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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삼양동의 커피 농장 빨간 열매 속 푸른 씨앗, 커피
몇 년 전 커피를 좋아하던 한 여자가 열대작물인 커피를 제주에서 재배해보겠다고 나섰다. 국내 최남단의 따뜻한 섬. 물론 제주에서는 도시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을 마음껏 볼 수 있다. 기다란 야자수들, 주렁주렁 귤이 달린 귤나무, 화원에서나 볼 수 있는 선인장과 겨울 이불만큼 두꺼운 로즈마리도 길가에서 멋대로 자라고 있다. 제주는 식물들이 잘 자라는 축복의 땅인 것이다. 하지만 커피재배가 과연 가능할까? 커피 체리를 수확하느라 검붉게 물든 한국인의 손이 상상되지 않는 이는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카페 너머의 공간
제주 공항에서 차를 타고 동쪽으로 20분 남짓 이동하면 삼양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검은 돌 해변이 있는 차분한 동네. 찾아가기로 한 커피 농장이 그곳에 있었다. 차에서 내리고 나서 두어 번 길을 물어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넓은 공터, 온실재배를 위한 비닐하우스들, 누워있는 큰 개 두 마리, 각종 화분들, 해가 잘 드는 카페.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커피 농사를 짓는 생활은 과연 어떨까.’
농장 주변을 천천히 구경하며 제멋대로 상상하자니 좋은 것만 떠올라 금방 시시해져버렸다. 어쩌면 커피를 좋아해, 이곳에 오자마자 금세 들뜬 내 마음을 스스로에게 들켜 민망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차분하게 준비해 온 것들을 물어야지.’ 마음을 다잡고 카페에 들어섰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눈치를 보다 내 무릎으로 뛰어오른다. 그렇게 첫 질문은, 준비해 온 것들을 제치고 고양이에 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함께 지내는 녀석이에요. 빈이라고 불러요. 커피콩이요(웃음). 성도 따로 있어요. ‘백만’이라고, 이것저것 들어간 돈이 백만 원 정도여서 붙였어요.”
오후로 접어드는 시간, 햇볕이 카페를 덮자 ‘백만 빈’은 가장 따뜻한 자리를 찾아가 눕는다. 주인 노진이 씨(44)는 신경 쓰지 않는 체하며 조용히 먹이통을 채워준다. 짓궂은 이름을 붙여줬지만, 어쩐지 미움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사실 카페라고 부르는 이 공간은 계획에 없던 곳이었다. 처음에는 사무실로 사용하던 공간이었는데 농장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자연스럽게 의자와 테이블이 들어선 것이다. 필요에 의해 천천히 생겨난 공간이 그렇듯,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싶은 여행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이 카페 너머의 공간이 되길 원한다.
“농장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게 되길 바랐어요. 이런 곳에서 실제로 빨간 열매가 열리고, 그 씨앗을 볶아 먹을 수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잖아요. 그런 과정을 함께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는 걸 나누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단지 카페가 되는 건 원치 않아요.”
커피 벨트(커피나무를 재배할 수 있는 위도 범위)에서는 떨어진 커피 열매가 자연발화 될 정도로 기후조건이 좋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점이 커피 재배에서는 단점이 되기 때문이다. 제주 커피 농장이 특별한 이유는 정말이지 간단하다. 사실은 없어야 할 커피나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나무를 누구나 만지고 구경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는 이곳에서 재배한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커피를 대하는
아주 정성스러운 태도
그녀가 제주에 내려온 건 7년 전, 서울에서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다가 ‘늦게라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고 한다. 주변을 깨우는 용감한 마음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커피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동아리 선배 중에 차茶를 좋아하는 선배가 있었어요. 아주 귀한 차도 두고 마실 만큼 애정이 깊었죠. 저는 옆에 있다 보니 자주 얻어 마시긴 했는데 사실 이해하진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선배가 커피에 푹 빠져 지내는 거예요. 제주에 펜션을 운영하게 됐는데 카페를 함께 운영할 생각이었나 봐요. 그래서 이번에는 커피를 많이 얻어 마셨죠(웃음). 선배가 함께 커피 관련 일을 해보자고 종종 얘기하던 시기였어요. 그때까지는 시큰둥한 상태였고요.”
커피를 생각하는 마음이 진지해진 건 서른이 넘어서 떠난 일본여행에서였다.
