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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들을 재료 삼아
작가 은유
은유 작가의 책 《다가오는 말들》의 부제는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이다. 책을 펼치기 전엔 고개를 끄덕이며 술술 책장을 넘길 어떤 말들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장장이 담긴 이야기는 다른 이에게 공감하려 애쓰고,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거듭 생각하는 부단한 노력의 말들이었다. 편견과 차별에서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려는 사람, 세심한 맘으로 삶을 살피는 사람, 성찰을 거듭하고 차별을 공부하는 사람, 나와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세상을 희망이라 부르는 사람. 그는 말한다. 사랑을 얼마나 해보았느냐는 질문은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보았느냐는 의미라고. 이 말을 빌려 나에게 몇 번이나 되물었다. 나는 지금껏 몇 번이나 다른 존재가 되어보았느냐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단정한 곳이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선배의 공간인데 작업실로 함께 사용하고 있어요. 놀러 오는 지인들이 꼭 산장 같다고 하더라고요. 오르막길에 있어서 오가기가 좀 힘들지만 생활 운동도 되고 조용해서 좋아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택시를 타기도 하지만요(웃음). 여기에 오면 나는 혼자 태어났고, 계속 혼자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필사를 자주 하신다고 알고 있는데, 주로 여기서 하시나요?
대부분 그래요. 집에는 아이도, 고양이도 있다 보니까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거든요. 예전엔 지금보다 필사도 훨씬 많이 했는데, 요새는 좀 바빠지면서 손으로 쓰기보단 타이핑을 더 많이 하고 있어요. 최근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한 구절을 필사했는데요. (필사 노트를 펼친다.) “나는 이야기란 게 원래 시간이 지나 글로 옮겨질 때보다 말로 뱉어질 때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말할 때 그 사람의 눈빛과 팔의 움직임을 ‘녹음하지’ 못하는 게 늘 안타깝다. 대화하는 동안 드러나는 그들의 삶, 즉 그들 본래의 삶과 그들 각자의 삶을, 그들의 ‘텍스트들’을 녹음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이런 문장인데, 오늘 주제랑 잘 어울리죠?
정말 딱 맞네요.
이런 구절도 있어요. “참혹한 일이 위대한 일이 되고, 처참한 사건이 깔끔한 이야기가 되고, 인간 내면의 불가해하고 어두운 면이 설명 가능한 것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글의 폐단이라고 생각하면서 옮긴 구절이에요. 글을 쓸 때 제가 특히 조심하려는 부분인데, 말을 글로 만들 땐 다듬어지게 되잖아요. 그럴 때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단순화하지 않도록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쓸수록 고민이 돼요. 쓰면 쓸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하면 할수록 글쓰기에 관한 고민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말을 글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서 더 깊게 고민하시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엮어서 출간하곤 하는데, 인터뷰이의 몸짓이나 말투, 뉘앙스 같은 걸 어떻게 살리고 있어요?
과거에는 기억을 해뒀다가 서술할 때 제 문장으로 묘사하곤 했어요. ‘시선을 떨구었다.’ 같은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했죠. 그러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작업할 땐 그런 표현을 모두 생략했는데요. 인터뷰이 목소리에만 푹 빠져서 오로지 그것만 책에 담으려고 했어요. 제 문장이 개입하는 것보다 육성 그대로를 온전히 살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떤 방식이 인터뷰이를, 그의 말을 더 잘 드러내는지 저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종의 실험을 한 거죠.
실험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예전에는 제가 개입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작가는 이 책에 오로지 육성만 담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읽으면서 확 전해져 오는 게 있더라고요. 그때 작가의 개입이나 상황 묘사가 독서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글에 진실성을 높이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요. 답이 없기 때문에 계속 실험해 나가면서 저에게 맞는 방식을 찾고 있어요.
말과 글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성질을 가진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아무래도 글이 좀더 편해요. 글로 썼을 때 말의 결이나 뉘앙스가 좀더 정교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말은 하는 즉시 휘발돼 버리지만, 글은 논리 구조를 가지고 확장되는 속성이 있어요. 다시 읽고 고칠 수 있다는 것도 좋고요.
