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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줄리아』, 『앗 뜨거워 Heat』, 『쿡쿡』
타인의 부엌을
훔쳐보는 쾌락
『줄리&줄리아』, 『앗 뜨거워 Heat』, 『쿡쿡』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요리하기로 결심했다. 자기 집 부엌에서, 런던의 요리학교에서, 뉴욕의 레스토랑 주방에서 뜨거운 불길과 예리한 칼날과 치솟는 스트레스에 온몸을 던져가며 장렬히 한 끼의 식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우리는 서늘하고 고요한 방안에 편안히 앉아 책장을 펼쳐 그들의 부엌을 훔쳐보면서 그들이 그곳으로 향한 이유를 가늠해 본다.
직장에 다니며 혼자 살던 20대 후반에는 “자취해요? 그럼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겠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사실은 너무 잘 챙겨 먹어서 문제였다. 심지어 한 회사에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입던 바지의 단추가 만화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나갈 정도로 살이 쪘다. 하지만 매일 밤 고칼로리 정크푸드를 입에 쑤셔 넣은 건 아니었다(의외로 혼자 치킨 한 마리를 시켜 먹을 만큼 강단 있는 여자는 못 된다). 단지 너무 잘 챙겨 먹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는 게 괴로웠기 때문이다.
애인도 없는 여자가 비전도, 금전도 보장해주지 않는 직장에서 매일 하루씩 명줄이 짧아지는 것 같은 마감에 시달리다가 집에 돌아와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멍하니 드러누워 TV 리모컨을 돌리는 일뿐이었다. 그때 나는 <섹스 앤드 더 시티>와 주로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온갖 싸구려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았고, 또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쇼를 보았다(결국, 섹스 그리고 음식에 탐닉하는 전형적인 욕구불만 상태였다). 까치집 같은 머리에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자기 집 부엌에서 쉴 새 없이 수다를 떨면서 대충 요리를 하는 귀여운 영국 청년은 내 남자친구나 다름없었다. 아마 진짜 남자친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 나를 위로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칼로리 플래닛』이라는 책에서는 ‘TV 요리쇼는 배고픈 방랑자들을 불꽃으로 유인하는 모닥불같은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내 마음도 꼭 그랬다. 요리쇼를 보다 보면 어머니의 된장국이라도 훌훌 마신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고, 하루 동안 나를 괴롭히던 모든 문제(일주일째 전화를 받지 않는 연예인 매니저, 닥쳐오는 마감 일자, 남자와 키스를 해본 지 2년이 넘었다는 사실, 월급날까지 3주나 남았는데 벌써 바닥난 생활비,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30대의 인생 같은 것)는 내일 생각해도 좋을 일 같았다.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는가.
“도대체 너는 그걸 왜 하는 거니?”
요리 프로젝트에 대해 엄마는 다시 한 번 똑같은 질문을 했고, 내 대답 역시 똑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 이유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늦은 밤, 40분을 기다려도 전철은 오지 않고 플랫폼은 러시아워가 아닌데도 사람들로 넘쳐날 때, 영혼이 얼마나 병드는 느낌이 드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 직장인들로 가득 찬 잿빛 거리에 나를 토해내고 밤이면 한참을 달려 평화롭고 깨끗하고 외딴 브루클린에 다시 나를 토해내는 통근 열차에 갇혀 있을 때 얼마나 단절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왜 내가 지난해에 그랬듯 다가오는 해에도 피폐해질 거라고 생각하는지, 어쩌면 결혼 생활도 망가져 버릴 거라 생각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설명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 줄리 파월, 『줄리&줄리아』 중에서
『줄리&줄리아』를 쓴 줄리 파월은 뉴욕 변두리 동네의 낡은 집에서 남편과 함께 사는 임시직 비서다. 곧 서른이 되는 이 여자는 생활고 때문에 두 번이나 난자를 팔아 임신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를 지경에 처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줄리아 차일드의 『프랑스 요리 예술의 대가가 되는 법』이라는 케케묵은 프랑스 요리책에 나오는 524가지의 요리를 1년 동안 만들어 이 과정을 블로그에 기록하겠다는 정신 나간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 과정은 당연히 녹록지 않다. 그녀는 매일 피곤에 찌든 몸으로 집에 돌아와 낡은 집의 비좁은 부엌에서 혼잣소리를 질러대며 듣도 보도 못한 요리를 만드는 고생을 사서 하고, 죄 없는 남편은 정신병원의 간호사처럼 아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녀의 블로그는 무관심과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서 시작해 『뉴욕 타임스』에 실릴 정도로 유명해지더니 결국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줄리 파월처럼 나 역시 TV 화면 속의 제이미를 쳐다보며 침을 흘리는 것은 그만두고, 일어나 부엌으로 가야 했다. 어쨌든 밥은 먹어야 했으니까. 남자친구가 세계적인 요리사인데 대충해 먹을 수는 없었다. 제이미가 가르쳐준 대로 프로페셔널하게 양파를 다지고 고추의 씨를 발라냈다. 파스타를 만들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허브를 뜯어 고기 위에 뿌리고 샐러드드레싱을 직접 만들었다. 난장판이 된 부엌 한가운데 서서 나는 신나게 자르고 채치고 다졌다. 도마 위에 채소들을 늘어놓고 일류 요리사라도 된 것처럼 칼질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안 났다. 내게는 요리야말로 명상이었다.
