇지 않아요. 욕망이 심플하고 행동이 과감하죠.

 

그럼 비슷한 점은요?

사랑이 많은 점이요. 친구를 좋아하고 애인을 좋아해요. 사람에 대한 정이 많아요.

 

친구를 좋아하는 건 확실해 보여요. <소공녀>와 <키스가 죄> 모두 감독님의 친구 분들의 이야기로 시작했죠.

맞아요. 미소는 제 친구들의 여러 모습을 닮았어요. 제 절친 중에 한 명이 몸이 아파서 일을 못 하던 때가 있었어요. 저라면 너무 우울할 것 같은데 친구는 물과 담배만 가지고 잘 살아가더라고요. 아직도 그 친구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요.

 

그럼 한나는 누구일까요?

한나는 저예요(웃음).

 

실제로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했나요?

고등학교 때 친구가 갑자기 학교를 안 나와서 집 주소를 수소문했어요. 결국 알아내서 찾아갔더니 제 친구 목에 키스마크가 엄청 찍혀 있는 거예요. 그 친구는 울고불고 난리가 나 있었죠. 아버지한테 엄청 혼나고, 그래서 학교도 못 나오고요. 그때를 떠올려보면, 처음엔 친구가 나보다 먼저 키스를 했다는 게 놀랍고 신기했어요. 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 다음은 ‘왜?’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키스마크를 만든 상대 남자는 별 탈 없을 텐데 왜 내 친구는 부끄러워서 학교도 못 나와야 하는 걸까, 하면서 화가 났었죠. 저한테는 그 일이 늘 이상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어요.

한나와 감독님은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친구 좋아하는 게 딱 저예요. 그 시절은 정말 친구가 다잖아요. 어쩌면 가족보다 더 소중한 존재죠. 영화 <친구>(2001)의 카피인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를 좋아하기도 해요. 누가 제 친구를 괴롭히면 어린 마음에 다 혼내주고 싶고 그랬죠(웃음).

 

감독님은 한나 나이 때 어떤 학창 시절을 보냈나요?

저 고등학교 때 엄청 암울한 아이였어요. 우울하고 반항적이고 공격적이고,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바보 같다는 생각도 했고요. 학교의 부조리한 제도나 폭력, 모든 강압적인 것들이 싫어서 이어폰을 끼고 주변을 막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럼 조금은 특별한 친구였을 것 같아요.

친구들이 ‘또라이’라고 했어요(웃음). 특이하다는 말이었겠죠. 친오빠에게 가장 많이 들었어요. 지금은 그런 표현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상처가 되기도 했어요.

 

오빠랑 사이는 좋아요?

여느 남매처럼 친하게 지내다가도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이제는 잘 지내고 있어요. <소공녀>가 개봉하고 오빠의 회사 동료 분들이 알아봐주고 하니 기분 좋아하는 오빠의 모습이 귀엽게 보이기도 했죠.

 

다시 <키스가 죄> 이야기를 해볼게요(웃음). 한나와 혜복이는 성격이 정반대예요. 두 친구는 각자 어떤 역할을 하나요?

일단 한나의 이름은 ‘화나’에서 왔어요. 화도 많고 보호 본능이 많은 성격의 한나는 폭력에 노출된 혜복이를 지켜주려 하죠. 한나를 통해서 혜복이가 당한 것처럼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반대 성격인 혜복이는 빈틈이 많아요. 귀엽기도 하고요. 그런데 폭력에 둔감한 친구예요. 너무 익숙해져서 인식 자체를 못 하죠. 그래야 살아가니까요. 혜복이를 통해서는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말하고 싶었어요.

 

이 둘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극을 꾸며요. 귀엽고 소심한 방식으로요. 코미디 코드를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남자들의 유쾌한 우정 스토리는 많은데, 여자들의 재미있는 버디물은 많이 본 적이 없어서 꼭 만들어보고 싶었죠.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여고생 이야기를 다룰 때 통상적으로 쓰이는 판타지를 깨고 싶었어요. 여고생 하면 항상 치마 교복을 입고, 귀엽고 밝은 소녀로 많이 그려지는 점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저는 그런 여고생이 전혀 아니었거든요. 제 주변 친구들도 그렇고요. 어릴 때 여고생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꼭 내가 저렇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무조건 예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이래도 괜찮아.’ 하는 마음을 말하고 싶었죠. 제 친구가 겪은 가부장제의 부조리를 유머러스하게 혼내주고 싶기도 했어요. 완전 불태워버리겠다 하면서요(웃음). 고등학교 때 제가 실제로 느낀 의문도 풀고 싶었고요.

