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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가기
A D A Y
AT THE AIRPORT
공항에 가기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책에는 공항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공항에서 밥을 먹고 사람을 관찰하고 생각을 하며 글을 쓴다. 심지어 일주일 동안 공항에서 머무르며 책을 쓴 적도 있다. 집 앞의 단골 카페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공항에서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읽다 보면 공항에 가고 싶어진다. 그렇게 그의 글에 끌려 공항을 오간 것도 벌써 수년째다.
AM 09:15
외로움, 상처, 우울, 걱정, 실수, 미움, 아픔 같은 다루기 힘든 감정들은 다 어디로 갈까. 사람의 마음 한구석에는 창고 같은 방이 있는 것 같다. 어렵고 지저분한 감정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곳. 하나둘 무거운 감정을 채우다 보면 더는 아무것도 넣을 수 없는 상태가 온다. 집에 가다 뜬금없이 눈물이 나거나,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인다면 비워낼 시간이 왔다는 신호다. 위로를 받고 싶지만, 꼭 그럴 땐 아무도 없다. 내 경우에는 그런 시간이 불쑥 찾아오면 나를 위로하기 위해 공항에 간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옮겨 공항철도를 타기도 하고,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는 무작정 나와 공항버스를 타기도 한다. 공항에 간다고 말하면 “여행가? 누가 떠나? 아, 누가 돌아오는구나!”라는 얘기를 들을 것이 빤하므로 웬만하면 말을 아낀다. 아무 말 없이 무거운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짐을 싼다. 가벼운 노트와 펜 그리고 묵직한 마음을 들어 가방에 넣는다.
AM 11:20
공항으로 가는 다양한 방법 중, 자동차도 돈도 없는 내게 가장 편리하고 저렴한 교통수단은 공항철도다. 공항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는 들뜬 공기가 있다. 짐을 실을 수 있게 만들어진 칸이나 비행기 시간표가 뜨는 모니터만으로도 그걸 느끼기에 충분하지만, 주변의 얘기를 엿들으면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남의 얘기를 몰래 듣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남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말하는 것은 들어도 되거나, 혹은 들어주길 바라는 것이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우선, 내 옆에 제복을 입고 앉아있는 두 남자의 얘기에 귀 기울인다. 그들은 비행기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후배가 비행기에 승객이 없으면 쉬엄쉬엄 비행할 수 있으니 좋지 않으냐고 물으니, 선배는 승객이 없으면 사고의 확률이 얼마나 높은지에 대해 설명한다. 후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의 말에 공감하고 선배의 목소리는 더 커진다. 앞에 앉아계신 두 할아버지는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열차에 남아계신다. 손가방 하나도 들지 않은 가벼운 모습이 공항에 갈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어딜 가시는 걸까. 오른쪽 할아버지께서 일방적으로 정치 얘기를 하시고 왼쪽 할아버지는 듣기만 하신다. 말이 많은 할아버지는 몇 번씩 고함을 치며 성을 내시다가 지치셨는지 갑자기 숨을 고르며 말을 멈추신다. 할아버지의 얘기가 끝나자 열차 안이 조용해진다. 그 분위기가 멋쩍으셨는지 누군가 들으라는 듯, 크게 한마디 하신다. “세상에 그렇게 재미있는 일만 생기는 건 아니잖어. 그렇제?”
집에서 슬프거나 따분할 때면 가볼 만한 곳이 공항이다. 비행기를 타러 가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공항을 빨리 싫어하게 되는 지름길이야말로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는 것이다. 그림,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발레를 감상하러 가듯이 공항을 감상하러 가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동물원에 가기』 중
PM 12:10
공항에 있는 식당 대부분은 음식값이 비싸고 맛도 없다. 늘 가는 곳은 4층의 파리바게트. 작년만 해도 이곳에는 다른 카페가 있었다. 나는 그 카페에 앉아 창밖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리모델링을 하면서 한옥 건물이 생겼다.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공항이라 한국 고유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노력은 알겠지만, 솔직히 멋지진 않다. 서까래 아래 ‘PARIS BAGUETTE’라는 글씨는 이리저리 뜯어봐도 어색하다. 그래도 공항 안에서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다. 샌드위치와 커피로 요기하며 창밖을 구경한다. 비행기와 공항을 잇기 위해 아코디언 모양의 입구를 연결하는 모습, 형광 조끼를 입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직원들,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는 거대한 비행기. 그런 모습을 신기하게 여기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닌가 보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아무 말 없이 창밖만 지켜보고 있다. 다양한 나이와 국적의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는데, 이상하게 요즘 들어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다. 아까 열차에서 봤던 두 할아버지도 보인다. 나처럼 그냥 공항에 오신 듯하다.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데도 시끄럽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열차에서 말이 많던 할아버지도 이곳에선 조용히 앞만 보신다.
