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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만났다
Does Anybody Know
Why Cats Are
So Misunderstood?
고양이를 만났다
외로운 사람은 너무나 흔하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의 외로움에 더 쉽게 공감할 것 같지만,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에 더 쉽게 무감해진다. 이곳에 고양이가 있다. 누구나 말을 걸 수 있는 존재, 대답은 없는 존재, 안겨주지는 않지만 가끔 제 몸을 기대어오는 존재. 과연 고양이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지, 위로를 하려 했는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아마 서로를 오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에, 내가 고양이를, 고양이가 나를, 무시무시한 존재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지금의 오해가 훨씬 맘에 든다.
미안해,
도둑고양이
그러니까 아주 어렸을 적에는, 고양이를 보면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불쑥 튀어나오고, 아기 울음소리를 내는데다가 강아지처럼 살갑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용기를 내서 불러 봐도 멀리서 노려보기만 하는 고양이 앞에서 나는 늘 뻘쭘해졌다. 방학숙제로 읽었던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 덕분에 고양이는 늘 앙갚음을 하는 기묘한 존재라는 인상마저 생겼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어 그 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당황했다. 고양이를 학대하고, 죽이고, 그도 모자라 아내마저 살해한 후 시체를 숨긴 건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고양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긴 여행을 떠났다. 어디를 가든 고양이가 있었다. 모로코나 미얀마 같은 나라가 유독 더 그랬다. 그곳 고양이들의 몸짓에는 느긋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별다른 경계 없이 사람들 사이를 거닐었다. 부르지 않아도 금세 다가왔다. 부드러운 꼬리로 발목을 간질이며 나른한 목소리로 야옹 했다. 무서웠던 마음이 조금씩 옅어졌다. 종교적인 이유가 있다지만, 사람들이 고양이를 대하는 태도가 낯설었다. 자기 고양이가 아니어도 사료와 물을 챙겨 주었다. 길 한복판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도 예뻐해 주었다. 찻집의 자리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는 고양이를 쫓아내지 않고 옆에 서서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우리 동네의 고양이들이 떠올라버렸다. 처음부터 도둑고양이로 태어나는 고양이들.
여행 중 한국에 잠시 머물렀을 때, 친구가 자기 집을 내주었다.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는 친구였다. 마침 집을 비운다고 했고 친구는 무척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혹시 길냥이들 밥… 챙겨줄 수 있어?” 친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틈 안쪽에 놓인 밥그릇을 보여주었다. 안내문도 있었다.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면 쥐의 서식을 방지하고, 쓰레기봉투를 훼손하지 않으니 사료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얼굴이 마냥 밝지 않았다. 쉽게 상상이 되었다.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해 구석진 곳에 들어가 사료를 주고도, 빈 그릇을 보면 고양이가 먹은 건지, 사람이 내다 버린 건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했을 친구의 모습이. 어쩌면 빈 그릇이 가장 무거웠을 것이다. 사료를 굳이 버려버리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지 몰랐다. 살아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누구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였다. 다만 내게는 친구의 마음이 더 크게 와 닿았다. 몸 구석구석 퍼졌다.
고양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두 마리의 고양이, ‘유로’와 ‘해로’. 처음엔 내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둘 다 침대 아래로 숨어버렸다. 다행히 경계태세는 오래 지나지 않아 풀어졌다. 유로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해로는 호기심이 많았다. 유로는 두드려 달라고 엉덩이를 내밀었고, 해로는 배낭에서 꺼내둔 신발의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계절 하나를 함께 보냈다. 나는 갑자기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줘야 한다고 술자리를 빠져나오는 사람이 돼버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건물 사이 구석진 곳에 놓여있는 친구의 마음을 확인했다. 사료가 많이 줄어있는 것을 보면, 친구 몫까지 단번에 행복해졌다. 유로는 계속해서 엉덩이를 내밀었고 해로는 계속해서 신발의 냄새를 맡았다.
조금씩 서로에게 익숙해지던 어느 새벽, 퍽 하고 몸이 눌려서 잠이 깼다. 고양이들은 내 몸을 디딤판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집 끝에서 끝까지 최고속도로 우다다다, 달렸다. 뛰어올랐다. 다시 달렸다. 우다다다. 우다다탕. 우당탕탕. 불꽃놀이였다. 마침내 친구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유로와 해로는 궁디 팡팡도, 내 신발의 냄새도, 어두운 방을 수놓던 불꽃놀이도 다 까먹고 친구에게 달려갔다(치욕).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Hey, Jude.
Don’t be afraid.
