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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정오에
어두운 정오에
길을 가다 보면 터널을 지나야 할 때가 있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희미한 빛이 보이기까지 시간이 멈춘 듯하다. 작가 정미진의 글을 읽는 건 쨍쨍한 해가 내리쬐는 어느 오후, 터널을 지나는 일과 같다. 막막하고 답답한 세상에 홀로 갇힌 기분이 들더라도 그 끝에는 출구가 있다. 독자는 어디론가 이어지는 작가의 행로를 따라 계속 나아가면 된다.
INTERVIEW
정미진
작가, 출판사 엣눈북스 대표
“작가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온기를 잃지 말자는 생각을 종종 해요. 어두운 이면이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사람에 대한 애정을 품은 글을 쓰겠노라고.”
여덟 권의 그림책이 나왔고, 그중 한 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직접 글을 썼어요.
지금까지 선보인 작품은 새로운 게 아니라 오랫동안 묵힌 작품이에요. 틈틈이 구상해온 것들이죠. 이제 곳간에 곡식이 떨어지고 있어요(웃음). 소재가 고갈되니 두려움이 앞서요. 더 이상 쓰고 싶은 게 없어지면 어쩌지 하고요.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비슷한 결을 지닌 다른 작가의 작품을 발굴해서 만들어보자고 다짐했어요.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었는데, 왜 그림책을 선택했는지 묻고 싶어요.
이유는 단 하나였어요. 온전한 내 작품을 갖고 싶다는 마음. 저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글을 썼어요. 애니메이션의 경우 이미 이야기가 짜여 있고 작가가 투입되어 풀어내는 형식이에요. 영화는 거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팀 프로젝트의 현장이고요. 그러다 보니 제작 과정에서 각색이 빈번히 이뤄지고 기획성 시나리오를 쓰는 데 그칠 수 있어요. 작품이 나와도 오롯이 내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들죠. 저는 원천 스토리를 쓰는 사람인데, 그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지킬 수 없다는 데 회의를 느꼈어요.
이야기 자체로 완성형인 매체는 단연 책이네요.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포스터를 어떻게 찍느냐, 마케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버리곤 해요. 가끔 속상할 때도 있었죠. 그런데 책은 표지 선정부터 디자인, 마케팅까지 의도대로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아무리 책의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창작자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매체라고 생각해요. 그 매력에 빠져 책을 쓰는 일뿐만 아니라 만드는 작업도 하게 됐네요. ‘엣눈북스’라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 중이에요.
그림책 외에 출간한 소설을 보면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아요. 영상 작업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지 않나요?
물론 미련은 있어요. 작품의 결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팀을 만나거나 혹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독립 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이라면 언제든지 하고 싶어요. 사실 소설은 판권이 팔린 적이 있는 작품이에요. 국내 스릴러 영화는 각색에 따라 비슷한 내용이 되기 쉬워요. 피해자가 어떤 일을 당했고, 자극적인 요소와 추격 장면이 들어가고, 예상할 수 있는 흐름이죠. 그래서 계약하지 않고 다시 가져왔어요. 언젠가 직접 만들어보려고요. 그건 저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해요. 엣눈북스의 책들이 원천 스토리가 된 엣눈필름의 작품을 제작하는 것.
본래 꿈은 화가였다고 들었어요. 그림책이 어릴 적 꿈과 현재의 꿈을 함께 이룰 수 있는 방법이었다는 글도 인상적이었고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전문 교육을 받고 싶었는데 부모님께서 반대하셨어요. 어쩌다 보니 글을 쓰게 됐네요. 대구 지하철 참사에 관한 책 《소문》에서는 직접 그림을 그려봤어요. 제 그림 실력은 딱 그 정도예요(웃음). 그래서 만화가들이야말로 예술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요. 원천 스토리와 그림, 연출까지 다 할 줄 아는 능력자들이잖아요.
작품마다 그림 스타일이 다 달라요. 작가를 섭외하고 협업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겠네요.
그림 작가들도 회사에 소속되어 있거나 외주 작업을 하면 자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요. ‘내 것’을 갖고 싶은 건 창작자의 공통된 갈증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대부분 저와 같은 마음으로 흔쾌히 작업에 임해주셨죠. 보통 SNS와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통해 그림을 발견했어요.