앞서 이야기한 ‘글의 폐단’처럼 말을 글로 옮길 때 특히 주의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써놓고, 다시 읽고, 의심해요. ‘진짜 이건가? 내가 지금 단순화하는 건 아닐까?’ 단어나 문장 하나에도 진부해지지 않도록 살피는 거죠. 예를 들어, 누군가를 이야기할 때 “소통을 중시하는 사람이다.”라고 쓴다면… 이건 너무 큰 표현이잖아요. 한 사람의 고유성이 가려지는 표현이죠. 그걸 경계하기 위해 이 사람이 정말 소통을 중시하는지 거듭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소통이 뭐지?’ 하고 그 본질까지 파고드는 상태까지 가요. 저는 글을 쓸 때 일부러 제 글을 더 의심하려고 해요. 안 그러면 틀에 박힌 글을 쓰게 되니까 자꾸 주의하려는 거죠.
이번 호 주제어는 ‘말’이에요. 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말이나 수다, 대화 되게 좋아해요. 말은… 관계 속의 자석 같아요. 상대방이 싫으면 말을 섞고 싶지 않지만, 좋아하면 계속 이야기하고 싶잖아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다는 건 좋아한다는 의미예요. 말이 누군가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역할을 하는 거죠. 특히 제 삶에서 밥의 역할을 해온 게 말인데요. 제 영혼은 말로 배가 불렀거든요. 육체 건강이 밥으로 단련되었듯, 영혼을 말로 살찌운 거예요. 우리는 말 한마디에 응원받기도 하고, 좌절해서 하루를 망쳐버리기도 해요. 설사 말로 상처받고 낙심하더라도 그게 다 영혼이 살찌는 성장 과정이라고 봐요.
말하기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기도, 빼앗기도 해서 중요한 것 같아요. 작가님은 어떤 말하기를 하고 싶어요?
정확하게 말하기요. 오해의 여지를 줄이고 싶어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있듯, 말 한마디가 큰 오해를 만들기도 하잖아요. 저는 웃자고 한 말인데 타인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요. 나이가 들수록 말하기에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말로 상처받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저 역시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거죠.
말로 상처 주는 건 은연중에 일어날 때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럼요. 구업口業이라고 하더라고요. 말로 지은 업보. 저도 모르게 말하면서 제 편견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좀 오싹하죠. 어제는 친구들이랑 여행을 다녀오면서 모임통장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카카오뱅크가 모임통장 기능이 잘 돼 있다는 이야길 하다가, “요새 카카오뱅크 안 쓰는 사람이 없지.” 하고 말했는데요. 곡성으로 귀촌한 친구 하나가 “야, 우리 동네엔 카카오뱅크 안 쓰는 사람 많아. 다들 농협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때 제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이야기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 내가 또 편협함을 드러냈구나….’ 말하기엔 끊임없이 내가 드러나고, 말을 한다는 건 나를 드러내는 일 같아요. 다행인 건, 말을 함으로써 나를 돌아보고 내 생각을 고칠 수 있게 된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저는 말은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말하지 않으면 편견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수 있으니까요. 용기 있게 말하고, 비판받을 게 있다면 비판받고, 반성할 게 있으면 하고, 고칠 게 있으면 고치고…. 나아지는 건 항상 중요하니까요.
《다가오는 말들》에 “경청자가 될 때, 삶의 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라고 쓰셨죠. 듣는 것에 관해 많이 생각하게 됐는데, 타인의 말을 들을 땐 어떤 점에 특히 집중하려고 해요?
말을 최소화하려고 해요. 제가 말을 하면 상대방 말을 못 듣잖아요. 이제 저도 나이가 많아져서 저보다 어린 친구들과 대화할 일이 많거든요. 원하지 않더라도 나이에 위계가 생겨서 제가 더 많이 말할 확률이 높아져요. 그래서 경각심을 갖고 말수를 줄이려고 하죠. 또, 대화하다 이해 안 되는 게 있으면 다시 물어보려고 해요.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려고 하고요. 우리는 모르는 게 있으면 무안해서, 무지가 드러날까 봐, 모른다는 말을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전 솔직한 게 좋거든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않으면 넘겨짚게 되니까요. 일례로, 지금은 미투 운동도 많아지고 성폭력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이런 분위기가 되기 전에, 제게 그런 이야기를 용기 내서 털어놓은 친구가 있었어요. 그 말을 다 듣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어요. “네 이야길 듣고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돼.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 큰일이고, 큰일이라고 하면 네가 너무 힘들 것 같아. 뭐라고 해주는 게 좋겠어?”
