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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부모에게 들려주는 응원가
‘심리’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의 작용과 의식의 상태’다. 움직이고 흐를 수 밖에 없는 것이 마음이라면 나와 아이의 은밀한 감정을 어떻게 바라보는 게 좋을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윤우상 선생님이 들려주는 따스한 응원가를 여기에 나눈다.
30년 경력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의학 박사.
자연친화적 병원 ‘밝은마음병원’ 대표 원장이면서 매년 수백 명의 관객이 참여하는 심리치유드라마를 기획해 즉석에서 치유 과정을 보여주는 연출자 겸 수련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20년 넘게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해오면서 오랫동안 ‘엄마 심리학 특강’과 ‘정신 건강 분석’ 강연을 하고 있다.
아이와의 관계, 정서를 말하려면, 내가 어떤 유형의 부모인지 알아채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프로이드가 인간의 정신을 세 파트로 나눴는데, 이드, 초자아, 자아가 있어요. 이드가 동물적인 욕망 본능이라면, 초자아는 ‘착해야 한다. 남한테 피해를 입히면 안 된다.’라는 도덕 윤리, ‘너는 이런 사람이 돼야 한다.’는 이상과 자기에 대한 가치관을 담당하는 기능이에요. 동물적인 욕망을 따라가려고 하는 이드와 그것을 못 하게 하고 도덕적으로 살고자 하는 초자아 편에서 선택을 하는 게 자아, ‘에고’가 되는 거예요. 초자아와 이드는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에너지, 생명력이에요. 적절한 게 좋은데 엄마들이 대개 초자아 쪽이 강한 편이에요. 초자아가 너무 강하면 완벽주의 성향이 되거든요. “왜 인사를 안 해? 실수하면 안 돼.” 남한테 조금이라도 안 좋게 보이는 걸 못 견뎌서 아주 강력한 처벌자가 되곤 해요. 제가 볼 때 아이를 키우면서 내 생활을 갖고 내 관계를 쌓으면서 나의 즐거움도 찾는 살짝 이드형 엄마가 건강한 엄마예요. 어느 정도는 이기적이고 나의 욕망에 충실해야지 재미있게 잘 사는 거니까요. 초자아가 강한 엄마는 조금 빈틈을 줄 필요가 있고 이드가 살짝 강한 엄마는 죄책감을 버릴 필요가 있어요. 내가 어느 성향인지 아는 게 필요하죠.
초자아와 이드는 의식적으로 자각되지 않은 무의식의 존재인 거죠?
그렇죠. 그 무의식이 아이들에게 배어 있어요. 돼지갈비를 먹고 밖에 나오면 내 몸에서 그 냄새가 나는 것처럼 엄마의 마음이 아이에게 스며들어 내뿜게 돼요. 엄마가 아이를 귀엽게 봤다면 다른 사람들도 “너 되게 귀엽네.” 할 거예요. 엄마 냄새를 그대로 맡아서 엄마처럼 해주는 거죠. 그런데 엄마가 “쯧쯧, 아이고 형편없어.” 하는 마음이 깔린 채로 아이를 보면 아이가 그 냄새가 풍겨서 다른 사람들도 “너는 왜 애가 그러냐?” 하며 아이를 바라볼 거예요. 엄마가 대접한 대로 아이를 대접한다는 게 핵심이에요. 그리고 부모가 색안경을 끼고 아이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아요. 마음으로는 행복한 아이를 꿈꾸면서 현실은 잘난 아이를 원하는 거죠. 겉으로 “우리 아이는 최고야.”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내 아이는 소심해. 얘는 너무 산만해.’ 하면서 머릿속에 색안경을 끼고 봐요. 소심해서 걱정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할 수 있지만, 그건 아이의 기질이잖아요. 그렇게 태어나 잘 놀고 있는데, ‘큰일 났네. 저걸 어떻게 하지?’ 하면서 아이의 소심함을 고치려고 마음먹고, 스피치 학원이나 태권도에 보내는 게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거예요. 기질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똑같이 학원에 보내더라도 소심한 성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플러스알파라는 긍정성을 주려고 기회를 주는 엄마가 풍기는 냄새는 달라요. 불안과 걱정의 냄새가 안 들어가거든요.
부모를 조정하는 무의식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은데요, 어떻게 자기 성찰을 하면 좋을까요?