“동경을 여행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커피를 직접 볶는 카페에 가게 됐죠.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직원들이 커피를 대하는 자세가 아주 조심스러웠어요.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주전자로 천천히 내리는 핸드드립 전문점이었거든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던 것 같아요. 배워보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거죠.”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모두 농장을 운영하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참 드문 경우일 것이다. 농장을 운영하게 된 계기를 묻는 내게 그녀는 ‘국내의 모든 로스터들의 바람이 좋은 원두를 마음껏 볶는 것’이라고 돌려 말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국내에 수입되는 원두의 질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그 외에도 이유는 많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작 실행으로 옮기는 일이 부담돼 힘이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미 꽤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되고 있는 일이어서 그런지 대화는 물렁하지 않았다. 다만 쉽지 않은 일임을 확인해야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었다.
“4월부터 10월까지 제주 날씨는 커피 재배에 적합한 날씨에요. 문제는 겨울이죠. 물론 제주도는 겨울이 없는 곳으로 공식발표가 나 있어요. 그런데 그건 통계일 뿐이고 나무가 느끼는 게 정확하죠. 언젠가 밖에 내놓은 나무가 모두 냉해를 입고 죽은 적이 있어요. 추위에 대비를 잘해야지, 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작년 11월엔 태풍이 왔어요. 겨울을 코앞에 두고 하우스에 비닐이 전부 벗겨져 버렸죠.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으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태풍이 지나가고 나서도 죽지 않고 버텨준 나무와 빨간 열매를 보면 또다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꼭 제주가 아니더라도 커피 재배는 생소한 일이어서 따로 교육을 받을 곳이 없다. 그녀는 대부분의 정보를 꼼꼼한 일본 교재에서 얻고, 나머지 부분은 직접 경험하고 실험했다고 한다. 이론서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때로 제주의 농부들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보통 3년 정도 되면 커피 열매가 열린다고 들었어요. 농장의 나무들에도 그맘때 열매가 열리긴 했는데 정말 조금 열린 거예요. 그런데 귤 농사를 짓고 계신 분이 구경 오셔서 열매가 정말 많이 열렸다고 하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귤나무도 열매가 열리는 첫해에는 몇 알밖에 열리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내년엔 많이 열릴 거야.” 말씀해 주셨는데, 정말 그랬어요. 그게 바로 작년이에요.” 윤기 있는 잎사귀부터 하얗게 피는 꽃까지, 그녀의 눈에는 귤나무와 커피나무가 비슷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귤이 잘 자라는 환경, 귤에 생기는 벌레에 관해 공부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귤 농장에 찾아가 물어보면 어떤 문제들은 아주 쉽게 해결되기도 했다고.
“물론 풀리지 않는 문제들도 있어요. 한번은 농업기술센터에 문의한 적도 있었는데 결국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어요. ‘아직 다들 모르는 일이구나.’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죠.”
지금은 좀 나아졌는지 묻는 내게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재배 기술이 발전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관심은 계속 높아지는 것 같아요. 좋은 점도 있고 걱정되는 부분도 있어요. 제주에서 커피 재배를 준비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 본격적으로 재배하진 않으면서 제주 커피의 가능성을 부풀려 전달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예전에 농업기술센터에서도 커피 재배를 시도해 본 적이 있어요. 작물로서 상품가치가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거였죠. 발아해서 가지가 두꺼워지기까지 문제가 없었어요. 일단은 성공적이었죠. 그런데 커피를 상품화하려면 후가공 과정이 있어야 하잖아요. 열매를 따서 과육을 벗기고, 씨앗을 씻어 말리고… 과실수와는 전혀 다르죠. 그런 걸 전부 따져봤더니 재배 작물로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나온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재배는커녕 조금의 지원도 없어요. 세상에 맛있는 커피가 얼마나 많은데요. 자연 재배되고 있는 커피도 많고요. 아프리카나 아열대 지역에서는 오랜 시간 농사를 지은 덕분에 자신들이 재배하는 커피의 특징을 아주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아직 제주 커피는 그런 데이터가 없어요. 소문을 낼 시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무를 생각하는 일,
좋은 열매를 맺는 일
오래전 커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녀, 자주 마시는 것은 물론 스스로 커피를 볶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결국 커피나무를 기르고 있다. 마시는 즐거움이 아닌 ‘기르는 즐거움’은 과연 어떤 것일까.
“커피나무는 정말 끝없는 매력을 가진 식물이에요. 잎과 꽃, 열매, 씨앗, 무엇 하나 모자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가장 깊이 숨겨둔 씨앗을 잘 볶으면 상상도 하지 못한 향이 나잖아요. 놀라운 일이죠. 커피나무를 기르다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 같던 일들도 다시 생각해 보게 돼요. 여유라고 해야 하나, 이 일을 하면서 이해심이 넓어졌어요. ‘절대’라는 말을 ‘절대’ 쓰지 않아요. 나이 탓일지도 모르겠어요(웃음).”