그렇게 말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도 섣불리 대꾸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 같아요.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듣는 것”이 공감 방법이라는 대목도 있어요. 하지만 타인의 이야기는 청자가 경험한 바에 의해 어느 정도는 재해석된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이미 정립된 가치관과 경험에 근거해서 타인의 말을 해석하게 되죠. 그래서 저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려고 해요. ‘다 나 같이 살진 않는다.’, ‘다 나와 같은 조건에 놓여 있지 않다.’, ‘저 사람도 나만큼 생각하고 산다.’ 당연한 말 같지만 중요한 생각이에요. 많은 사람이 어린 친구들은 생각이 부족하다고 여기거든요. ‘어린애가 뭘 알아.’라고 은연중에 생각하잖아요. 특히 저는, 저도 모르게 저희 애를 그렇게 대할 때가 있는데요. 가만 보면 아이들 생각이야말로 아주 날카로워요. 그 안에 완전성도 있고요. 그래서 항상 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요. ‘너만 생각하고 사니?’ 타인은 저와 다른 방면으로 생각하고 저보다 훨씬 깊게 생각할 수 있어요. 나이가 많든, 적든, 그게 누구이든 간에요.
스스로 생각을 점검하지 않으면 쉽게 ‘꼰대’가 되는 것 같아요.
가만히 있어도 중간은 갈 텐데,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남의 말을 안 듣게 되거든요. 그게 바로 꼰대예요. 자기 경험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말하면서 상대방 말은 안 듣는 거죠. 생각이 딱딱하고, 자기 생각에 갇힌 자폐적인 유형이에요. 제 글쓰기 수업에 오는 학인 중에 보육 시설에서 자란 분이 계신데요. 그분은 “그래도 잘 컸네.”라는 말이 제일 듣기 싫대요. 그 말을 한 사람은 그걸 덕담이라고 생각했겠죠. 근데 이건 상대방을 모욕하고 상처 주는 말이에요. 상대방의 생각을 들어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해서 말해버리는 거니까요. 얼마 전에 《있지만 없는 아이들》이란 책으로 북토크를 했는데, 이 책에 ‘마리나’라는 인터뷰이가 나오거든요.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청각장애인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굉장히 불편한 삶을 사는 친구예요. 체류 자격이 없으니까 존재를 숨기고 유령처럼 살아야 하거든요. 마리나는 몽골 국적이라 한국인이랑 얼굴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친구들도 이 애가 불법체류자인 걸 몰라요. 마리나는 자기가 너무 애어른같이 살아온 게 속상하니까 이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고 하죠.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버지로 인해 곤경을 겪었을 때 아버지한테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걸 책에 그대로 옮겼는데, 북토크에서 어떤 분이 ‘마리나를 혼냈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아버지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면서…. 질문이니까 대답은 해야겠는데, 답을 하면서도 당황스럽더라고요.
어떤 대답을 하셨나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마리나가 그렇게 말했겠냐고, 그걸 생각하셔야 한다고 했어요. 이런 경우가 상대방 입장이 되지 않는 거고, 듣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앞뒤 맥락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가 적혀 있는데 그런 상황은 외면하는 거죠. 이런 분들이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려는 사람인 것 같아요.
좀… 슬프네요. 《다가오는 말들》에 ‘되어보기’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노력한다고 무조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거 같아요.
되어보기가 안 되는 사람이 있죠. 안 되고 싶은 사람도 있고요.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도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되어보기를 한다면 그 사람만의 사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앞서 말한 북토크 질문자가 마리나 말에 신경을 쓰는 것도, 들어보면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예요. 본인이 자기 아버지에게 하고 싶던 말인데 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비슷한 억압의 상황에 놓여 있을지도 몰라요. 대화하다 보면 그런 질문을 하게 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이 되어보는 건 피하고 싶은 거죠. 되어보기가 중요하다고 했어도 모든 사람에게 되어보기를 할 순 없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으니까 모두를 이해하느니 꼭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는 게 더 현명한 방법 같아요. 가까운 가족이라든지 친구, 동료 같은 사람들이요.
글쓰기 수업에 오는 사람들을 ‘학인’이라고 부르는데, 호칭에도 신경을 많이 쓰실 것 같아요.