 

마지막엔 정말 불이 나죠.

맞아요.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제가 그런 걸 좋아해요. 터무니없는 농담처럼, 남편한테 “가부장제를 불태울 거야.” 하고 말했어요.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더니 갑자기 아이디어를 주더라고요. “시골이니까 닭에 불이 붙어 탈출하고, 그래서 산불이 나는 건 어때?” 그렇게 가볍게 던진 농담으로 결말을 정했어요.

 

사실 이 결말 때문에 개봉이 미뤄지기도 했어요. 안타깝게도 개봉 시점에 강원도 산불 사건이 일어났죠.

맞아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사실 모든 장면이 다 CG였고 영화적인 표현이라 잘못된 건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 때문에 개봉을 미룰 수밖에 없었죠. 심지어 개봉 30분 전에 결정됐어요. 그동안 저는 속이 새까맣게 탔죠. 엄청난 고통이었어요. 시기가 안 맞아서 생길 여러 오해들로 지은 씨에게 피해가 될까 걱정도 됐어요.

 

주연인 이지은(아이유) 배우가 워낙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위치다 보니 당연히 그랬을 것 같아요. <키스가 죄>는 한 명의 배우를 네 명의 감독이 자신만의 색을 담아 이야기한 영화죠. 이전 작업들과는 다르게 캐스팅이 먼저 정해지고 시나리오 작업이 시작됐어요. 그 과정은 어땠나요?

처음 겪는 과정이라 어렵기도 했어요. 배우를 빛내면서 동시에 저도 흥미를 느끼는 화두를 담고 싶었거든요. 늘 이야기를 먼저 쓰고 캐스팅을 하는 과정을 거치다가 반대의 상황이 되니, 많이 방황했어요. 구상하는 기간만 한 달이 걸렸던 것 같아요.
 
 
한나가 온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혜복아’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인상적이었어요. 진짜 한나 같더라고요. 어떻게 찾은 톤일까요?
 
일단 지은 씨가 화가 없어요. 기본적으로 온화한 사람이고요 한나는 화가 많은 인물인데 이런 부분에서 둘은 반대였죠. 그래서 지은 씨에게 화를 심어주려고 노력했어요. 워낙 똑똑한 배우라, 혼자서도 잘 해냈죠. 분위기만 조성해주면 톤을 잘 잡아냈어요.

어떻게 분위기를 잡았나요?

사실 큰 건 아니고요. 음악을 추천해줬어요. 영화 <킬빌>(2003) OST 같은 거(웃음). 제가 원래 화가 많고 역동적인 느낌을 좋아해요.

 

어떤 음악 좋아해요?

엄청 중구난방이에요. 기분에 따라서 다른데, <007 스카이 폴>(2012) OST도 좋아하고, 요즘은 잔나비 노래도 들었어요. 얼마 전에 혁오 콘서트도 갔었고요.

 

혁오 콘서트! 부러워요.

재미있었어요. 관객 눈치 안 보고 관객을 리드하는 느낌이 좋았어요. 원래 사람 많은 데 잘 안 가는데, 이솜 씨가 보여줘서 남편이랑 셋이 갔죠.

 

신기한 게, 제 친구가 어제 홍성 CGV에서 이솜 씨를 봤대요(웃음).

또 영화 보러 갔구나(웃음). 아마 드라마 촬영 때문에 갔을 것 같아요.

 

영화에서 이솜 배우는 흰머리가 나도 멋있더라고요. 언젠가 시나리오의 구멍을 채워준 배우라는 말을 하기도 했죠. 배우 이솜은 미소랑 얼마나 닮은 사람인가요?

솜이 씨는 일단 미소와 일치하는 점이 많지 않았어요. 미소가 워낙 판타지 같은 인물이니까요. 그래도 우리 둘은 잘 맞았어요. 그래서 미소에게도 빨리 다가갈 거라고 생각했죠. 솜이 씨도 미소를 아예 이해 못 한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맞춰갔죠. 미소라는 캐릭터가 자칫 잘못하면 비호감으로 보일 수 있는데 솜이 씨가 아주 자연스럽게 풀어냈죠. 관객들을 이해시키는 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감독님과 이솜 배우, 어떤 점이 잘 맞던가요?

