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OUSE IN THE FOREST, WALDHAUS

숲 속의 집, 봘드하우스

숲 속의 집,
봘드하우스

말하자면 시작은 어떤 여름밤이었다. 9월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무더웠던 밤에 쏘렌티노Paolo Sorrentino 감독의 영화 <유스Youth>를 보았다. 영화 속의 묵직한 말과 그림에 마음이 차올랐다. 영화는 스위스 남부에 있는 호텔 ‘봘드하우스 플림스Waldhaus Flims’와 ‘샷츠알프Schatzalp’에서 촬영했다고 했다. 영화의 감흥이 옅어지기 전에 꼭 가보리라고 마음 먹었지만 몇 개월이 그냥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 기사에서 미국의 어느 회사가 봘드하우스 플림스를 샀으며 리모델링을 계획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달라지기 전의 모습을 담고 싶었던 우리는 서둘러 여행을 계획했다. 늦여름 밤부터 기다려오던 그곳에 도착한 건 겨울이었다.

139년 전의 기억

제가 느끼는 건 두려움뿐이에요. 그것도 경이로운 감정이죠.
All I sense is fear. That is an amazing feeling too.

20대의 내가 원하는 길은 너무도 선명하고 또렷해서 부모의 걱정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늘 확고했지만 서른을 넘어서면서 달라졌다. 원하는 바를 똑바로 마주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때론 두려웠으며 그만큼 망설이고 주저하는 순간도 늘어났다. 마음속에 다시 불빛을 밝힌 것은 ‘두려움조차도 경이로운 감정’이라는 영화 <유스>의 대사 한 줄이었다. 누구도 완벽히 준비되어있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영화는 격려해주었다. 좋아하는 영화의 배경을 찾아가는 여행의 설렘은 생각보다 컸다. 카메라에 담긴 공간은 호텔의 뒤뜰, 야외 온천탕과 사우나, 그리고 수영장으로 일부일 뿐이었지만 몇 번이고 영화를 보았으니 호텔 구석구석을 이미 잘 아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숲 속의 집’을 뜻하는 이름 그대로 호텔은 거대한 면적의 숲과 공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에 더해 자그마치 139년 전에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이곳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든 화려한 패턴의 벽지와 카펫이 그 길고 긴 시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호텔의 전시실에는 옛 시절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잘 보존된 옛 부엌에는 까맣게 변한 은식기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커다란 통신 기계 몇 대와 벨보이의 빛바랜 정장도 눈에 띄었다. 유명인의 방문을 기념한 흑백 사진 여러 장이 벽을 채우고 있었다. 백여 년 전의 호텔은 지금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은밀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한 세기를 훌쩍 넘겼건만 그 시절의 물건을 고이 간직해둔 것은 먼 과거의 영광을 현재의 방문객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서였을까. 사실 누구에게든 잊어달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기억해달라는 부탁을 듣는 편이 더 나았다.

단 사흘간의 겨울이지만

호텔에서 머무는 사흘 동안 겨울 하늘은 부지런히 함박눈을 쏟아 내렸다.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면 밤사이 나무도, 호텔도, 땅도, 가로등도 모두 전날보다 한결 더 두툼해진 흰옷을 입고 있었다. 차곡차곡 쌓인 흰 눈에 햇살이 반사되어 아침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그 광경이 낯설어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눈을 내리느라 분주한 겨울과 달리 우리는 게으르고 느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야외 온천탕과 사우나가 문을 여는 아침 일곱 시부터 물속에서 한두 시간을 보낸 후에야 천천히 아침 식사를 했다. 오전에는 호텔 주변의 공원을 둘러보았다. 함께 여행을 온 네 살짜리 조카의 썰매를 끌어주고 신나게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오후가 되면 다시 온천탕에서 몸을 녹였다.

이곳의 온천탕에는 여러 종류의 사우나실과 작은 실내 수영장이 함께 딸려있다. 스위스의 사우나는 보통 남녀 공용이며 위생상의 이유로 모두가 알몸으로 들어간다. 영화에서처럼 말이다. 이곳에는 여성 전용 사우나가 별도로 있긴 했지만 일반 남녀 공용 사우나에서 ‘알몸 규정’을 지켜야 하는 것은 같았다. 스위스 생활 4년이 가까워지도록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는 문화이기도 하고 원래도 사우나를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라 나는 굳이 사우나를 출입하지 않았다. 문제는 딱 한 번 남편을 찾으러 잠깐 들린 사우나에서 알몸으로 나를 반기는 남자 일행을 마주친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보다 지인의 발가벗은 몸이 더 당황스러웠다. 나는 최대한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그의 얼굴 쪽으로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어째 벗고 있는 것은 그인데 어색한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그 아찔한 만남을 계기로 사우나는 더욱 멀리하게 되었고 덕분에 나는 일행과 떨어져 야외 온천탕과 수영장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희미해진 계절을 찾는 곳

따뜻한 온천물에 발끝부터 어깨까지 푹 잠그고 얼굴만을 밖으로 쑥 내밀었다. 굵은 눈송이가 내 머리 위로 하염없이 떨어졌다. 이번 겨울에는 유독 눈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유난히 따뜻했던 겨울이었던 지라 서울을 방문했던 12월에도 눈은 귀했고 스위스 바젤Basel에 돌아왔던 1월에도 한겨울의 찬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도시에서는 계절이 희미해져 버렸다.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은 탓이라 해도 야외에 나온들 건물이 빼곡한 도시에서 제 색을 한껏 발하는 계절을 눈으로, 소리로, 냄새로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우렁찬 겨울의 기운이 더욱 감사하고 귀해졌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마침 온천탕 바로 옆 잔디 위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수영복만 입은 채 눈밭을 용감하게 굴렀다. ‘으악’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차가웠지만 두툼하게 쌓인 눈의 감촉은 부드러웠다. 몸에 흰 눈을 잔뜩 묻힌 채로 다시 온천탕으로 뛰어들자 차가운 눈과 따뜻한 물이 내 몸을 콕콕 찔러 따끔거렸다. 그 순간 행복하다는 생각이 나를 채웠고 “감사합니다.”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365일 중 단 며칠이라도 날 것 그대로의 사계절을 오롯이 온몸으로 느끼기 위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 봄에는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여름에는 초록색 숲에서 싱그러운 나무 냄새를 맡으며 사이 사이로 들어오는 쨍쨍한 햇살을 받을 수 있게. 가을에는 높고 맑은 하늘 아래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겨울에는 함박눈을 펑펑 맞으며 깨끗한 눈길에 첫 발자국을 남길 수 있게. 그렇다면 다른 날들을 풍요롭게 보낼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의 사흘이 그랬던 것처럼.

WALDHAUS FLIMS, MOUNTAIN RESORT & SPA

Via dil Parch, 7018 Flims, Switzerland
H. waldhaus-flim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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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현아

글·사진 이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