학인이란 말은 ‘수유너머’란 공부 공동체에서 사용하던 말이에요. 그 표현이 좋아서 제 글쓰기 수업에서도 사용하고 있는데요. 관계에 있어 호칭은 중요해요. 그래서 저는 글쓰기 수업을 할 때도 ‘선생님’ 대신 ‘은유’라고 부르자고 해요. 익숙하지 않으니까 많은 학인이 “은유 쌤” 하고 부르는데, 간혹 “은유!”라고 불러주는 학인들이 있거든요. 그 말을 들으면 무게감을 내려놓게 돼요. 가벼운 느낌이 들고, 왠지 자유로워지죠. 호칭을 가볍게 하면서부터 대화를 무조건 무게감 있게, 언제나 진지하게 할 필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저도 학인들을 이름 대신 닉네임으로 부르며 지내요. ‘님’ 같은 존칭은 생략하고요.
사회적인 권위를 내려놓는 거네요. 대화에 위계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네. 특히 사회적인 역할이나 정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각자 살아온 시간대나 경험이 다르니까, 굳이 사회적인 지위를 알 필요는 없더라고요. 저는 지금도 학인들 나이를 잘 몰라요. 직업도 잘 모르고요. 이렇게 명함 없이 관계를 맺는 게 저는 좋아요. 관계에서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경험, 관심, 생각, 감정….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그런 게 말의 재료가 되잖아요.
글 쓰는 사람이 되기 전과 된 후, 말하기 방법에 차이가 생기기도 했나요?
글을 쓰면서 제 안에 있는 다양한 욕망과 모순적인 생각을 알게 됐어요. 사람은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라는 것도요. 특히 인터뷰를 직접 하면서 누구든 보이는 것 이면에 여러 맥락의 복잡한 진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타인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쉽게 말할 수가 없게 되더라고요. 이전에는 저도 모르게 사람이나 상황을 쉽게 판단하거나 ‘이건 이럴 거야, 저건 저럴 거야.’ 하면서 단정 지을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글을 쓰면서부터는 상대의 입장을 절로 생각하게 되고, 친절하게 말하는 게 훈련이 되었죠. 대답이 좀 착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웃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친절해질 수밖에 없어요.
어느 인터뷰에서 “유명한 사람들 얘기보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가슴이 뛰었다.”라고 이야기했죠. 조명 받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좀더 고민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사회는 한 사람의 삶을 직업으로 구분해서 육체노동에 종사하면 노력을 안 했기 때문에 저렇게 사는 거라고 학습시키는 것 같아요. 그런데 세상에 쉽게 사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걸 알고 나면 모든 사람에게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어요. 나이를 좀 먹고, 사람 관찰하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생긴 일종의 직업병 같은 건데요. 평범해 보여도 아무도 평범하지 않거든요. 말 하나하나에 저마다 진실이 담겨 있고, 각자의 서사가 있으니까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지면으로, 티브이로 내보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은 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더 쉽게 생각하고 내 시각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명 받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전하고 싶은 거예요. 모두가 존중받을 의무가 있는데 왜 어떤 사람은 왜 사회적으로 폄하되는지 알리고 싶어서요. 개인의 선의로 사회 구조를 개선할 순 없지만, 사소하더라도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알리기 시작하면서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도 있어요.
책에 “내용 없는 행복이나 희망보다 불행에 차분히 몰두하자.”라는 말이 나와요. ‘불행 전도사’가 되고 싶단 말이 인상 깊은데, 불행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우선 불행은 삶에서 없을 수가 없어요. 몸이 힘든 상태, 마음이 아픈 순간, 고통스러운 사건 모두가 불행이죠. 돈이 없어도 불행하고, 관계가 어그러져도 불행해요. 말하자면 편히 잠들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는 상태가 불행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개인이 좋은 선택을 한다고 해서 불행한 일이 안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열심히 살아도, 안전운전을 해도 사고는 생길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불행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나한테 일어났지?’ 하고 억울해해요. 이 세계는 노력하면 잘할 수 있다고,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고만 가르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힘든 일이 나를 피해 가길 바라는 것 같아요. 근데요, 불행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만일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다면 운이 지나치게 좋았을 뿐이죠. 그래서 저는 불행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언제 행복하세요? 생각해 보세요. 행복은 늘 짧잖아요.
…정말 그러네요. 어떨 때 그 ‘짧은 행복’을 느끼세요?
