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의 발명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기술

필름의 발명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기술

잡스가 마지막으로 연단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그가 더 이상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매킨토시부터 시작해 아이팟과 아이폰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우리가 발표한 모든 제품은 늘 세상을 변화시켜왔습니다. 아이팟은 음악 시장을, 그리고 아이폰은 우리의 거의 모든 생활을 변화시켜놓았습니다. 이미 우리는 불가능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입니다. 아니면 아이폰에 면도기 기능이라도 추가해볼까요?”프레젠테이션 화면은 아이폰으로 면도하는 남자의 사진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큰 웃음으로 호응했다. 미국의 연설에선 관중들이 조금 과하게 웃어주는 경향이 있음을 미리 알아두어야만 한다.

“여기 아이폰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사진을 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진이 이 앨범 속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앨범 속의 사진을 넘겨 보던 우리는 엔지니어로서는 하기 힘든, 약간은 문학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딘가 허전하다….’ 머리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잡스는 정색하듯 말했고, 열정적인 소비자들은 다시 한 번 크게 웃어주었다.

“아이폰은 마치 마술사의 중절모와 같습니다. 마술사는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고 토끼를 꺼내고 그다음엔 미친 듯이 리본을 꺼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이폰을 통해 원하는 것을 모두 꺼내 올 수 있습니다. 사진도 찍고, 음악도 듣고,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우리 집 현관문도 열 수 있습니다. 마술사의 모자는 신기하긴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둘기와 토끼는 마술사의 중절모 속으로 다시 사라지기도 합니다. 커다랗고 뽀송뽀송하고 푸드득거리는 것들이 어떻게 그 속에서 섞여 있을 수 있는지 너무나 궁금하지만, 마술사의 모자는 힌트를 주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요?

이쯤 되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비둘기와 토끼가 과연 실재하는 것이긴 할까요? 우리의 유능 한 엔지니어들이 느낀 ‘허전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진은 분명 핸드폰 안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실체를 만진 적이 없습니다. 사진은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쉽게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진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변치 않습니다. 언제 봐도 똑같은 모습은 조금도 각별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봐도 똑같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폰에 저장된 우리의 존재는 빈 곳처럼 허전합니다. 우리는 이 참을 수 없는 허전함에 맞서, 좀 더 소중한 존재를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잡스는 이전에 했던 것처럼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하나 꺼냈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작고 동그란 물건이었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툭, 내뱉듯 말했다.

“필름을 소개합니다.”

열광적인 관중들은 폭발적인 환호와 함께 끊임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때문에 잡스는 몇 번을 쉬어가며 이야기해야만 했다.

“우리는 앞으로 사진을 이 작은 매체에 저장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수로 잘못 찍은 사진도, 예상치 못하게 아름답게 찍힌 사진도 모두 이 필름에 담기게 될 것입니다. 사진은 인쇄된 실체로 명확하게 존재할 것입니다. 마구 찍고 보정하고 삭제하던 이전의 헤픈 방식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앞으로 사진을 저장하는 곳은 아이폰이 아니라 여러분의 서랍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중한 사진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조금 더 소중해진 것 같습니까?”

잡스는 검은 장치에 필름을 넣어 보였다. 꽤 번거로워 보이긴 했지만, 복잡한 무언가를 만지는 손동작이 의사선생님처럼 멋있어 보였다. 촬영 준비를 마친 잡스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 검은 장치를 한쪽 눈에 갖다 댔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객석은 조용해지고, 사람들은 이 어색함을 이겨내기 위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었다. 촬영에 지나치게 몰입한 잡스의 입 모양이 삐뚤어지고 있었다. 곧이어 경박한 셔터음이 울리고, 동시에 사람들은 어색함의 종결을 반기는 커다란 박수갈채를 보내주었다.

사실 이전부터 사람들은 기계에 대해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에는 기계가 우리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성 인식 기능을 통해 언어로 대화하고 터치스크린을 통해 촉감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는데도 그 허전함은 조금도 메워지지 않았다. 필름에는 액정도, 색상 보정도 없다. 사진을 찍고 나서 그것이 잘 나온 건지 아닌지 확인해볼 방법도 없다. 허전함을 메우는 방법은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덜어내는 것에 있음을, 그들은 깨닫게 된 것이다. 잡스는 새로운 시대의 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무대를 내려왔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기술입니다.” 

사람의 기억은 먼 곳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돌돌 말려있다. 일종의 기억 저장 매체인 필름도 기억의 모습처럼 돌돌 말린 형상을 하고 있다. 마술사의 중절모처럼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알 수 없던 이전과는 달리, 필름은 그 작동원리가 조금은 이해가 가도록 만들어졌다. 기계가 인간을 이해하길 바란다면 인간도 기계를 조금은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이후로도 애플은 아이폰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하나씩 떼어내어 실체의 모습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제품들은 모두 필름과 같이 인간의 의식과 유사한 작동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필름에 이어 출시된 ‘책’이라는 이름의 텍스트 저장 매체는 여러 페이지의 두꺼운 종이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한 페이지를 넘기면 이전 페이지가 기억에서 지워져 버리는 인간의 순백함을 그대로 구현해낸 디자인이라고 한다. ‘내가 읽은 글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이전에 핸드폰으로 글을 읽고 나면 알 수 없는 허전함만이 남았다. 하지만 이제 책을 다 읽고 나면 책과 함께 뒹군 시간의 실체가 낡고 너덜너덜해진 페이지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열쇠’라고 불리는 도어 잠금 장치 역시 애플이 실체화한 장치 중 하나다. 아무리 크고 단단한 문이라도 이 작은 도형 하나만 있으면 손쉽게 열리게끔 설계되어 있는데, 작은 영감 하나로 버거운 일이 손쉽게 해결되는 세상사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디자인이라고 한다. 문을 여닫는 일이 몹시 번거로워졌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버튼 하나로 맥없이 열리던 이전의 문들이 더 어색한 느낌이다. 문은 두껍고, 단단하고, 힘겹게 열려야 제맛인 것이다.필름과 책, 그리고 열쇠에 이어 애플의 혁명은 형이상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렀다. 슬픔과 기쁨 등 정말로 실체가 없는 감정들까지도 실체로 재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얼마 전 ‘반지’라고 불리는 이상한 기억 저장 장치를 발표하였다. 작고 단순한 금속 도넛을 손가락에 끼우는 것만으로도, 아무런 기계적 원리 없이 슬픔과 기쁨 등의 기억을 손가락의 감촉에 저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말 실효성이 있는지에 대해 많은 의문이 남지만, 이 장치는 최근 계약과 선언 등 중요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으로 애용되는 추세다.

필름이 발명되기 전, 외출할 때 챙겨야 하는 물건은 스마트폰과 이어폰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에 몇 권의 책과 몇 장의 사진, 그리고 짤랑거리는 열쇠가 더해지게 되었다. 가방의 무게와 인생의 무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물리적 관계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모두가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토록 소중한 물건들이 새로운 시대의 족쇄가 되지는 않을지 염려하기도 한다. 심지어 반지는 평생 착용해야 하는 물건이라고 하니, 그들의 우려가 지나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뭐, 나중에 누군가는 그것을 비워내려는 시도도 하겠지. 

그래서 세상은 더 좋아졌을까? 대답이 쉽진 않다. 풍요로우며 번거로운 이 세상을 항상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세상이 더 좋아졌느냐고 거듭 묻는다면 난 이렇게 돌려 대답할 것이다. 더 바보스러워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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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