둘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비슷해요. 솜이 씨한테 캐릭터상 노메이크업을 권해야 했는데 흔쾌히 수락해줬어요. 민감할 수 있는 담배 설정도 고민 없이 받아들여줬고요. 정작 본인은 흡연가가 아니라 몸이 상하는 일인데도요. 멋있는 사람이죠.

 

이솜 배우가 연기한 미소는 위로를 받아야할 상황인데 반대로 위로를 주는 사람이기도 해요.

미소는 요즘 사람들이 가장 못하는 걸 가장 잘해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죠. 미소는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있는 사람의 상태를 살펴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요. 사실 위로라는 게 별거 없잖아요. 상처받은 사람들은 그냥 자기 말을 들어주기만 해도 괜찮아지는데, 우린 그걸 잘 모르고 바쁘게 넘어가기 일쑤죠. 그런데 미소는 그렇지 않아요. 따뜻한 사람이죠.

 

자신의 취향을 지켜가는 삶, 미소가 원한 게 그거였을까요?

미소가 원한 건 취향만은 아니에요. 사실 미소가 정말로 찾으려 한 건 사람,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관계는 계속 멀어져 가고, 남자친구도 떠나가죠.

 

미소는 감독님의 이상향을 담은 인물이라고 들었어요. 요즘 감독님의 이상향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실 미소는 제 이상향은 아니고 이상형이 더 맞는 것 같아요. 이상향은 지향점으로 따라가고 싶은 건데, 저는 미소처럼 살 생각은 없어요. 그런 용기도 없고요. 예전부터 생각해왔는데, 성실한 사람이 좋아요. 몸을 잘 쓰는 사람도 좋고요. 제가 운동을 싫어하고 잘 못하기도 해서, 반대의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거 같아요.

 

그럼 다음 영화의 주인공은 몸을 잘 쓰는 성실한 사람일까요?

그럴 수도 있죠. 몸을 잘 쓰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하네요.

 

다음 작품에서 함께하고 싶은 배우가 있나요?

어떤 배우 한 명이라기보다는, 여배우들이 한 번에 많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8명의 여인들>(2002)에는 프랑스의 명배우 여덟 명이 나오는데, 그런 영화를 찍어보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의 저는 이르죠. 연륜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소공녀>는 감독님의 중간 보고서라는 말을 했어요. 다음 영화는 최종 보고서에 가까울까요?

아니죠. 계속 중간이에요(웃음). 죽을 때까지요.

 

<소공녀> 이후로 감독님 주변에 변화가 많았을 것 같아요.

가장 큰 변화는, 제가 감독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직업적인 정체성이 확실해졌죠. 부모님의 대우도 달라졌어요(웃음). 상패를 다 가져다 드렸거든요. 정작 저는 쑥스러운데 부모님은 정말 자랑스러워하세요.

 

맞아요. 상을 많이 받았죠. 어땠나요?

얼떨떨했어요. 사실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게, 제가 사람 많은 곳에 있는 걸 무척 어려워해요. 일단 상을 받으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데, 이 순간 떨림을 이겨내야 하니까 힘들었죠. 순간 그런 생각까지 했어요. ‘내가 저 상을 안 받았으면 좋겠어.’

 

상을 받기 싫을 정도로요?

물론 받고는 싶지만 그 순간 두려움이죠. 제가 소감을 말할 때 언급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중에 서운할까 봐 그렇기도 해요. 상처를 줄까 봐요.

남편인 이요섭 감독에게 <소공녀> 이후로 샘난다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정말 그릇이 큰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저한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거든요. 서로 워낙 색깔이 다르니까요. 그런데 밖에 나가서 그런 말을 했더라고요. 사람이 진짜 질투해서 고통스러우면 말도 못 꺼내요. 너무 숨기고 싶잖아요. 부끄러워서.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잖아요. 진짜 그릇이 큰 거 아니면 거짓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집에서 사실이냐고 물으니까 “응. 샘나.” 하더라고요. 그 말이 진심이라면 완전 용기 있다고, 인정해줄 거예요(웃음).

 

감독님이 영화를 하겠다 마음먹은 계기가 궁금해요.

