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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생긴 일
소리 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의 사람들은 어떤 공간을 원할까? 그들이 자리하길 바라는 곳을 상상해봤다. 꼭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N은 가라앉은 몸을 이끌고 깜깜한 방문을 열었다. 어두워 보이지 않는 스위치를 찾아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본다. 옷을 벗고,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는다. 쓰러지듯 누운 침대에서 삐걱 소리가 들리고 N은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꿈속이다. N은 구름 산에서 마구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푹신한 눈 위에서 N과 비슷한 어른들이 아이 같은 얼굴을 하며 신나게 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 광경 앞에 서 있던 N은 어릴 적 좋아하던 눈썰매를 생각했다. 고개를 밑으로 하면 바닥에 소복이 깔린 부드러운 눈의 오묘한 색들이 보인다. 알록달록 반짝이는 눈을 한 움큼 쥐어 먹어보면, 아이스크림처럼 달고 또 새콤한 맛이 느껴진다. 그 순간 누군가 멀뚱히 서 있는 N의 등을 세게 밀었다. 그 바람에 N 역시 사람들에 섞여 미끄러진다. 정신없이 떨어지는 와중에, N과 함께 내려가던 K가 눈 덩어리에 걸려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 모습이 우스워 N은 크게 웃었고, K도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바보같이 깔깔대던 두 사람은 어느새 구름 산을 모두 내려왔다.
N은 온몸에 묻은 달콤한 눈을 털어내며 생각했다. 이토록 크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을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빠져 웃었던 일이 무척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도 잠시, 이제는 친구가 된 N과 K는 구름 산을 올라가려 한다. 또 한번 미끄러지기 위해서, 다시 한번 웃어보기 위해서.
잠들기 직전, A는 오래전 떠난 H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난 탓일까. 얼굴의 일부분이 흐려져 자세히 떠올릴 수가 없다. 그렇게 A는 H의 얼굴을 하나씩 그려보다 어느 순간, 하늘 바다 위에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꿈속이다. A는 빨간색 서핑 보드 위에 누워 있고 그 아래엔 투명한 바닷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다 밑으로 도시의 모습이 작게 보인다. 언젠가 비행기 위에서 본 풍경과 같다며 A는 생각했다. 누군가 A를 부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돌아보자 서핑 보드 위에 누워 있는 H의 얼굴이 또렷이 보인다. 현실에서의 A라면 H가 갑자기 나타나 놀랐겠지만, 지금 이 하늘 바다 안에선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다. H의 말에 A는 몸을 똑바로 하며 하늘을 바라본다. 평소엔 눈 부신 태양이 오늘은 이상하게 편안한 빛으로 눈에 들어온다.
얼마간 두 사람은 그저 누워 있었다. 따뜻한 공기 사이로 가끔씩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주위는 아무도 없이 고요하며, 단지 파란 하늘만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다.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H는 A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태양의 비밀을 말해준다. “사실 저 태양의 껍데기는 무척 뜨거워 다가서기도 힘들지만, 그 속에 들어가면 온전히 따뜻한 바람을 품고 있대. 몇몇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들어가서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살고 있다는 거야.” A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태양이 가진 뜨거움의 정도를 가늠했다. 이야기를 마친 H가 A의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의 몸은 서서히 가벼워지며, 그대로 유유히 태양의 자리를 향해 나아갔다.
어둑한 저녁, 노인 D는 거실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집 안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내는 것은 작은 TV뿐이다. D는 그릇을 치우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정리하다 마침내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는다. 오직 TV의 빛만이 잠든 D의 얼굴을 비춘다. 그리곤, 슬머시 잠에 빠져든다. 꿈속에서 D는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사방에 검은 공간을 지나쳐, 노란 연기에 뒤덮인 하늘을 통과하면, 차가운 얼음 산이 보인다. 떨어지기 직전에 D의 몸은 다행히 멈춰졌다. 하마터면 얼음의 뾰족한 끝에 부딪힐 뻔했다. 산을 덮고 있는 얼음은 무척 투명해서 원래 산이 가지고 있는 초록 빛깔이 그대로 보인다. 안도하며 일어선 D는 자신의 몸이 공기로 가득 찬 느낌을 받는다. 그 때문일까, 산의 절벽에서 떨어져도 더 이상 낙하하지 않는다. 아픈 곳도 무거운 곳도 없다. D가 아무도 없는 자연을 향해 소리쳐본다. 그 소리는 메아리로 돌아와 크게 울려 퍼진다. 얼음 조각은 몹시 차갑지만 하늘의 노란 연기가 기분 좋은 온도를 뿜어내 D는 따뜻했다. 그때 누군가 옆으로 와 조용히 D의 손을 잡는다. 맞닿은 두 손을 바라보자, D는 주름 하나 없는 자신의 손을 발견한다. 투명한 얼음 표면에 나란히 선두 사람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D의 손을 잡은 이는, 오래전 청년의 모습을 간직한 또 다른 D였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은 채 멈추지 않고 이 세계를 뛰어다닌다. 숨이 찬지도, 다리가 아픈지도 모르고 열심히 내달렸다. 달리는 와중에 D는 온화한 연기가 얼음 산을 녹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계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자리할 것이라 믿고 싶다. D는 방금 한 걱정을 날려보내려는 듯 또 다른 자신의 손을 잡고서, 있는 힘껏 날아 점프했다.
에디터 김지수
그림 주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