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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부부의 책갈피
이를테면 사슴과 영원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있을 가장 순수한 우정과 사랑의 시간을 말하고 싶었다.
그의 이야기
요즘 들어 어떤 단어들이 잘 떠오르지 않아 대화를 할 때 난감한 상황에 마주한 적이 종종 있다.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한 거겠지 하고 여겼는데, 얼마 전 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다 그러한 현상 또한 코로나19 사태와 조금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의 대면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대화도 줄게 되고 그러다 보니 대화에 활용하는 어휘 또한 사용이 적어지면서 결과적으로 단어를 조금씩 잊게 되는 것 같다는 진단이었는데 꽤 그럴듯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예측하지 못한 문제들도 조금씩 더 늘어날 것이다. 대면이 비대면이 된 것이 아니라 외면의 형식으로 변하는 것은 아닌가도 생각해 볼 문제다. 걱정 중의 하나는 외면이 늘게 되면서 단어 정도가 아니라 어떤 감각 또한 소실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도움 요청 같은 것. 도움을 구하는 말은 누군가 자신의 곁에 함께한다는 감각을 절실히 필요로 하니 외면의 감각 속에 도움이 발생할 가능성은 적다.
요즘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말 중 하나는 ‘도와주세요!’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임을 거리낌 없이 알릴 수 있고 또 누군가가 그에 응답해 자연스럽게 도움을 전하는 일은 아름답다. 우리는 이 아름다움을 때로 독립이나 자립이라는 가치와 비교하며 덜 주목했거나 잘못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도움을 표하는 일은 의존하는 일과 다르다. 의존이 자신의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회피하는 태도와 관련한다면 도움 요청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과정 속에서 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을 발견하고 협력의 장을 펼쳐내는 일에 가깝다. 생각보다 함께 하는 일은 홀로 하는 일보다 결코 쉽지 않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백지장은 혼자 드는 게 더 수월하다. 여럿이 의사를 나누고 일을 조율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독단적으로 무언가를 처리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협력이 잘 이루어지려면 협력의 과정 속에 특별한 창조성이 발휘되어야 한다. 개별적인 ‘나’에서 상호주체적인 ‘우리’로 변모하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만드는 일은 그만큼 복잡한 문제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에 더 창조적인 과업이 요구될 수밖에 없으리라.
‘맨스플레인’이란 용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한 글에서 자신의 삶이 혼자 이뤄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사고는 없다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더 많이 누군가의 도움과 협동에 기대고 있다. 당신의 주위를 둘러보라, 당신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품과 시설은 당신 스스로 만든 게 아닐 것이다. 가령 당신이 별다른 수고 없이 마시는 물 한 잔도 따지고 보면 수많은 사람의 손길과 공동체의 노력이 작용한 결과다. 저 인용한 시의 구절처럼 인간은 누구나 사슴 한 마리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 사슴이 나와 나 아닌 누군가의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어떤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시를 읽을 때마다 섬의 이미지에서 강조되는 낭만적 고립감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분명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고요한 방이 필요하나 그 방의 경계 너머에서 당신의 고요를 지원하는 다른 이들에 함께한다는 감각이 소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아니라 ‘사슴’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사슴에 연루되어 있다. 그러니 당신의 기쁨과 당신의 슬픔 역시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저기 당신을 바라보던 신비한 눈빛의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길을 달려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
<미녀와 야수>는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당대의 미와 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고전이다. 근작일수록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이 세련되게 각색되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Beauty’와 ‘Beast’를 대비하며 이들이 미적 기준의 양극단에 있다고 해석한다.
내가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한 것은 열 살 전후였던 때로 기억한다. 학급문고였는지, 책이 정말로 많았던 친구네 책장에서였는지, 온갖 전집이 빼곡하던 사촌네에서였는지. 세계명작전집의 형태로, 아주 소략한 이야기로 처음 만난 <미녀와 야수>는 조금 슬펐다. 아마 그때의 나는 예쁘고 똑똑한, 심지어 모두가 피하는 흉측한 외모의 야수까지도 안아줄 수 있는 고결한 마음씨까지 갖춘 벨보다는 사람들을 피해서 자신의 성 안에서만 지내는 야수에게 더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다. 이제 막 철이 들 때였던 걸까. 밋밋하게 생긴 외모에도, 뻣뻣하고 소극적인 성격에도 자신감이 없었던 나는 늘 어디로든 숨어들고 싶었던 아이였나 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야수의 어둠보다 미녀의 밝음에 마음이 더 기울었을 것이다. 결국은 단 하나의 밝음이 어둠을 깨우친다는 이야기의 교훈에 걸맞게 말이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자주 하는 고민은 내가 어린 시절에 읽은 이야기들을 아이에게 다시 들려줄 때 본문을 그대로 전달해 줘야 하는지다. 〈미녀와 야수〉를 놓고도 그런 고민을 한다. 뷰티 앤 더 비스트Beaut And The Beast. 미녀가 야수를 사랑하자 야수의 탈을 쓰고 살아야 했던 저주가 풀려 아름다운 왕자가 등장한다는 결말은 어딘가 불편하지 않은가. 한없는 아름다움이 단 하나의 추함까지도 감싸 안아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은 추함이라는, 벗겨지고 사라져야 하는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아름다움은 원래 추한 것까지도 그 내면에 포함하고 있다는 진실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아이에게는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은 외면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오래 곱씹어볼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이를테면 순간과 영원 같은 것에 대해서. 너의 아름다움, 너의 인생을 깊고 값지게 만들어줄 아름다운 것들을 위해서.
어느 부분을 생략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들, 혹은 마음이다. 이 요동치는 숨결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물론 이 소설의 전문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안나는 요한을 좋아하고 요한은 안나의 오랜 친구인 “루시아의 남자친구”라는 사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쉼표나 마침표가 끼어들 여지도 없이 숨 가쁘게 이어지는 안나의 궁금증은 “그 어떤 것도 물어볼 수 없”는 것이기에 슬프고 또 아름답다. 이 마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왜일까. 첫사랑의 애틋함을 그저 아름다움으로 포장할 수 있을까. 안나는 루시아와 요한 모두를 아끼고, 그들을 아끼는 마음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지키려는 고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을 자존심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말할 수는 없다.
이 사랑하는 마음은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들을 공평하게 보려는 정직하고 강인한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눈처럼 차가운 순수, 다른 모든 것들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결정과도 같다. 이런 인물은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상대가 누구든 그 자체로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아름다움에는 기준이 없다는 말을 여기서 되뇌어 보았다. 누구에게나 있을 가장 순수한 우정과 사랑의 시간, 그때의 자신을 지켰을 마음들. 세상의 모든 것 위로 눈雪이 내릴 때, 쌓이기도 전에 벌써 알아차리게 되는 공평함의 세계를 보는 눈目이 있다. 저마다 다르기에 그 모두가 소중해지는, 어떤 기준이 생기기도 전에 모든 기준을 지워버리는.
글 김나영, 송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