고등학교 때 고향이었던 울진을 떠나 포항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부모님 품을 일찍 벗어나서 외로운 시간을 보냈죠. 이상한 아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고요. 그런 시기에 영화를 많이 봤는데, 영화 속에는 저보다 더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그들은 존경받잖아요. 막연히 나도 존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영화를 하지 않으면 사회부적응자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단순하게는, 영화 속 사람들이 멋있어 보여서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죠.

 

<소공녀>는 담뱃값 인상에 대한 분노로, <키스가 죄>는 가부장제에 대한 분노로 시작했어요. 요즘도 분노하는 게 있나요?

오늘 분노했어요. 종합소득세 신고 때문에요. 주변에 환급금 소식이 쏟아지는데 저는 3만 원을 더 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많이 번 것도 아닌데, 좀 억울했죠. ‘왜 나는 환급금이 없는가.’로 일인 연극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재미있을 것 같아요(웃음). 그럼 다음 영화는 어떤 감정으로 출발하게 될까요?

언제나 뜨거운 감정으로 영화를 시작하지만 혼자 감정에 취해서 이야기한다면 배설일 뿐이지 절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즘엔 자기 검열의 시기를 거치고 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표현하고 싶은, 편견을 깨는 여성 캐릭터도 많아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이야기가 정말 가치가 있는가. 많은 돈을 들여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두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반복하죠. 이런 작업을 거쳐야 더 좋은 시선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당분간은 이렇게 고민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광화문시네마의 영화들

광화문시네마는 전고운 감독을 비롯한 김태곤 감독, 이요섭 감독, 우문기 감독, 권오광 감독, 김지훈 프로듀서가 함께하는 독립영화 제작사다. 그들의 영화엔 언제나 기분 좋은 단순함이 배어 있다. 동시에 관객을 이끄는 단단함까지 지켜낸다. 지금은 잠시 쉬어가고 있는 광화문시네마지만 다음 영화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시작과 현재를 물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동기들이 겨울 방학 때 모여서 영화를 찍은 게 시작이었어요. 그 첫 번째 영화가 <1999, 면회>(2012)고요. 장충동 족발처럼 광화문시네마라고 부르자는 김태곤 감독의 농담이 그대로 이름이 됐죠. 지금은 광화문시네마의 첫번째 시즌이 끝났다고 생각해요.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고 있어요. 그 다음 시즌을 기다려봐야겠죠.”

<1999, 면회>(2012)

김태곤 | 드라마

고등학생 시절 절친이던 상원, 승준, 민욱. 졸업 후 일 년이 지난 지금, 서로의 사이는 조금씩 멀어져 갔다. 자원 입대한 민욱을 위해서 승준과 상원은 면회를 간다. 그런데 둘의 손에는 민욱의 여자친구 에스더의 이별 편지가 들려 있다. 1박 2일, 과연 그들의 면회시간은 어떻게 흘러갈까.

 

<범죄의 여왕>(2016)

이요섭 | 스릴러

아들이 사는 고시원의 수도요금이 120만 원이나 나왔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엄마 미경은 곧장 고시원으로 향한다. 미스터리한 수도요금의 비밀을 파헤치는 미경의 걸음을 좇으면서 웃기도 울기도 하며 가끔은 소름도 끼친다. 사람의 여러 모습이 담긴 고시원의 이야기가 궁금한 이들에게 추천한다.

 

<소공녀>(2017)

전고운 | 멜로, 로맨스, 드라마

위스키와 담배를 사랑하는, 흰머리의 가사도우미 미소. 하루 일당 4만 5천 원으로 나름 행복한 일상을 살고 있었지만 새해가 찾아오면서 삶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난다. 그래서 과감하게 집을 포기하고 친구들의 집을 찾아가기로 한다. ‘집은 없지만 생각과 취향은 있어.’ 어쩌면 너무 낭만적인 미소의 말이 어느새 마음 한구석, 깊이 박힌다.

<족구왕>(2013)

우문기 | 드라마

그 흔한 스펙도, 여자친구도 없는 복학생 만섭. 심지어 수강 등록도 못 해, 학교 수업도 들을 수 없다. 여러모로 안타까워 보이는 만섭이지만 족구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가 족구를 사랑해서 생기는 주변의 크고 작은 변화들이 유쾌하고 감동적인 모습으로 펼쳐진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에디터 이주연, 김지수

포토그래퍼 박건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