그녀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나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길 원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곧 농장을 운영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정말 많아요. 커퍼Cupper(원두의 품질을 감정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하지만 그들의 관심범위가 조금 좁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커피 벨트로 묶여있는 국가를 지원하고 조사하고 있어요. 가장 좋은 커피를 가져가겠다는 거죠. 커피가 시작되는 곳에 그들의 관심이 닿아있는 거예요. 수많은 자격증이 어쩌면 발목을 붙잡는 게 아닌지 걱정이 돼요.”
덧붙여 그녀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배우려 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때로는 분위기가 커피의 맛을 지배하기도 한다는 얘기와 함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커피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향과 문화를 즐기는 것을 넘어 나무의 생태에 관심을 가진다면 얼마나 멋질까,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커피를 단순한 식품이 아닌 생명으로, 사랑하는 식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커피에 관련된 많은 문제들도 직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스스로에게도 바라는 일이었다. 운반하며 낭비하는 에너지, 산지 노동자들의 슬픔, 유통상에서의 거품도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에 모두 들어있는 것들이니까. 사람들을 움직이는 좋은 방법은 어쩌면 이 아름다운 열매를 그저 보여주는 것, 만지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축제예요. 올해 10월에 열렸던 게 네 번째였죠.” 아주 적은 양이었지만 첫 수확의 기쁨에 들떠있던 그녀와 농장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당장을 기념하고 싶다는 생각에 커피 축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커피 체리를 직접 따보기도 하고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었죠. 그게 지금의 축제가 된 거예요. 작년에 수확한 커피로 담근 술, 씨앗을 빼낸 과육으로 만든 효소를 나눠 먹기도 했어요. 반응이 아주 좋았죠(웃음). 축제를 준비해서 돈을 버는 것은 아니었지만, 할 때마다 너무 즐거웠어요. 앞으로도 계속할 것 같아요.”
커피 축제 말고도 한라산 학교(제주도 내에서 적극적인 문화활동을 해보자며 5년 전에 만든 주민단체)를 통해 커피 문화를 알리고 있다고 한다. “재주 있는 강사들이 누군가를 가르치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건 각자의 작업실이나 가게를 학습장으로 쓴다는 점이에요. 제 경우에는 이 농장이 학습장이 되는 거죠. 수익은 없지만, 좋은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강의를 하고 볶은 커피를 사람들에게 팔고 아직 활발하진 않지만, 묘목을 판매하기도 한다. 농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일은 대부분 그녀 스스로 해결하기 때문에 수입이라는 건 ‘버는 것’보다 ‘쓰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바쁘게 지내는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여유를 즐기는지 물었다.
“종종 밤늦게까지 농장에 남아있는 경우가 있어요. 보시다시피 주변에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무섭지 않으냐고 물어봐요. 하지만 그 시간, 저는 정말 평온함을 느껴요.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아침이에요. 출근해 물을 뜨겁게 데워놓고 농장을 둘러봐요.
나무상태를 확인하고 문도 열어놓고 하죠. 다시 안으로 돌아와 끓여놓은 물로 커피를 아주 진하게 내려 마셔요. 하루를 시작하는 과정이죠.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삼양’이 커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동네라 생각했는데, 커피 농장을 하다 보니 재미있는 일이 종종 생겨요. 한번은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대뜸 박원준이라는 사람을 아는지 물으시는 거예요.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분은 한국에 원두커피 문화를 처음 전파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분이었어요. 고향이 이곳 삼양이라 동네 어르신이 알고 계셨던 거죠. 2008년에 돌아가셔서 뵙진 못했지만, 그분이 서울에서 운영하던 ‘다도원’의 커피는 마셔본 적 있어요. 진하게 볶은 커피가 정말 맛있었어요. ‘그놈이 여기서 나무를 길러보고 싶다고 했었어. 결국, 그냥 갔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얘기도 해주셨어요.”
그녀는 얼떨결에 삼양에 정착해 한국의 커피 1세대가 못다 이룬 꿈을 현실로 옮기고 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일을 밀고 나갈 땐, 반드시 찾아오는 고단함을 이겨내는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 듯했다. 마음 깊이 좋아하는 일이었는지, 힘들었던 만큼 행복했는지는 아마 나중에 가서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리길 항상 바라고 있어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됐으면 하고요. 그리고 당장은 아니지만, 커피 산지에 찾아가보고 싶어요. 다녀와서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내가 한 말은 다 틀렸어.” 그렇게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웃음).”
에디터·포토그래퍼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