상업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분들보다는 아직 기회를 갖지 못한 분을 찾았어요. 그림이 마음에 들어도 좀 오래 지켜보는 편이에요. 그분이 어떤 것에 목마른지, 우리의 작업과 비슷한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요. 작업을 의뢰했다가 불발된 경우도 있죠. 처음에는 형체 없는 출판사였으니까요. 몇 권의 작품을 낸 이후 그분께 다시 연락이 왔어요. 엣눈북스가 그림책 출판사로 자리 잡았다는 방증이라 내심 뿌듯했죠.
같은 주제로 하나의 책을 만들더라도 글과 그림은 접근 방식부터 다르잖아요. 의견 차이는 어떻게 조율하는지 궁금해요.
저는 그림 전공자도 아니고, 그림책을 만들던 사람도 아니라 작가들에게 마음껏 목소리를 내달라고 당부해요. 개인 작업을 못 한 아쉬움으로 시작된 일이니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이런 식의 접근은 작품과 한 발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너무 예술적이거나 심오하지 않고, 대중이 편안하게 접할 수 있는 범위에서요. 자칫 우리가 만든 세계 안에 스스로 매몰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림을 찾기도 하지만, 문득 그림을 보고 소재가 떠오를 것 같아요.
《있잖아, 누구씨》가 그랬어요. 이런 내용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텍스트는 없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작가님 그림을 보고 반해서 일단 만나자고 했어요. 그날 새벽에 초고를 썼고요. 작가님에게 보여주고 설득할 만한 이야기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림책은 그림이 주인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글 쓰는 작가님을 만나 묻고 싶은 게 많았어요. 그런데 이런 식의 분류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엣눈북스에서 출간한 《MUTE》처럼 글이 없는 그림책도 있고요.
글 없는 그림책은 궁극적인 형태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장르 중에서 오직 그림책에서만 할 수 있는 게 그림으로만 이뤄진 책 아닐까요? 글이 없다고 해서 스토리텔링이 들어가지 않는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더 잘 짜인 이야기와 구성으로 한 권을 꽉 채울 수 있죠. 숨어있는 걸 찾아내는 기분이랄까요, 그림책 작가들의 로망인 것 같아요. 제가 글을 쓰다 보니 다른 그림책보다 비교적 텍스트가 많은 편인데, 최종적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작업이기도 해요.
엣눈북스의 상징은 두더지예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는 굴속에서 사색하는 두더지 ‘두두’예요. 해를 짝사랑하죠. 본인은 정작 햇볕 알레르기가 있지만요. 평소에는 은둔하지만 매일 정오가 되면 해를 만나러 나와요. 어두운 걸 좋아하고 혼자 있는 걸 즐기는 제 성격을 반영한 캐릭터예요. 저도 두두와 같은 알레르기가 있어요. 온몸이 짓물러도 햇살을 받고 싶어 하는 타입이에요.
‘두두’뿐만 아니라 작품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반영했다고 들었어요. 특히 《잘 자, 코코》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담았다고요.
저는 성격이 밝지 않고 내성적인 편이에요. 책에서처럼 어릴 때 옷장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했고요. 유년 시절에 안 좋은 기억이 많았는데, 그런 부분이 글에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특히 《잘 자, 코코》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쓴 이야기예요. 투병 생활을 오래 하셨는데, 제가 유독 아버지의 외모와 성격을 닮았거든요. 그래서 나도 언젠가 당신의 병을 닮아서 죽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있었어요.
죽음이나 고통, 상실 같은 소재는 다소 불편하면서도 동시에 상징적인 테마가 되는 것 같아요.
12월에 출간 예정인 책이 있는데 러시아 작가의 작품이에요. 실제로 만나면 요정 같고 순수한 친구인데, 그림에는 해골이 난무하고 굉장히 어두운 면이 있어요. 이렇게 맑은 사람에게서 어떻게 이런 느낌이 나올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넌지시 말해줬어요. 혈액암을 오래 앓았고, 늘 죽음에 관한 고민을 해왔다는 것을요. 누군가의 작품에는 그만의 사연이나 내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모든 작품이 소중하지만, 특히 애착이 가는 책이 있다면요?
《해치지 않아》예요. 그림을 그린 분이 애니메이션 작업할 때 만난 동료였어요. 그녀의 실제 사연을 듣고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죠. 당시에는 둘 다 어리고 노하우도 없어서 금방 지쳐버렸어요. 결국 책도 무산됐고요. 그게 계속 마음에 짐으로 남아있었어요. 출판사를 차리고 다시 한번 부탁했죠. 이번에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어요. 중간에 포기할 뻔한 순간이 왔지만 서로 의지하며 끝까지 해보자고 버텼어요. 이 책을 끝내고 나서야 그 친구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제일 힘들었던 청춘을 함께했고, 현실의 벽을 한 고비 뛰어넘은 작품이라서 더욱 기억에 남아요
제가 인상 깊게 본 작품은 동물들이 방문하는 《휴게소》예요.
