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ch has his Krabi

누구나 마음 안에 저마다의 끄라비가 있다

누구나 마음 안에
저마다의 끄라비가 있다

스무 살 즈음이었나. 당시 유행하던 패션지에서 한 여행지를 발견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 끄라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쿨렁한 느낌이 생겼다.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잡지 귀퉁이에서 그 기사를 오려내 지갑 안에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언젠간 이곳에 가리라!’

인생은 알 수 없어

끄라비Krabi에 대해 소개한 짤막한 기사는 특별하진 않았다. 하늘하늘한 비치 원피스를 입고 현지인 틈에 섞여보길 추천하거나, 길거리에서 파는 새우구이를 잔뜩 사 먹어도 전혀 비싸지 않다는 등의 정보를 담은 내용이었다. 필리핀에서 어학연수 했던 경험이 있어 동남아의 분위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두어 장 소개된 사진은 크기조차 너무 작아 압도당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태국의 남쪽에 있는 그 작은 도시에 꼭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연유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서른이 되던 해, 나는 태국 방콕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방콕의 내 방 침대에 자려고 누웠는데 잊고 있던 ‘끄라비’라는 단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크라비’였다. 태국에 살면서 태국 본래 발음인 끄라비가 자연스러워졌지만, 사실 잡지에는 영어 스펠링대로 크라비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나 역시 그곳을 크라비라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많은 외국인들이 푸껫을 푸켓이라고 부르는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잡지를 보고 또 보며 ‘꼭 이곳에 가야지.’라고 다짐했었는데, 십여 년을 돌아 지금은 태국에 살고 있다. 순간 세월이 무심하게 느껴지고,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그곳에 이렇게 가깝게 살고 있다니. 그리고 드디어 얼마 전 친구와 함께 그곳, 끄라비에 다녀왔다.

나도 울고,
하늘도 울고

공항에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아오낭Aonang 비치로 향했다. 떠나기 직전 예약해 둔 리조트는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별 기대감이 없었는데 뜻밖에 수영장까지 갖춰 제법 근사했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 것 같더니 완전히 회색빛으로 바뀌어버렸다. “어….” 하는 사이에 비가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우기 때의 태국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곧 그치겠지.’라고 생각하며 로비에 주저앉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엔 방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그토록 고대하던 끄라비였는데 비라니…. 섭섭함과 속상함이 밀려왔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룸서비스를 시켜 허기를 달래고, 축축해진 침대에 벌렁 누워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일어나 창문을 여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무거워진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아직도 잠들어 있는 친구를 흔들어 깨워 밖으로 나왔다.

푸껫Phuket이나 꼬 사무이Ko Samui 등 다른 남부의 해변에 비하자면 끄라비는 정말 소박하기 그지없다. 음식점과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내라 불릴 만한 곳은 걸어서 30분이면 전체를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거리는 한산했다. 아오낭 비치 주변 작은 상점들에는 잡지에서 소개되었던 ‘하늘하늘한 원피스’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고, 전혀 비싸지 않다던 새우 바비큐는 생각보다 값이 올라 있었다. 섬 투어를 신청하기 위해 여행사를 찾았다. 가장 인기가 많은 4섬 투어와 홍섬 투어 중 어떤 것을 신청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친구가 여행사 직원과 영어로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홍 아일랜드’라고 해야 할 것을 자꾸 ‘홍섬 아일랜드’라고 해서 직원이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3일 내내 친구를 ‘홍섬 아일랜드’라 부르며 놀려댔다.

배 위에서 만난 사람들

네 개의 섬을 둘러보는 투어(대략 만 원짜리 투어에는 리조트 픽업, 보트투어, 스노클링 장비 대여와 점심까지 포함되어있어 믿을 수 없는 가격이었다)를 신청해뒀다. 배로 움직여야 하는데 비가 또 오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20명 남짓 되는 사람들과 나무로 만든 좁은 롱테일보트Long Tail Boat에 옆 사람과 어깨를 붙여가며 다닥다닥 앉았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탄 친구와 나는 지붕도 없는 햇볕이 강하게 비치는 바깥 자리에 앉아야 했다. 그렇지만 막상 배가 출발하니 배가 움직이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덥지 않았고,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섬들을 가까이에 볼 수 있었다.