나는 줄리 파월이 왜 줄리아 차일드의 레시피를 요리하기로 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요리는 우리를 잠시나마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준다. 내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지, 내 통장의 잔고가 얼마인지, 내 직업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같은 문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내게는 완성해야 할 요리가 있고, 칼과 불과 프라이팬과 양념들이 있으며, 나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레시피가 있다. 한눈을 팔거나 딴생각을 할 겨를은 없다. 심지어 정직한 노동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하나의 요리가 탄생해 있다. 요리쇼의 일개 애청자에서 창조자로의 위대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바지 단추가 터져나가는 것만 빼면 말이다.
내가 훔쳐본 또 다른 부엌은 뉴욕의 유명한 이탈리아 레스토랑 ‘밥보’의 주방이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드리아가 동경하던 ‘뉴요커’의 문학 담당 기자인 빌 버포드는 어느 날 그야말로 필을 받아 직장을 때려치우고 밥보의 주방에 수습생으로 취직한다. 남들은 골프 라운드 돌 생각이나 할 중년의 나이였다. 칼자루 쥐는 법도 제대로 모르던 이 중년 남자는 허둥지둥, 우왕좌왕해가면서 파란만장한 수습생 시절을 마친 후 그릴 담당의 위치까지 오른다. 내친김에 그는 이탈리아 산골마을의 유서 깊은 식당에서 파스타 면 뽑는 법을 배우고, 칼을 들고 단테를 읊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푸주한(소, 돼지 따위를 잡아서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서 경건하기까지 한 직업윤리를 배우게 된다. 그 과정을 기록한 책이 바로 『앗 뜨거워 Heat』이다. 이 남자는 왜 또 중년의 나이에 사서 고생을 한 걸까.
나는 주방장이 아니라 그냥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은 그 이유를 가르쳐 주었다. 천 년 동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사육하는 가축을 이해했고, 그것으로 뭘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계절에 따라 음식을 만들었고 농부들은 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았다. 그렇게 지킨 요리의 전통을 세대를 이어가며 보존했고, 그것으로 한집안의 색깔을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중략) 하지만 나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 지식을 원하던 게 아니다. 나는 그저 좀 더 인간적이 되고 싶을 뿐이다.
– 빌 버포드 『앗 뜨거워 Heat』 중에서
<누들로드>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피바디상을 수상한 방송국 PD 이욱정 역시 휴직계를 내고 런던의 프랑스 요리학교인 르 코르동 블뢰Le Cordon Bleu로 떠났는데, 그때의 생활을 기록한 책 『쿡쿡』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르 코르동 블뢰에서 무얼 배웠던 것일까? 그 배움의 시간은 내 안에 어떤 씨앗을 남긴 거지? 그것은 프랑스 요리의 현란한 레시피나 테크닉이 아니었다. 내가 배운 것은 한 접시의 요리를 앞에 놓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보는 법이었고, 음식을 만드는 일과 요리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었다. 또한, 그것은 타인의 요리, 다른 문화의 음식에 감탄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고, 좋은 음식과 그것을 우리에게 준 자연에 감사하는 법이었다.
– 이욱정 『쿡쿡』 중에서
바쁜 날 근사해 보이는 요리를 50개 만들면 짧은 짜릿함을 50번 느끼게 되고 일을 마무리할 때는 기분이 참 좋았다. 어떤 심오한 깨달음 같은 건 없지만(성찰의 양은 거의 제로에 가까우니까), 더없이 진실한 순간이었고, 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삶에서 이만큼 순수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경험은 많지 않았다.
– 빌 버포드 『앗 뜨거워 Heat』 중에서
어찌 됐든 요리는 즐거운 것이다. 배를 채워주고, 돈을 아껴주고, 내가 인간으로서 한몫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내 부엌에서, 내 힘으로, 언제든, 심지어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무엇을 가지고서든, 뭔가를 창조해낼 수 있다. 역시 요리는 대단한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아파트 전체가 고요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 줄리 파월 『줄리&줄리아』 중에서
줄리&줄리아
줄리 파윌 지음 | 바오밥 | 290쪽 | 148x210mm
나이 서른의 한 여성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요리를 소재로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이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이다. 그녀와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이해하고 감싸주며 풀어나가는 모습의 따스함에 보는 이까지 덩달아 행복해질 수 있다.
앗 뜨거워 Heat
빌 버포드 지음 | 해냄 | 423쪽 | 148x210mm
파스타를 삶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저널리스트 빌 버포드의 이탈리아 요리 정복기. 저자는 요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문화나 인간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묘사하고 있어 보는 이에게 즐거운 요리의 세계를 전해준다.
쿡쿡
이욱정 지음 | 문학동네 | 325쪽 | 148x210mm
다큐멘터리 피디로서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이욱정은 갑자기 런던의 르 코르동 블뢰로 요리유학을 떠난다. 요리 프로그램의 연출자가 되려면 그 과정을 직접 느껴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욱정피디 특유의 말투에 쿡쿡거리며 웃다가 자신도 모르게 제2의 여정을 꿈꾸고 싶어진다.
글 한수희
사진·에디터 박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