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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빙수의 전설》 이지은 작가
©이지은
한국과 영국에서 디자인과 그림을 공부했어요. 쓰고 그린 책으로는 《종이 아빠》, 《할머니 엄마》, 《빨간 열매》가 있습니다.
작업을 집에서 하시네요. 일과 휴식을 나눠서 생활하는 편인가요?
네. 대체로 6~8시 사이에 기상해요. 오전 시간에 하는 저만의 계율을 지킨 다음에 10~11시쯤 작업을 시작해요. 오후 7시 정도에 마무리하고요. 마감할 양이 많을 땐 11~12시까지도 작업하지만 늦은 시간까지 작업하는 일은 없도록 하고 있어요. 회사 다니는 남편 덕에 낮에 일, 주말엔 휴식, 이런 패턴을 익히게 됐어요. 처음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적응하니 편하고 좋네요. 키우는 개가 실외 배변을 해서 하루에 최소 두 번은 꼭 산책을 나가야 해요. 사는 곳이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산책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팥빙수의 전설》은 올여름 가장 많이 찾은 책이 아닐까 싶어요. 덕분에 이렇게 인터뷰도 하게 되어 기뻐요.
독자들과의 만남도 종종 가진 걸로 아는데,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요?
소식 듣고 너무 기뻤어요. 리뷰에서 기억에 남는 게 있는데요. 《팥빙수의 전설》의 모티브로 《팥죽 할멈과 호랑이》, 《해님 달님》, 《꼬마 깜둥이 삼보》, 《빨간 모자 소녀》 등이 언급되더라고요. 사실 저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대사를 ‘어떤 전래동화의 호랑이가 할머니인지 엄마한테 했던 말인데.’ 정도로만 알고 작업했어요. 나중에 출판사 코멘트에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팥죽 할멈과 호랑이》 이야기가 있길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이구나 생각했는데, 독자들이 모두 그렇게 느끼는 걸 보고 ‘오, 신기하다.’ 생각했어요. 제 몸 안에 돌아다니던 이야기가 쏙쏙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그런데 아마 이런 이야기들을 다 완벽하게 알았더라면 《팥빙수의 전설》은 나오지 못했을 거 같아요. 저도 선입견이 센 편이라 완성된 책을 과감히 뒤틀지 못했을 거예요.
《종이 아빠》, 《빨간 열매》, 《팥빙수의 전설》, 책마다 발랄한 상상력이 담겨 있어요.
발랄한 상상력이라고 봐주셔서 감사해요. 책을 낼 때마다 ‘슬펐다.’라는 리뷰가 달려서 ‘이번엔 웃기는 책!’이라는 각오로 《팥빙수의 전설》을 작업했거든요. 그런데도 ‘슬펐어요.’라는 리뷰를 봤어요. 뭔가 슬픈 운명의 수레바퀴 위에 있는 기분이 들어요(웃음).
평소 이것저것 생각이 많을 거 같아요.
얼마 전까지 ‘나는 멍 때리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제 머릿속을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잡다한 시그널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더라고요. 백색소음의 계곡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의미 없는 영상 조각들, 지나간 감정, 기억 등등 통제 없이 제 머릿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속도가 빨라서 알 수 없을 정도예요. 그래서 멍 때린다는 착각을 한 거 같아요. 아마도 이런 소음들이 들락거리다 ‘뿌직’ 하고 가끔 쓸 만한 걸 떨어뜨리는 게 아닐까 추측을 해봐요.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소음을 청소해보려고 해요. 머릿속도 미니멀하게요.
오랜 시간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게 된 거죠?
그림책을 만들게 된 건 시기별로 두 번의 계기가 있었어요. 처음은 남편과 연애 경험이었어요. 정서적으로 사막 같던 시기에 물 같은 남편을 만나서 급수됐어요. 이 시기에 건강한 욕구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내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였고, 그게 그림책이었어요. 당시 박연철 작가님이 ‘더북’이라는 그림책 공부 모임을 주관하셨고, 그곳에서 그림책 서사에 대한 공부를 차근차근 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사막 정서에 기술 공부를 하던 시기라 첫 책은 공대생처럼 만들었어요(웃음).