글이 안 써져서 내내 불행하다가 마감했을 때? 딱 10분 정도 행복한 거죠(웃음).
불행이 해소되는 순간이네요.
맞아요. 꼭 그런 순간뿐만 아니라 날씨가 좋아도 행복하고, 높은 하늘을 봐도 행복하고, 이 작업실에 오는 것도 행복해요. 행복은 주변에 분명히 있어요.
불행과 행복은 공존하는 것 같아요.
동전의 양면이에요. 엎치락뒤치락하는 거죠.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요. 고통을 느끼는 것도 살아 있는 것이고, 불행의 시절을 지나고 나서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느끼기도 해요. 근데, 불행을 얘기할 기회가 없어서, 사회가 그걸 막아서, 불행을 이야기하는 게 무능력한 것처럼 느껴져서 우린 불행에 억눌려 사는 것 같아요.
이번엔 ‘희망’에 관해 이야기해 볼게요. 《다가오는 말들》 뒤표지에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에 관하여”라는 문장이 적혀 있어요.
제 글에는 저 혼자만이 아니라 늘 타인이 등장해요. 저는 오롯한 개인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늘 관계, 집합으로 존재하니까요. 저 역시 타인과 연결된 개인일 텐데요. 딸이 재수를 하면 재수생 엄마가 되고, 아이가 힘들어하면 저도 힘들고, 친구가 아프면 신경이 쓰여요. 글을 쓰면서 이걸 좀더 예민하게 느끼게 됐어요. 세상에 나와 무관한 사람은 없고, 나는 절대 혼자일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저만 행복할 순 없다는걸요. 누군가 불행하면 저에게도 그 불행이 오고, 제가 불행해지면 제 주변으로 퍼지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제 생각이 구체적이고 예민하게 바뀌면 세상도 조금은 바뀔 거라고 믿어요. 제가 세상의 일부니까요.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경험한 적이 있나요?
세상의 일부인 누군가가 생각을 바꿨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큰 변화라고 봐요. 《다가오는 말들》을 읽고 어느 독자가 노키즈존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거든요. 그분은 혼자 카페에서 내 시간을 즐기며 조용히 있는 게 좋았기 때문에 노키즈존을 찬성해 왔대요. 근데 제 글을 읽고 생각이 달라졌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책에 노키즈존은 “맘충-엄마-여성에 대한 장소적 제약이고 혐오의 사회적 확장”이라고 썼거든요. 제 글이 누군가를 변화시켰다는 데서 보람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차별받은 사람이 사회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도록 계속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있고요. 공부해서 익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차별할 수가 있거든요.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많이 퍼뜨리면서 지내고 싶어요.
스스로를 ‘데이트 생활자’라고 이야기하시는데, 앞으로는 또 어떤 만남과 말들을 이어나갈 계획인가요?
저를 데이트 생활자라고 이야기하는 건 사람을 만나서 기쁨과 에너지를 얻는 유형이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를 빼앗긴다고 하는데, 전 특히 소수와의 만남을 좋아하거든요. 이런 인터뷰도 좋아하고요. 데이트처럼 둘이 얘기하는 거잖아요(웃음). 그래서 인터뷰어로도 잘 지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태로 살아갈 텐데요. 누군가를 만나서 모르는 걸 알게 되고, 좀더 나은 생각을 하게 되고, 글로 쓰며 지낼 것 같아요. 저는 ‘글 쓰는 활동가’라고 저를 표현하기도 해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무언가 느끼고, 글로 쓰는 사람이어서요. 말은 한 명 한 명 붙잡고 이야기해야 하지만, 글에는 전파력이 있어요. 그 확산성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지내고 싶어요. 세상에 잘 안 들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 미등록 이주아동이나 빈곤층 청소년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요. 꼭 이런 사회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예쁜 말들은 글로 옮기고 퍼뜨리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얼마 전엔 이런 말을 들었어요. “코스모스는 먼지 속에서도 피어 있는 게 기특해서 예쁘다.” 아름답지 않나요? 이런 말을 들으면, 코스모스를 이전과는 다르게 보게 돼요. 어디선가 떠돌아다니는 말, 이미 있는 말을 채집하고, 듣고, 모아서 세상에 알리는 글을 계속 쓰게 될 것 같아요. 좋은 말들을 재료로 삼아서요.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