아이가 문제인 거 같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 타이밍이에요. 아이에게 부정적인 느낌이 들면 아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잖아요. ‘쟤가 왜 저렇지?’ 하면서요. 그럼 거기에 빠져버려요. 특히 엄마가 아이의 기질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경우 힘들죠. 기질로 힘든 유형을 크게 몇 가지로 분류해 보면, 먼저 부모와 아이의 기질이 비슷한 경우가 있어요. 내가 어릴 때 소심했는데, 아이가 소심한 걸 보면서 ‘나 닮았구나. 그럼 고생할 텐데.’ 엄마의 소심함을 아이에게 투사해서 더 크게 느끼는 거죠. 그래서 바꿔주고 싶어요. 나는 못 바꿨으니까 내 아이라도 바꿔야겠다. 또는 내가 싫어하는 남편 기질을 아이가 갖고 있을 때, 내가 남편은 못 바꿨지만 아이는 남편처럼 크면 안 되니까 바꿔야 되겠다. 그게 투사예요. 또 하나는 부모랑 정반대일 때 힘들어해요. 나는 친구도 많고 적극적인데, 아이는 소심해. 그래서 아이 친구 만들어주려고 열심히 쫓아다녀요. 아니면 내가 너무 순하고 여린데, 아이가 욕구가 많고 기질이 센 거예요. 그럼 엄마가 못 견디죠. 이럴 때 고개를 돌려 아이를 뚫어지게 보는 나를 보는 거예요. ‘내가 왜 아이한테 이런 마음을 가질까? 내가 왜 아이가 산만하다고 걱정하지?’ 내 안에 불안이나 욕망이 있을 거예요. 기준은 아이를 완전체로 보겠다는 마음가짐이에요. 물론 그게 쉽지 않아요. 아이가 소심한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요? 그런데 기준을 알고 있어야 나를 성찰할 수 있어요. ‘아, 내가 걱정할 게 아닌데 엄마로서 어쩔 수 없이 자꾸 걱정이 되는구나.’ 그러면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려고 노력하게 되죠. 그게 어렵다면 아이와 거리감을 두는 훈련을 해야 해요. 남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고민 안 하잖아요. 옆집 아이가 계단을 후다닥 뛰어 올라갈 때 ‘어휴, 쟤 왜 저러지?’ 하고 말지 ‘저 아이에게 뭘 해줘야 할까?’ 고민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둘 다 잘 안된다는 거예요(웃음). 어려워요. 하지만 내 마음과 상태를 알아채고서 한 번이라도 노력하는 부모와 그냥 그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부모랑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내 아이를 바꾸려는 노력 대신에 엄마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거잖아요. 아이를 바꾸려고 하면 아이랑 부모랑 매일 싸움만 나는데, 나를 바꾸려고 하면 내가 성숙해져요. 1도씩만 노력해도 돼요. 아이를 이해하다가, 걱정스러운 마음이 올라오면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면서요. 열에 한 번이라도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괜찮아.’ 말해주어도 훌륭한 거예요. 아이는 알거든요. 엄마가 지금 나한테 잔소리를 하거나 걱정을 하더라도 나를 인정해 주려는 마음이 있다는걸. 그것이 아이의 자발성에도 영향을 미쳐요.
아이의 자발성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것에서 싹트는 거네요.
그렇죠. 아이들은 타고난 기질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조금씩 성장할 거예요. 많은 엄마들이 적극적이고 도전하는 아이들을 바라는데, 적극적인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싸우고 경쟁하는 걸 좋아하는 성향인데, 승리하면 좋지만 세상이 어찌 그럴 수 있나요? 칭찬받다 좌절하고 도움받다 모함 받고 욕먹고, 성공했다 실패하는 롤러코스터가 심하죠. 반면에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는 항상 안정을 찾아내요. 나한테 맞는 정도의 안정을 지키면서 자신의 기질대로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려고 노력하는 거죠. 소심한 아이들은 소심함의 자발성이 있어요. 곰으로 태어났는데 왜 여우 같지 못하냐 그러고 여우한테는 왜 곰 같지 않냐고 바꾸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아이들은 하늘이 준 기질대로 이 세상과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기질은 살아가는 생존 전략인 거죠.