박사님의 마음으로 나사 하나하나 조이면서 작업하다 보니, 20페이지 남짓의 《종이 아빠》 원고를 만드는 데 4년이 걸렸어요. 《종이 아빠》를 통해 내 이야기를 쓰는 기술을 배웠지만 정말 내 이야기라는 기분이 들진 않더라고요. 그러다 인생의 큰 파도가 휘몰아쳤어요. 파도가 지나가고 상황이나 감정들을 처리하면서 동물을 그리게 되었어요. 동물들은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책 작가로도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줬어요. 그때가 두 번째 계기 같아요. 그리고 그 길엔 그림책 작가들이 말하는 ‘영감님’도 있더라고요. 신비로운 경험이었어요. 아마 지금부터는 박사님 모드와 ‘영감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드를 적절히 쓰면서 뚜벅뚜벅 걷듯이 작업하지 않을까 싶어요.
실제로 반려견과 함께 살잖아요. 《팥빙수의 전설》은 호랑이, 《빨간 열매》는 미국 흑곰이 소재고요. 동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동물은 저를 위로해주는 스승 같은 존재예요. 어린 시절부터 동물을 좋아했어요. 쉽게 접할 수 있는 동물이 개라서 개를 많이 좋아했고,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동물 전체로 확장됐어요. 지금 함께 지내는 개 ‘쿵이’는 《팥빙수의 전설》 속 눈호랑이의 롤모델인데요, 제가 봐온 동물들은 후회와 회한, 미래의 걱정으로 살지 않아요. 자기 삶을 수용해요. 닥친 현실을 그냥 걸어가요. 인간도 동물인데 왜 그렇게 많은 상심을 끌어안고 사는 걸까 생각해요. 동물들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는 조용히 저를 돌아보게 해요.
©이지은
《팥빙수의 전설》은 호랑이, 《빨간 열매》는 미국 흑곰이 소재인데요. 동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우리가 지겨울 만큼 봐온 할머니의 희생이나 외로움, 가난함 같은 사연을 배제하고 “이거나 먹어.” “그러든지.”라고 말하는 할머니라서요. 뻔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을 두 캐릭터가 균형을 맞춰준 거 같아요.
《팥빙수의 전설》은 개인적으로 제 안의 여성 역할에 대한 편견을 깬 작업이기도 했어요. 《할머니 엄마》의 여성은 사회가 요구하는 어머니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평소 양성평등에 대한 고민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작업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관습적 캐릭터를 만들고 있더라고요. 《팥빙수의 전설》 초반 더미는 지금보다 더 정적이고 전형적인 정서가 있었어요. 할머니가 손녀 꽃신을 사주려고 장에 가는 길에 호랑이를 맞닥뜨리고, 힘들게 상황을 이겨내 손녀에게 팥빙수를 가져다준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뭔가 계속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귀엽고 뽀얀 할머니 캐릭터를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내가 왜 이런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할머니를 재창조했어요. 그리고 까만 얼굴과 짙은 눈썹의 강단진 노인 여성이 눈앞에 그려졌어요. 숯검댕이 까만 할머니가 튀어나온 날 두근두근 저 혼자 신났던 밤이 떠올라요. 이렇게 노트 위로 튀어나온 할머니는 《팥빙수의 전설》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할머니의 세상을 잘 만들어주었어요. 어린 엄마, 아빠, 그의 말썽꾸러기 손주 1, 2, 3호를 키워낸 할머니 말씀이 생각나요. “내가 다시 젊어지면 난 절대로 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을 거야. 저기 시골 가서 혼자 신나게 살 거야!” 할머니가 원한 그 세상 제가 만들어봤어요(웃음).
전래동화 속 호랑이를 우리는 저마다 상상 속 캐릭터로 바꿔본 경험이 있는데요, 이렇게 뻔뻔하고 사랑스러울 수 있는 건가요? 발톱으로 수박 씨 빼는 장면이 특히 최고였어요(웃음).
할머니 성격을 바꿔 놨더니 호랑이는 알아서 자기 롤을 찾아갔어요. ‘호랑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며 작업했는데, 아마 10대 때부터 주성치 영화를 좋아하고 B급 영화나 만화를 좋아하던 제 정서가 나온 거 같아요. 처음엔 너무 B급인가 걱정도 했어요. 저도 그림책에 대한 편견이 있었나 봐요. 책 안에서 독자들이 웃음 포인트로 생각하는 부분이 다 달라서 재미있어요. 사실 호랑이 리액션을 이렇게 재미있어할 줄 몰랐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궁금해요.
