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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아
오래 기억할 이야기
20킬로그램의 삶
‘커다란 여행용 가방 안에 담을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채워 넣었다가 덜어내고 다시 채워 넣길 반복하며 가지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싶다.
나무로 만든 책상, 의자가 하나씩 있다. 집이 좁아 부엌과 거실의 구분이 거의 없고, 책상 위에서 밥을 먹고 일도 한다. 좁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침대가 있다. 비스듬한 다락의 벽엔 좋아하는 사진 한 장만이 무심하게 붙어 있다. 주변은 숲이라 풀이 움직이거나, 동물이 지나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곳으로 이사 올 때, 고양이 두 마리가 함께 오긴 했지만, 그들이 집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리저리 쏘다니다 편히 자고 싶거나 배가 고플 때만 돌아온다. 쥐도, 새도, 다람쥐도 스스럼없이 오는 통에 가끔 식량 상자에 구멍이 난다. 집 뒤편의 지붕 아래엔 책이 너저분하게 쌓여있다. 침대가 있는 다락에도 몇 권 있지만, 밖의 책을 모두 다락으로 옮기면 그 무게에 집이 무너질지도 모르니 처마 밑에 쌓아둔다.
가끔 손님이 온다. 여럿이 몰려오면 구석에 구겨둔 텐트를 꺼내서 앞마당에 친다. 한 사람씩 오는 날엔 비좁은 다락에서 살을 비비며 잔다. 무더운 여름에는 책을 쌓아둔 처마 앞의 고른 땅이 침대로 변하면 좋겠다. 두툼한 천을 깔고 그 위에 누워서 하늘을 보다 잔다. 요리하기 전엔 가꾸는 텃밭에 나가 먹을 것을 골라오고, 거기에 없는 게 먹고 싶으면 한 시간쯤 걸어나가 시장에 간다. 장바구니를 들고 아이스크림을 빨며 천천히 돌아오다 친구네 집에 들리곤 한다. 양 많은 과일을 몇 개 나눠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수다를 떨다가 그 집에서 그대로 잠들 때도 적지 않다. 보고 싶다 말해주는 사람도 있고, 어쩌다 소리 없이 오는 사람도 있고, 서툴고 어색한 사람도 서슴없고, 상처가 많은 변태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못 돼 먹었지만 순수한 이도 어쩌다 찾게 되는 그런 곳이다. 이건 자면서 걸으면서 꾸는 꿈에 대한 이야기다.
열아홉부터 내 꿈은 ‘작은 집에서, 넓은 사람과, 깊은 마음으로’였다. 수능을 앞두고 꿈이 무엇이냐 묻는 어른들에게 쉽게 답을 주지 못했고, 그때마다 혼자 상상을 했다. 그렇게 그렸던 풍경들을 눌러 담아 한 문장으로 만들어낸 것이 ‘작은 집에서, 넓은 사람과, 깊은 마음으로’였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꿈이다. 앞서 쓴 이야기는 언젠가 그 꿈의 일부인 ‘작은 집’에 걸맞은 사진을 발견하고 쓴 일기다. 이 일기는 가끔 수정한다. 상상하다 보면 조금씩 변하는 모습이 있다. 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간다.’였는데 최근에 자전거 사고가 난 후로는 ‘걸어서’로 바뀌었다.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쉽지 않은 꿈이란 건 알고 있다. 저런 오두막을 지을 만한 숲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런 땅과 집을 지을 돈을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상처럼 여름밤에 처마 밑에 이불을 펴고 누우면 산 모기들이 잔뜩 달려들겠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주변에 사는 친구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뤄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 꾸는 꿈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넓은 사람’과 ‘깊은 마음’에 대한 상상도 조금씩 키워나가곤 한다. 어떤 마음을 가진 할머니가 되어 있는 내 모습, 넓은 침대를 샀을 때 그 옆에 같이 누워있는 선한 사람. 그런 것들을 그리다 보면 오늘 해야 할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다른 나라에서 1년을 머무른 적이 있다. 그때 짐을 싼 커다란 여행 가방은 ‘작은 집’에 대한 상상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줬다. 한국에서 짐을 쌀 때, 며칠 간 여행 가방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필요한 것은 꼭 넣되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20킬로그램의 무게를 넘겨선 안 되었다. 짐을 싸고 푸르기를 반복하며 겨우 20킬로그램을 맞췄을 때의 쾌감이란.
다른 나라에서 도착한 후로도 짐과의 씨름은 계속 되었다. 이사가 잦았고 그때마다 트렁크를 들고 버스나 기차를 타야 했다. 짐을 쌀 때, 가방 밖으로 넘치는 것은 말 그대로 ‘짐’이 되었다. 팔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몇 번을 반복한 후에는 물건을 잘 사지 않게 되었다. 좋거나 아름다운 것을 보더라도 그저 보고 기뻐하는 선에서 그쳤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은 것은 아니고 자연스레 고민 끝엔 사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사 전날, 커다란 캐리어에 가진 것을 전부 넣고 어렵지 않게 자크를 잠그는 날엔 묘한 쾌감이 있었다. 내가 가진 것이 모두 든 가방의 손잡이를 들어 올리던 손의 감각이 여전히 생생하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그 가방을 들어 올리던 손의 감각을 종종 떠올리게 된다. 그땐 방 하나가 나의 ‘집’이라 적당히 채우는 게 쉬웠는데, 방이 두 개 있는 아파트에 사는 지금은 쉽지 않다. 혼자 사는 것도 아니어서 온전히 내 마음대로 살 수도 없다. 하지만 침실만큼은 그 마음으로 꾸리고 있다. 매트리스, 스탠드, 피아노 외에는 아무것도 놓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작은 집’을 꾸릴 연습을 해나간다. 언젠가 지금 가진 옷도 거의 다 버리고 싶다. 계절별로 세 벌 정도씩만 옷이 있으면 좋겠고, 신발도 몇 켤레 없었으면 좋겠다. 몇 안 되는 가구나 물건을 무척 아끼며 오래 쓰고 싶다. 이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면 가난하게 살고 싶은 것이냐고 묻는데, 그것과는 무관하다. 오래 좋아할 수 있는 것 중엔 그에 대한 값을 지급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손이 두툼한 목수가 만든 나무 책상과 의자, 오래 누워도 허리가 편안한 침대, 수십 년을 입어도 가치가 변하지 않을 고운 옷…. 사고 버리기를 반복하며 머지않은 내일엔 그런 것만 남기고 싶다.이런 걸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려놓았다기보다는 꿈이라서 그렇다. 걷거나 자면서 꾸는 꿈이라, 상상하며 히죽거리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쯤에서 그만하고 다른 이의 꿈을 묻고 싶다. 얼마 전, 여동생은 서른이 되기 전까지 1억을 모으고 싶다고 했다. 한 친구는 누구보다 살림을 잘하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꼬리를 물고 질문을 하다 보면, 눈을 허공 어딘가에 멍하니 던져 놓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요즘 세상에 꿈이 어딨느냐.”라고 미간을 찌푸리던 이도 자꾸 묻다 보면, 슬쩍 숨겨뒀던 얘기를 꺼낸다. 그 역시도 미간의 힘을 풀고 눈동자를 엄한 곳에 두고 웃고 있다.
에디터·포토그래퍼 박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