소중한 책이에요. 동물이 머무는 곳을 그렸지만 결국 사람을 위해 만들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저를 위해서요. 반려견 햇님이가 올해 열여덟 살이거든요. 사람 나이로 치면 할머니죠. 언젠가 책 내용처럼 편안하게 떠났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책에서는 잠들지 못하는 날에 코코가, 외롭고 두려울 땐 누구씨가 있어요. 주인공은 성장해서도 그들을 찾죠. 그림책은 상상의 친구 같아요. 어른이 되면 떨쳐내야 한다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저는 어른이지만 어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공감해요. 그렇다면 저도 어른이 아닌 것 같아요.
글이 안 써지거나 슬럼프에 빠지면 어떻게 극복하는지 궁금해요.
고향이 대구인데, 내려갈 때마다 ‘아이디어 따러 가는 길’이라고 말해요(웃음). 캄캄한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남편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생각도 정리되고 막혔던 부분이 뚫리거든요.
남편과 함께 꾸려가는 엣눈북스, 어떻게 달라졌나요?
3년이 되니 출판사가 자리를 잡았어요. 동시에 결단을 내려야 했죠. 일이 많아졌는데 직원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예전처럼 시나리오 일과 병행해야 할까, 결론은 금방 나왔어요. 저는 그림책 만드는 일을 평생 하고 싶으니 남편을 설득해서 함께 운영해보자고 했죠. 남편은 건축 분야에서 일해왔고 기본적인 손재주가 있어요. 창작에 대한 욕심은 없고요. 저와는 반대죠(웃음). 지금은 2인 체제로 전반적인 운영과 부수적인 작업을 남편이 맡고, 저는 정말 창작에만 몰두하고 있어요.
작업실에 다양한 그림책이 있는데, 그중 하나만 꼽는다면요?
《무릎딱지》. 엄마의 죽음을 아이의 관점에서 풀어낸 작품이에요. 그림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된 책이기도 하고요. 서점에서 무심코 꺼내어 읽다가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죠. 아, 그림책의 힘이라는 게 대단하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읽은 그림책 중에서 텍스트가 가장 많네요. 기억에 남는 문구가 있어요. “나는 엄마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귀를 막고, 입을 다문다. 하지만 코는 그냥 놔둔다. 숨은 쉬어야 하니깐.”
평소에 닮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그림책 작가는 아니지만 미치오 슈스케라는 추리소설 작가를 좋아해요.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보는데 간혹 염증을 느낄 때가 있어요. 특유의 염세적인 시선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망각하고 사건으로만 풀어버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책을 읽고 나면 허무하죠. 그런데 슈스케 작가는 내용도 흥미롭고, 인간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놓지 않아요. 그래서 책장을 덮을 때는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죠. 작가이기 전에 사람으로서의 온기가 느껴져요. 그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어두운 이면이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사람에 대한 애정을 품은 글을 써야겠다고요.
마지막으로 꿈에 대해 묻고 싶어요.
아마도 엣눈북스가 제 꿈인 것 같아요. 조금 더 안정이 되면 근처에 작은 사무실을 얻고 싶어요. 꾸준히 책도 출간하고요. 가끔 포르투갈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최근에 좋은 영향을 받고 있는 작가와 작품이 모두 그곳에서 왔더라고요. 포르투갈은 작가가 운영하는 서점과 출판사가 많고, 그림책 분야에서 꽤 주목 받고 있는 곳이에요.
엣눈북스가
추천하는 그림책
깎은 손톱
글 정미진, 그림 김금복 | 엣눈북스
“늙은 아내와 늙은 남편이 포개어 잡은 두 손.그 사이에는 결코 늙지 않은 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엣눈북스’의 이름으로 준비한 첫 작품인 《깎은 손톱》은 《있잖아, 누구씨》가 출간되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기에 남다른 의미가 있는 책이다. 전 연령대가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으로 최근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짧게 깎은 손톱이 자라나 다시 깎는 시간 동안 일어나는 세 인물의 이야기로, 투명하고 아름다운 수채화로 그려내는 어느 가족의 동화. 소녀는 붉은 마음, 할머니는 황혼의 노을, 엄마는 푸른 우주로 표현되며, 쓸쓸하지만 따뜻한 삶의 정서를 풀어낸다.
에디터 오혜진
포토그래퍼 안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