생존 전략이라고 이해하니까 반드시 지켜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이코드라마 창시자 모레노는 자발성을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 적절하게 반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 내렸어요. 인생을 새롭고 재미있고 즐겁게 만드는 능력이요. 익숙한 세상에 살다가 코로나19 같은 세상이 닥치자 어쩔 줄 몰라 하잖아요. 시대의 흐름에 잘 반응하는 능력, 뻔한 세상을 즐겁게 만들 능력이 있다면 사회와 재산에 휘둘리지 않고 내 기준으로 세상과 사회를 조절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안 해본 것,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실패도 겪어봐야죠. 아이가 놀고 싶은 거, 가보고 싶은 곳, 해보고 싶은 거,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게 자발성이거든요. 그걸 다 묶어버리고 아이를 책상에 앉혀서 공부시키는 자발성으로만 몰아넣지 않으면 좋겠어요. 공부도 호기심과 욕망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어 해야죠. 어떤 애들은 다른 것에는 자발적인데, 공부는 내키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런 아이를 네 시간씩 책상 앞에 앉혀놓는다고 공부의 자발성이 생기지는 않을 거예요. 공부를 잘하고 싶은데 오래 앉아 있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습관을 들여주면 힘들어도 참고하겠죠. 자기 주도 학습은 그때 가르쳐줘도 늦지 않아요.
대한민국 엄마는 미안한 엄마라고 했어요. 아이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일에 부딪힐 때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가지곤 하는데요, 미안함을 줄여야 하는 거죠?
죄책감은 모든 엄마들의 필수 덕목이에요. 죄책감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는데, 과도할 때 안 좋죠. 나는 평범한 엄마인데, 다른 엄마들은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는구나. 남들 기준으로 나는 못한다는 데서 죄책감이 생겨요. 나를 들여다보는 성찰을 하다가 죄책감이 깊어지면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왜 내가 죄책감을 갖지?’ 생각해 봐야 해요. 엄마가 죄책감을 가질 때는 잠재의식 속에 ‘내가 지금 이렇게 밖에 못해서 내 아이는 이것밖에 안 돼.’가 깔려 있는 거예요. 아이들이 타고난 대로 사는 게 뭐가 문제라고 엄마들이 죄책감을 갖는 걸까요? 내가 죄책감을 가져서 아이한테 득이 되는 게 있을까요? 하루에 한 번씩 아이한테 “엄마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솔직하게 얘길 한다고 아이가 더 잘 자랄까요? 엄마를 미안하게 만든 게 누구예요? 그 죄책감이 아이에게 가요. ‘나는 멀쩡한데 엄마가 미안하다 그러네. 내가 뭐가 문제가 있구나. 내가 뭘 잘못해서 엄마를 미안하게 만들었구나.’ 생각하는 거예요. 득이 안 될뿐더러 해가 돼요. 엄마들이 좀 더 당당해지면 좋겠어요. 아이를 낳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아플 때 병원 데리고 가고 챙겨주고 신경 쓰잖아요. 거기에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잖아요. 그러면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는 거예요. 당당한 엄마를 보고 아이가 당당해져요. 죄책감이 생긴다면 도리도리하세요. 내 몸과 마음 상태, 가정과 직장의 상황, 이 환경에서 내가 이 정도 하고 있으면 나도 잘하고 있는 거잖아요. 당당한 아이를 원하면서 부모가 죄책감을 가진다면 그 아이는 절대 당당할 수가 없어요.
내 아이를 돌볼 때, 아이의 공부나 생활태도를 세밀하게 코칭하는 ‘좋은 코칭맘’을 기준에 두면 안 된다는 거죠?