처음 보라보라 섬에 왔을 때, 똑같이 생긴 집 두 채에 친구들이 모여 살았다. 나무로 된 낡은 집이었지만 마당에 망고와 바나나가 자랐다. 뒷집은 프랑스 친구들이, 앞집은 우리 부부와 스페인 친구가 나눠 썼다. 서로 일이 생길 때마다 집을 옮겨가며 지냈다. 누군가의 가족이 오거나 하면 한 집을 비워주고 나머지 집에서 다 같이 지내는 식이었다. 따로 약속할 필요도 없이 매일 저녁이면 함께 모여서 시간을 보냈다. 뒷집에 살던 친구가 키우던 고양이 ‘지나’가 두 집을 다 제 집처럼 드나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침 아홉 시가 되면, 고양이 지나와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터로 증발했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지나는 항상 부릴 수 있도록 24시간 곁에 상주하는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새끼를 가진 후에는 더 그랬다. 불러오는 배가 어디 걸리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꼭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잠을 잤다. 새끼를 배고도 가볍기만 한 지나가 안쓰러웠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일러주는 이 하나 없이 혼자서 오롯이 출산을 감당한다는 게 고양이로서는 얼마나 두려운 일일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정일을 앞두고, 모두 함께 출산 상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나는 상자에 좀처럼 관심이 없었다. 자꾸 내 옷장만 기웃거렸다. 결국 출산 상자를 옷장 안으로 옮겼고, 거기서 네 마리의 고양이가 태어났다. 펭귄처럼 까만 턱시도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고양이들이었다.
세상 모든 동물들의 새끼가 귀여운 건 보호본능을 일으켜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닐까. 눈도 못 뜨고 꽁냥거리며 기어 다니는 새끼 고양이들에게 친구들은 손을 뻗지도, 거두지도 못했다. 다들 어찌할 줄을 몰랐다. 지나는 달랐다. 엄마로 다시 한 번 태어난 것 같았다. 새끼를 무는 힘, 나르는 속도를 능숙하게 조절했다. 평소보다도 열심히 먹고, 고스란히 젖을 물렸다. 어찌나 핥아주는지, 새끼 고양이들의 까만 털들이 반들반들 윤이 났다.
얼굴에 하얀 털이 알파벳 A 모양으로 나 있는 새끼 고양이가 남편을 유난히 잘 따랐다. 베개에 뛰어 올라가는 것도 힘에 부쳐 하는 작은 몸으로 저도 고양이라고 친구들이 만지면 발톱을 세우며 하악거렸다. 그런데 남편만은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허락했다. 손가락을 내밀어도 물지 않고 골골거렸다. 발톱도 숨겼다. 남편은 뿌듯한 얼굴로 새끼 고양이에게 코를 비볐다. 잠시 존재가 희미해졌던, 고양이의 진짜 집사인 친구가 말했다. “이 녀석은 너희가 키워야겠다.” 기뻤다. 그리고 망설여졌다. 좋아하는 것과 책임지는 것의 차이에 대해 나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진심과 태도의 차이. 남편은 결혼한 날부터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했다. 자기가 모든 것을 감당하겠다고 했다. 건강검진도 데려가고, 놀아주고, 언젠가 우리가 섬을 떠날 때 필요한 고양이 여권도 알아서 만들겠다고 했다(지금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한동안 저녁마다 함께 모여든 친구들과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친구들은 비틀즈의 노래 ‘Hey Jude’를 듣다가, 우리 고양이의 이름을 ‘쥬드’라고 지어주었다. 친구의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던 폴 매카트니의 마음처럼, 쥬드에게도 우리가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우리야말로 훨씬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지만, 당시로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도 고양이가 찾아왔다.
조금만 더
천천히
똑똑또르르드르륵. 드르륵. 똑. 문에서 소리가 났다. 어른이 두드리는 소리라기엔 장난기가 많고, 아이라기엔 망설임이 많은 노크 소리. 문 아래로 난 틈을 보니 조그만 인절미 두 개가 놓여있다. 쥬드의 발이었다. 문을 열어주었다. 쥬드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더운 공기를 타고 모기만 들어왔다. 문을 닫는 시늉을 하니 그제야 엉덩이를 쭉 밀어내며 기지개를 켜듯 일어났다. 다시 문을 활짝 열었다. 또 들어오진 않고 눈만 깜빡깜빡. 우리 집 고양이는 나를 닮아 결정 장애가 심각하다. 동그랗게 끝이 올라간 꽃잎 같은 눈매로 바라본다고 기다려줄 것 같니? 물론이었다. 쥬드는 게으른 목소리로 야아옹 울었다.