마지막 즈음 할머니가 큰 태양이 이글거리는 해를 보며 장터로 향하는 뒷모습이 나오는 장면이요. “어쩌긴 뭘 어째. 이쁜 그릇에 담아 장에 내다 팔아야지.” 이 대사는 요즘 제가 가지려는 삶의 태도를 보여줘요. 아마 할머니는 장터에서 팥빙수가 안 팔렸어도 맛있는 거 사 먹고 친구도 만나서 호랑이 얘기도 하고 막걸리도 드시고 “에이 오늘 재수 없는 날이었어.“라고 툭툭 털고 집에 왔을 거예요. 조그만 할머니가 엉망이 된 하루를 봇짐에 지고 걱정은커녕 “장터 가면 맛있는 거 먹을 거야.”라고 걸어가는 모습이 느껴져서 좋아요.
©이지은
작가님이 쓰고 그린 책들 《할머니 엄마》, 《종이 아빠》, 《빨간 열매》는 가족과 맞닿아 있어요. 가족, 그 안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고 느꼈어요.
맞아요. 저는 내적 관심이 큰 사람이에요. 나라는 사람을 연구하다 보니 양육 환경을 깊이 돌아보는 일은 필연적이었어요. 《할머니 엄마》와 《종이 아빠》가 그런 맥락에서 나온 작업이었고, 《빨간 열매》부터는 본격적인 ‘나’의 이야기 아니었나 싶어요. 《빨간 열매》는 언뜻 가족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아기 곰을 받아준 큰 곰은 가족만 상징하는 건 아니거든요. 아기 곰의 자존감일 수도 있고, 사회적 제도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고요.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슬쩍 얘기하고 싶었던 작업이었어요. 《팥빙수의 전설》은 제가 살고자 하는 태도를 좀더 명확하게 보여준 책이고요. 앞으로 나올 책들도 아마 그런 내적인 발견이 녹아 있는 작업이 될 것 같아요.
가족 이야기를 그리다 보면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이 이입될 거 같은데요. 가장 감정이입을 많이 한 책이 있다면요?
《할머니 엄마》요. 할머니 손에 자라서 할머니가 엄마였어요. 90세인 할머니가 제 옆에 계실 때 꼭 할머니 책을 내서 선물로 드리고 싶었어요. 할머니의 젊은 시절과 어린 지은이를 떠올리며 작업하느라 종종 울며 만들었어요. 《할머니 엄마》는 뮤지컬로 만들어져서 할머니랑 같이 보러 갔어요. 지금은 그런 힘든 외출은 못 하세요. 조금이라도 일찍 만들어서 다행이에요. 얼마 전 할머니 머리카락 손질해드리러 들렀다 이젠 염색도 안 하는 하얀 머리를 보고 울컥해서 “할머니 늙으니까 기분이 어때? 늙는 건 슬픈 거 같아.”라고 말했더니 “늙는 건 당연한 거야. 죽는 것도 당연한 거야. 슬플 거 없어.”라고 하셨어요. 90세인 할머니가 늙음에 초연한 것도 당연하고 좀 덜 늙은 제가 늙음을 슬퍼하는 것도 당연한데 당연한 걸 자꾸 잊어요.
그림책을 쓰고 만들고 나누면서, 바람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그림책이 아이들만 보는 책, 유치한 책이라는 강하고 오래된 고정관념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자와 분리되는 유일한 장르 같아요. 얼마 전 대학에서 1학년 수업을 맡은 적이 있는데 수업 전에 30분 내외로 그림책 소개를 했어요. 처음엔 시큰둥하고 갸우뚱하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반응이 뜨거워졌어요. 성인들이 그림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다며 강조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직접 그림책을 만들어 오는 학생도 있었어요. 나중엔 서로 좋아하는 그림책을 공유하고 자발적으로 발표도 했어요. 나이가 들수록 그림책이 좋아진다는 게,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 이별하고 있다 만나게 되는 반가움에 생긴 착시 현상 아닐까 싶어요. 그림책이 하나의 문학 장르로 인식돼서 독자들과 공백기를 거치지 않길 바라요.
《팥빙수의 전설》 할머니 근황 인터뷰
눈호랑이를 만나 팥빙수의 전설이 된 할머니. 산골에 찾아가 나눈 대화를 소개해요.
에디터 김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