FM 성향의 엄마들이 아이 공부나 생활 태도, 독서나 운동을 코칭하거나 아이의 정서를 살폈더니 아이가 실력도 있고 정서도 안정적이라는 이야기들이 육아서나 카페, SNS에 많이 보여요. 그런데 그건 엄마랑 아이 둘 다 계획하고 실천하고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그런 이야기에 너무 쉽게 빠져들더라고요. 공부를 달리기로 바꿔볼까요? ‘내 아이에게 날마다 운동장 두 바퀴를 뛰게 했더니 100미터를 14초에 뛰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해보세요.’ 이거와 똑같아요. 내 아이는 달리기는 못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데 매일 시킨다고 100미터를 14초에 달릴 수 있나요? 그런데 영어나 수학 같은 공부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암기력이나 배우는 지적 능력도 기질 중에 하나예요. 아이큐도 기질이고요. 그게 언제 발현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마치 네다섯 살부터 초등학교 2~3학년 때까지 엄마가 코칭해 줘서 아이한테 공부력을 장착시켜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안타까워요. 인생은 마라톤이잖아요. 자기 속도에 맞춰 뛰면서 물이 필요하다면 물 주고 괜찮냐고 격려해 주면서, 마지막에 달릴 힘을 비축해야지, 초반 6킬로미터 구간에서 불안해하지 않아야 해요. 거기에 욕망이 더해지고 죄책감까지 생기거든요. 또 타임 스케줄부터 체크까지 엄마의 디테일한 손길이 속속들이 미칠수록 아이의 자발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어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엄마의 손길로 빛나던 아이가 중학교 가면 찬란했던 무대에서 사라지곤 해요. 살아남아 명문대를 가더라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공부를 했어.”라며 자기 인생을 못 사는 아이들이 많아 안타까워요.
미취학 아이를 키울 때까지는 ‘정서에 신경 쓰면서 즐겁게 놀면 된다’로 중심을 잡고 있다가 초등학교 가서 흔들린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실컷 놀리다 공부를 하면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못 해서 불안이 확 밀려온다고요. 공부는 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고 자발성이 없다고 내버려 둘 수 없으니 더 애를 쓰게 되는 거 같아요.
공부는 엄마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돼요. 기본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이한테 “수학이나 영어는 기본으로 해야 할 것 같아. 엄마가 이건 양보 못 해.” 하고 시키고, 안 시켜도 마음이 편하면 내버려 둬도 돼요. 가끔 아주 혁명적으로 “나는 우리 아이 공부 안 시킬 거야.” 하면서 마음 편한 부모도 있지만, 그건 일반적이지 않고, 쉽지도 않잖아요. 공부 안 시키고 엄마가 계속 불안하다면 좋은 게 아니에요. 엄마 마음이 편한 게 우선이에요. 대신 엄마의 욕망으로 아이를 괴롭히는 게 아닌지만 잘 살피면 돼요. 엄마의 불안과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 성찰해 보세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엄마의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으면 됩니다. 공부를 시켜봤는데, 아이가 생각보다 못 할 수 있어요. 화도 나고 성에 안 차겠지만 ‘그게 내 아이의 모습이야.’라고 쿨하게 인정하고 다시 있는 그대로 내 아이를 만나면 돼요. 그게 엄마력이에요. 어느 아이가 공부를 못하고 싶겠어요? 엄마는 아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렇지, 최선을 다하면 공부를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역설적으로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도 아이의 최선이에요. 공부에 자발성이 안 올라오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거죠. 그때 아이랑 이야기해서 안 하겠다고 하면, 아이 수준에 맞추면서 최소한의 것을 정해주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걸 통해 자발성이 생기게 도와주세요. 어릴 때부터 새로운 상황에서 재미를 창조하는 능력을 조금씩 키워왔다면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잘 살아갈 거예요. 반대로 공부에 자발성이 있는 아이들은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면서 하나씩 더 해보자고 이야기해 보고, 부딪히다 힘들어하면 좀 빼주면 되죠. 어릴 때는 공부 잘하는 게 눈에 많이 띄고, 아이가 재미를 창조하면서 즐겁게 노는 건 점 같아서 잘 보이지 않아요. 공부는 선을 그리는 거거든요. 성적이 올라가는 게 그래프로 보이죠. 그런데 공부는 평생 선이에요. 서울대라는 최고의 선을 그렸으면 그다음은 뭐예요? 멈추거나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보이지 않게 찍어온 점은 사회에 나가서 연결이 되어 면이 되고 도형이 되고 3차 공간으로 가는 거죠. 그렇다고 지금 선을 긋지 않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점을 찍는 아이들을 기다려주기란 쉽지 않아요. 그럴 때는 ‘최소한 이건 해야 돼.’를 정해주세요. 최소한 할 건 하면서 가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밀어주기만 해도 아이는 느껴요. ‘아, 우리 부모는 나의 이런 점은 인정해 줘. 하지만 이런 상황 때문에 이런 건 못 해주는구나.’와 ‘우리 부모는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못 하게 해.’는 정말 다르죠.