가족들이 보라보라 섬에 놀러 왔을 때, 새삼스럽게 놀랐다.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과묵하기로는 아빠가 최고였지만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때 우리의 옆에는 쥬드가 있었다. 쥬드가 별다른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좁은 집에서 내키는 대로 뛰다가 우스꽝스럽게 미끄러지고, 순간이지만 겸연쩍어하고, 다시 잠을 잤다. 그런데 쥬드가 자기의 몫을 하는 것만으로 우리 사이의 적막이 옅어졌다. 어느덧 호기심이 사라져버린 어른들에게도 고양이란 존재는 물음표를 선물했다. 쥬드 덕분에 대화를 나눴고, 웃었고, 안심했다.
타히티까지 따라가서 가족을 배웅하고 돌아와, 텅 비어버린 집 앞에 서 있을 때, 쥬드가 안에서 야옹 하고 울어주었다. 문을 열 용기가 생겼다. 보통날의 쥬드는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불러도 모른척하고, 자꾸 부르면 귀찮다고 꼬리를 탁탁 내리쳤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일을 하려고 하면 노트북 위에 앉아버리고, 침대에 누우면 배 위를 꾹꾹 누르고, 화장실에 가도 바로 옆에 앉아서 민망하도록 빤히 쳐다봤다.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나 여기 있어.’ 하던 일을 멈추고 쥬드와 눈 키스를 나누었다. 머리에서 엉덩이까지 차례대로 토닥여주었다. 으어어어 소리를 내며 안아주었다. 쥬드는 그제야 품에서 쏙 빠져나가 사료를 먹으러 갔다. 집사들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는 정말이었다.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간을 고양이는 아주 잘 알았다. 그 시간이 비록 짧을지라도.
쥬드는 벌써 네 살이 되었다. 사람 나이로 하면 삼십 대, 내 나이도 거의 따라잡았다. 쥬드가 태어난 이후로 많은 일이 있었다. 중성화 수술을 받았다. 어미 고양이가 갑자기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앞뒤로 이어진 집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들은 모두 보라보라 섬을 떠났다. 쥬드와 함께 새집으로 이사를 왔다. 남편과 나 그리고 쥬드는 모두 한 차례씩 탈모를 겪었다.
우리는 웃으며 지나갔지만, 쥬드는 수의사 선생님을 여러 번 만나야 했다. 쥬드에 관한 거라면, 가벼운 적신호에도 심장이 철렁거렸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았다. 이동하는 동안 스트레스를 받는 쥬드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길이 나라고 즐거울 리 없었다. 하지만 쥬드에게는 우리뿐이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면, 언젠가는 너무 늦어버리고 만다. 어미 고양이 지나처럼.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쥬드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을 성킁성큼 앞질러 갈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매번 생채기만 나고, 앞서 익숙해지지 않은 슬픔이었다. 부디 가능한한 오래 우리의 곁에 머물러 주기를. 어느 영화의 대사를 주문처럼 적어본다.
‘Aime-moi moins, mais aime-moi longtemps.’
(나를 덜 사랑해줘, 하지만 더 오래 사랑해줘)
쥬드는 보라보라 섬에서 내 한국말을 들어주는 유일한 친구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쥬드와 말이 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쥬드는 내게 어디가 아픈지 알려줄 수 있고, 나는 쥬드에게 우리가 또 이사를 갈 것이라고 설명해 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말이 통했다면 쥬드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가 그랬다. 잘 알려진 고양이 캐릭터에 입과 표정이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쉽게 투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나도 쥬드가 말을 할 수 없어서 안심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거라고 했다. 상처 주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은 슬프다.
서랍 정리를 하려는데 쥬드가 우다다다 달려와 서랍 안으로 뛰어들어서 그대로 끼어버렸다. 매번 이랬다. 이 틈에 끼는 걸 좋아했다. 웃음이 터졌다. 저 호기심 어린 눈망울이 무엇을 원하는지, 한없이 도도하게 걷다가 왜 순식간에 바보가 돼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는 동안 고양이를 다 이해하게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겠지만 뭐 어떤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인간들의 특기다. 우아함과 엉뚱함 사이 어딘가, 천재성과 바보스러움을 함축하는, 그러니까 고양이의 사랑스러움을 표현할 단어를 찾아내려고 내내 고민했다. 끝내 하나의 단어를 찾아내지 못해 긴 글로 대신한다.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에디터 김건태
글·사진 김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