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and simple years

가장 단순한 장면을 지나올 때 우리 모습은 달라지고

#3  B의 정원

B의 집은 노스 멜버른North Melbourne에 있었다. CBD에서 불과 10분 거리인 이곳은 한적한 멋이 있는 고풍스러운 동네였다. 옆 동네인 칼턴Carlton은 정돈된 신선함과 대학가다운 활기가 있었고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브런즈윅Brunswick 은 소탈하고 순박했다. 멜버른에서 지내면서 A가 가장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이 경계였다. 

이동할 때마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묘하게 시야와 분위기가 달라졌다. A는 이곳저곳을 유영하듯 걸어 다니며 부드러운 경계를 구경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한 달간 여행을 떠난 B와 그녀의 가족은 A에게 선뜻 집을 내주었다. 그녀의 집은 오래된 빅토리아식 주택이었다. B는 정리를 잘하거나 물건을 쉽게 들이고 버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쓰던 물건이 자신에게 와 다른 쓰임을 찾는 것을 좋아했다. “새것들로 가득 찬 새집을 보면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아.” B는 종종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깔끔한 성격의 A는 도착하자마자 대청소를 했지만, 청소한 티가 나는 집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도 유난히 매끄럽고 반짝거리는 곳이 있었다. 

앞의 작은 정원과 텃밭이었다. 그제서야 A는 왜 B가 굳이 자신의 집에서 머물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에겐 휴가 동안 정원과 텃밭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B는 집 곳곳에 A에게 전하는 메모를 붙여 놓았다.

– 분명히 매일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거나 인스턴트식품만 먹을 너에게, 미션.

1) 장은 집에서 가까운 퀸 빅토리아 마켓Queen Victoria Market에서 보기.

2) 제철 재료로 하루에 한 끼는 만들어 먹기(제철 과일과 채소, 질 좋은 올리브오일과 소금이면 충분함).

3) 남편과 딸을 통해 검증된 몇 가지 레시피는 싱크대 첫 번째 서랍에 있음.

– 흙이 마르면 호스로 물을 뿌려주기. 바질이나 민트는 사지 말고 정원에서 수확할 것.

– 집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정원을 바라보며 천천히 커피나 와인 마시는 시간 갖기.

– 내가 자주 가는 러닝 코스 : 칼턴 가든Carlton Gardens, 피츠로이 가든Fitzroy Gardens, 멀리 가고 싶을 땐 에딘버그 가든Edinburgh Gardens. 메인 야라 트레일Main Yarra Trail 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도 추천. 그림만 그리지 말고 좀 움직여.

#4 생의 어떤 장면

 

읽다 보면 한숨이 나오는 문장도 있었지만, A는 투덜거리면서도 대체로 충실하게 메모에 쓰인 조언을 따르고 있었다. 괄목할 만한 점은, 그가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뛰기 좋은 공원이 곳곳에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사실 A는 살면서 딱히 운동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림을 그리느라 자세는 늘 구부정했고 오른쪽 팔 근육만 비대칭적으로 발달했다. 어깨는 항상 뭉쳐 있어 가끔은 팔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샤워를 마친 후 거울에 비친 몸을 보며 “괴이하네.”라며 혼잣말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어쩐지 이곳에서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는 어깨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날 저녁도 동네를 한 바퀴 뛰고 오는 길이었다. 그는 녹초가 되어 푹 꺼진 정원의 카우치에 누웠다.

멜버른에 온 지 2주째였다. A는 그림을 별로 그리지 않았다. 아니, 거의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일이 스트레스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멜버른까지 오는 데 쏟아부은 티켓 값과 지난번 전시에서 판매한 작품 세 점의 가격, 다음 전시까지 남은 시간을 헤아려보다 곧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누운 채 저녁이 내려앉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한 옆집 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대문 앞을 지나갔다. 한 손으로 유모차를 밀며 남자가 뛰어갔고, 길 건너 앞집에서는 정원에 물을 주는 노부부가 보였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고 땀이 식어 잠깐 한기를 느꼈다. 이곳에서 A는 지나치게 단순하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동물적으로, 지금 이 순간이 다시 되감을 수 없는 생의 어떤 장면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 장면이 삶의 어떤 부분을 영원히 변하게 하리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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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Lee Hy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