어느덧 스노클링 장소에 도착했고, 스킨스쿠버 자격증까지 있는 친구는 얼른 장비를 착용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사실 나는 소문난 맥주병이라 스노클링은 커녕 난간을 꼭 잡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때 가이드가 왜 바다에 들어가지 않느냐고 영어로 물어봤다. 나는 태국어로 “와이남 마이 뻰 카(수영을 못해요).”라고 대답하니 태국어를 할 줄 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그는 나를 선원들이 있는 지붕 칸으로 올라오게 하더니 손에 빵을 쥐여주었다. 나는 빵을 조금씩 뜯어 바다에 던졌고, 잠시 후 예쁜 색깔의 열대야들이 모여들었다. 또 선원 중의 한 명은 내 수중카메라를 들고 바다로 들어가 바닷속의 풍경들을 사진으로 담아 주었다.

이윽고 도착한 섬은 신기한 섬이었다. 썰물 때 바다 한가운데가 열려 옆에 있는 섬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마치 두 개의 섬 사이로 모래사장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고 있었다. 마치 물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빵을 던져주려고 올라왔던 지붕은 어느새 우리의 지정석이 되어 있었고, 가이드인 키아우Kiaw아저씨와 선원 방Bang, 망Mang 형제와도 너무 친해져 버렸다. 심한 남부 사투리라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쉬지 않고 함께 떠들어댔으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시 배를 타고 다른 섬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배에 타고 있던 선장과 선원들이 요리사로 변신해 금세 점심을 차려냈다. 친구와 나는 음식 서빙을 도왔다. 투어에 포함된 식사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실제로 다른 투어에서 한 번도 맛있는 식사를 해본 적도 없었다. 보통 밥하나에 반찬 하나 정도의 단출한 음식이 제공되기 마련인데, 우리 투어에는 음식재료를 아낌없이 넣은 반찬이 서너 가지나 되었다. 너무 맛있어서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두세 그릇씩 뚝딱 해치웠다.

내 마음 안의
끄라비

우리는 어느덧 마지막 장소인 라일레이Railay 비치로 이동하고 있었다. 끄라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의 섬이기도 하며, 네 개의 섬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바다와 맞닿은 절벽 아래는 동굴들이 있어 사람들은 카약을 타고 동굴 속을 탐험하고, 희고 고운 모래사장에서 모래 놀이를 즐겼다. 에메랄드 바다는 얼마나 물이 맑은지 육안으로도 열대야들이 헤엄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바닷가에 앉아 넋을 놓고 구경을 하고 있는데 선원 형제가 다가와 원숭이를 봤느냐고 물었다. 보지 못했다고 하니 같이 원숭이를 보러 가잔다. 아마도 일평생을 이 섬과 함께 했을 선원 형제들은 익숙하게 길을 안내했다. 삐죽삐죽 기이한 모양으로 난 종유석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섬에는 다양한 종류의 원숭이가 정말 많았다. 해변 안쪽 끝까지 오니 맹그로브 나무숲도 보이고 한 무리의 서양인들은 암벽등반을 하고 있었다. 이 섬 하나가 이토록 사람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고 있다니 인심 좋은 넉넉한 섬이었다. 어느덧 섬투어를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시간. 섬에서의 시간도, 너무나 친해진 뱃사람들과의 작별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석양이 예쁘게 진다는 시간에 맞춰 아오낭 비치로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밤을 위해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우연히 들어온 식당인데 테라스가 있어 석양이 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음식도 맛있었다. 여행을 다닐 때는 되도록 많은 정보를 얻으려 하지 않는데, 그럴수록 우연히 얻는 기쁨은 커진다고 믿는다. 끄라비에 있는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이 섬을 찾은 사람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십여 년 전 내가 잡지에서 발견했던 끄라비를 두고 기대했던 나의 마음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요란하지 않고 소박하게 낯선 여행객들을 어루만지는 친절한 곳. 그리고 섬과 닮아있는 사람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곳에 다녀와 허무하고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사실 나는 내 마음 안에 끄라비를 만들어두었다. 너무 지치고 버거울 때면 그 곳을 떠올린다. 누구나 마음 안에는 저마다의 끄라비가 하나쯤 있다. 이미 다녀왔던 사람에게도, 아직 다녀오지 않은 사람에게도. 당장에 달려갈 수는 없지만, 마음 안에 품은 섬 하나는 나를 계속 여행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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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박선아

글·사진 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