아이의 인생에서 부모가 좋은 것만 줄 수 없고, 틈이 있으면 다른 만남으로 스스로 채워갈 거라고 하셨어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현재의 육아에 몰입해서 놓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는 심리학이 너무 깊게 자녀 교육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요. 2000년 전후부터 사회가 ‘아이가 어릴 때 부모가 어떻게 해야 아이가 건강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당연시 여기는 거 같아요. 부모가 야단치면 아이 정서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고, 상처 있는 부모가 자기 치유를 안 하면 아이한테 상처가 대물림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렇다면 부모가 ABC를 넣으면 아이가 ABC의 대인관계 능력, 사회성이 생기는 걸까요? 상처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얼굴이 동그란 엄마, 턱이 네모난 아빠, 키 큰 엄마, 통통한 아빠가 있듯이 욱하는 엄마, 내성적인 아빠, 상처 있는 엄마가 있어요. 다 자기 컬러잖아요. 상처도 그중 하나예요. 아이들은 고유한 부모를 만난 거예요. 부모가 상처가 있다고, 아이가 똑같은 상처를 받을까요? 그렇게 단정 짓지 마세요. 부모의 상처를 통해서 아이는 상처도 고스란히 인정하는 아이,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될 수 있죠. 자기 치유 능력이 생겨 다른 사람을 공감해 주고 보듬어주는 더 큰 사람이 될지도 몰라요. 반대로 부모가 아무 상처도 없으면 아이는 상처받은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어려울 수도 있어요. 상처 하나 안 주고 말끔하고 깨끗하게 아이 키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요. 상처를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요. 상처는 부모의 삶의 역경이고 역사예요. 그 역사 속에서 아이가 태어난 건데, 부모가 죄책감 가지면 어떻게 해요? “엄마는 이런 상처를 가졌지만 너의 최고의 엄마야.” 당당해지면 아이는 엄마의 상처까지도 존중할 거예요. 무의식으로 ‘내 상처 때문에 네가 이렇다. 미안하다.’는 걸 주입하면 아이가 나중에 뜻대로 잘 안되는 일이 생기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엄마 때문에 나 이렇게밖에 안 된 거잖아.”
상처도 내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인 거네요. 내 상처에 당당하다 하더라도 아이에게 화를 내고 싶진 않아요. 화를 현명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화를 내고 나서 죄책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지만 ‘나 때문에 아이가 이상하게 될 것이다.’라는 심리학이 들어가면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빨리 빠져나와야 해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화내고 욕하고 자기감정을 폭발하는 학대 엄마가 아닌 이상, 열받는 순간 화내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현명하게 화를 다루려면 일단 화내는 순간도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아이에게 말해주세요. “엄마가 화 안 내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되네. 욱하는 성격이라 그런 거니까 너무 상처받지 않으면 좋겠어.” 물론 굳이 이야기 안 해도 아이들은 알고 있겠지만요. 그러면서 화를 덜 내려고 노력하면 되죠. 자기 성찰 없이 ‘앞으로도 아이에게 계속 화를 내겠다.’가 아니라면 내가 욱한 거 때문에 아이가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영향을 받을까 불안해하지 마세요. 엄마의 강한 감정을 받아내면서 아이도 감정의 맷집도 생기려니 생각하세요. 부모가 화 한 번 안 내며 키웠는데, 바깥에 나가서 누가 악을 쓰고 화내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상처가 되겠어요. 학교에서 누가 큰 소리 내고 화내면 “쟤 또 화내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맷집이 생길 거예요. 엄마라는 세상에 적응하면서 또 다른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훈련을 하는 거라 생각하세요. 아이는 자신의 생존력과 자발성으로 살아갈 거예요. 그게 엄마와 아이의 색깔이 서로 물들어 가는 거예요.
부모들은 아이가 맺는 관계에도 관심이 많은데요. 요즘 관계를 쌓아갈 만남이 제한적이다 보니,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많아졌다고 해요. 부모로서 어떻게 말해주면 좋을까요?