PM 14:05
이제 본격적으로 마음을 비워내는 일을 시작할 차례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노트와 펜을 꺼낸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나를 슬프게 한 것들을 적어 내린다. ‘뜻대로 풀리지 않았던 일, 오토바이에 묶여 억지로 달리고 있던 강아지, 내가 했던 말 중 가장 형편없던 말, 동생에게 뱉은 쓸데없는 잔소리, 출근길에 합정역에서 마주치는 눈이 먼 젊은 남자, 내 의도와는 다르게 억울하게 꼬였던 사건, 엄마 그리고 아빠.’ 이런 것들을 쓰고 있으면 펜을 여러 번 내려놓아야 한다. 눈을 감기도 하고 밖을 보기도 하면서 꼼꼼히 슬픔을 되짚는다. 눈물이 날 만큼 슬픈 일도 있지만, ‘이런 일을 담아뒀나?’ 하고 웃게 되는 일도 있다. 몇 번 펜을 들었다가 내리면 비어있던 종이에 빼곡히 글씨가 채워진다. 보통은 이렇게 슬픔을 적은 후, 버린다. 꼬깃꼬깃 구겨서 눈에 보이는 휴지통 아무 곳에나 있는 힘껏 던지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공항에 다녀온 후, 또 같은 슬픔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너는 이미 내가 버린 것’이라고 외면할 땐 거짓말처럼 편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계획에 없던 일이 생겼다. 슬슬 일어나려고 기지개를 켜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내가 오기 전부터 뒷자리에 앉아있던 피부가 까만 남자다. 새카만 손가락으로 내 수첩을 짚으며 “What is this?”라고 묻는다. 잠시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 “trash”라고 답한다. 그는 큰 눈을 더 크게 뜬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미국에서 왔다고 한다. 슬픔이 잔뜩 담긴 종이를 찢어서 꾸긴 후, 그의 손에 쥐여준다. 미국에 도착하면 쓰레기통에 세게 던져버려 달라고 부탁하니 아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이내 큰 소리로 손뼉까지 치며 웃는다.
PM 15:25
면세점이 보이는 유리창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시야 아래쪽으로 사람들은 무빙벨트를 타고 분주하게 이동하고 나는 여유롭게 위에서 그것을 구경한다. 유리창 너머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데 그들의 표정이나 행동은 분명하게 보인다. 때마침 한국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행진한다. 외국인, 내국인 모두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본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이곳은 동물원 같다. 유리로 만든 우리에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저 보기만 하러 이곳에 온 구경꾼이다. 투명한 우리 안에는 떠나는 사람,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도 나처럼 평범한 사람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티켓을 살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고 나는 그저 슬픔을 덜어내기 위해 도망쳐온 사람일 뿐이다. 억지로 출장을 오거나 가는 사람도 있겠지, 하며 위로를 해보지만 큰 도움이 안 된다. 누가 봐도 대부분은 여행자다. 그래서인지 여기 앉아있으면 좀 울적해지기도 한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워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슬퍼질 때도 잦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 덕분에 여러 여행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또 다른 여행을 꿈꾸고 있다.
공항에서 출발하는 승객의 70퍼센트가 놀러 간다.
-알랭드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중
여행자들은 곧 여행을 잊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의 대륙을 몇 줄의 문장으로 압축할 것이다.
-알랭드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중
PM 16:20
평소에는 늘 공항 안에 머무르다 집으로 돌아갔는데, 오늘은 비행기가 뜨고 지는 것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하늘정원’에 가려고 한다. 공항에서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 택시를 탔는데 기사 아저씨가 대뜸 “2만원”이라고 말한다. 놀라서 내리려는데, “까짓거 1만원에 가줄게.” 하신다. 지갑을 뒤져보고 “9천원밖에 없어요.”라고 최대한 슬픈 표정으로 말했더니, “그럼 9천원!” 그것도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택시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택시가 선 곳은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다. 아저씨에게 이곳이 하늘정원이 맞느냐고 여러 차례 물었는데, “내비게이션이 이곳이라고 했어”라는 무책임한 말만 남기고 떠나셨다. 두려움을 안고 무작정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전망대와 나무 그네가 보인다. 올라가나 땅에 있나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이 낮은 전망대인데, 올라서자 공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법 제 몫을 하고 있는 녀석을 무시한 것 같아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는데, 눈앞에 비행기가 지나간다. 멀리서 멍하니 지켜볼 때와는 다르게 카메라 셔터를 한 번 누르면 사라질 정도로 빠르다. 입술이 떨리는 추위도 잊고 한참 비행기를 구경한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돌아가는 길이 어딘지 막막해진다. 길로 보이는 곳을 따라 걷고 걸어 겨우 도로를 찾았다. 더 쉽게 가는 방법이 있다는 걸, 먼 거리로 돌아온 뒤에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게 억울하진 않았다. 길을 돌아오면서 본 것들이 있었기에.
PM 20:35
다시 익숙한 동네, 매일 걷는 가로수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비행기를 둘러싼 모습을 구경하고, 스쳐 지나가는 들뜬 사람들을 자세히 뜯어보고, 내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단순한 하루. 그렇게 공항에 다녀오면 하루 동안 어디 먼 곳에 다녀온 착각이 든다. 비록 착각일 지라도 꽤 괜찮은 기분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걷다 보면 언제나 집 앞에 도착해 있다. ‘오늘은 푹 잘 수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현관문을 밀어본다. 서두에서 말했듯, 공항에 다녀오는 일은 누구에게도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쑥스럽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고 거기에서 무엇을 하는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한 사람이 공항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바보처럼 보일 것 같아 싫다고 했더니 사람은 원래 다 바보 같고 특별한 것 없이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어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일은 분명 반대편에 서 있던 이에게도 위안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용기를 내서 나의 일기 일부를 이곳에 옮긴다.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위로의 일이 되길 바라면서.
에디터·포토그래퍼 박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