그냥 아이랑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세요. 맞장구쳐주고 공감해 주고 엄마는 이럴 거 같아, 하는 의견 제시하면 돼요. 그것 말고는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아이의 친구 문제나 감정 다루는 문제까지 엄마가 해결해 줘야 한다는 건 너무 과도한 책임이지요. “이랬니? 저랬니?” 하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꼬치꼬치 묻지 말고,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 하고 평가 비판하지 말고, “너는 이렇게 해야 해.” 하면서 아이를 바꾸려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 도움 준다는 게 오히려 잔소리가 되는 경우가 많은 거죠. 그냥 자연스럽게 별생각 없이 친구처럼 대화하면 돼요. 궁금한 거 물어보고 엄마 의견 얘기하면 돼요. 그 과정을 통해 아이가 ‘나대로 괜찮다.’ 하면서 자기만의 답을 찾을 거예요. 아이를 ‘이렇게 가르쳐야지’ ‘저렇게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 내려놓고 즐겁게 친구처럼 만나세요. 그러면 부모랑 대화하는 게 즐거우니까 다시 또 속상하면 부모를 찾을 거고요.
육아의 본질은 답이 없고 예측할 수 없다는 점 같아요. 끊임없이 나 한 번, 아이 한 번 보면서 맞추며 걸어야 하는 거네요.
맞아요. 아이들에게 정답을 해줘야 될 것 같고 시행착오를 줄이게 해주고 싶은 마음과 싸우는 거죠. 그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대개 부모의 액션만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 이론대로라면 아이는 리액션이 없는 존재예요. 내가 A를 넣으면 아이는 A가 돼버리고, 내가 B 그러면 아이는 B가 되지 않잖아요. 내가 A 그래도 아이는 1, 2, 3, 4, 5가 될 수도 있고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거든요. 아이의 생명력이 있으니까요. 자발력의 맷집이 있고요. 머리로는 그걸 이해하더라도 부모가 매번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건 힘들어요. 특히 그 장애물은 공부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아이에게 잔소리하고, 딴짓을 허용하지 못할 때, 부모가 화내는 90%가 거의 공부예요. 내가 너무 놀게 해줬네 싶으면 “공부할 때는 이거 나중에 하고 해.” 조금 혼도 내고, 내가 좀 강압적이었나 싶으면 조금 더 풀어주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나답게 육아하면 아이는 자기 기질대로 알아서 자라요. 액션 리액션의 케미 속에서 독특한 엄마 아빠와 아이의 관계가 만들어지고, 또 다른 개성 있는 아이가 탄생하는 거죠.
그렇게 일관적이지 않아도 되나요? 저는 육아하면서 가장 힘든 말이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거였거든요.
일관성은 불가능해요. 육아는 삶 자체예요. 삶이 일관성이 있던가요? 예측할 수 없는 삶에서 일관성을 갖추려고 하지 말고 나답게 아이랑 즐겁게 놀고 구박도 하고 야단도 치고, 너무 심했나 반성도 하면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면 돼요. 나 이만하면 멋진 엄마야, 자부심도 좀 가지다가 그게 흔들리면 다시 불안한 마음을 살펴보고, 다시 나도 괜찮은 엄마라고 죄책감에서 빠져나오는 거, 그 과정을 걸으면 돼요.
왜 그렇게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요? 일관성 없는 삶에서 한결같이 아이를 대하는 건 당연히 힘든 건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지금의 부모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먼저, 내가 아이를 낳고 신경 쓰고 예뻐하고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죄책감 가지면서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걸 알아차리세요. 나보다 더 내 아이를 잘 돌볼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요. 없으니까 나는 내 아이의 최고의 엄마, 나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당당해도 돼요. 항상 흔들리지만, 기본은 그렇게 깔면 돼요. 둘째로, 내 아이는 괜찮아요. 지금 모습 그대로 충분하니까 아이의 자발성과 생명력을 믿어주세요. 나는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많은 경험을 주는 부모예요. 하고 싶은 걸 하게 하면서 응원하고 지지하고 격려하고, 실패를 겪으면 같이 옆에 있어주고 아파하고 끊임없이 기회를 주는 부모. 그러니 엄마도 아빠도 아이도 괜찮다 마음먹고 육아라는 터널을 조금 더 즐겼으면 좋겠어요.

글 윤우상 | 심플라이프

글 윤우상 | 심플라이프
에디터 김현지
일러스트레이터 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