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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말했다. 음악만이 나라에서 허락하는 유일한 마약이라고. 음악은 ‘마약’이라는 불온한 단어를 빌릴 수밖에 없을 만큼, 우리를 일상이 아닌 의식의 저편으로 데려가곤 한다. 현실에 발을 붙인 채, 어디가로 떠나고 싶을 때는 가장 빠른 비행기 편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튼 채 짧은 여행을 꿈꾸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장소들을 소개한다.
카타오모이
‘카타오모이’는 뚝섬역 인근에 있는 재즈 킷사다. ‘킷사’는 일본식 다방을 부르는 준말로, 앞에 음악 장르명이 붙으면 그 음악을 전문적으로 틀어주는 다방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 카타오모이는 재즈를 전문적으로 틀어주며, 마실 것과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는 다방인 셈.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올라서니 베이지 우드 톤의 따뜻한 공간이 보인다. 스피커에선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다. 시끌벅적한 소음은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점점 멀어진다. 사장인 장윤수 씨는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벌면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싶어 카타오모이를 차렸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이곳은 그가 좋아하는 재즈를 적극적으로 권하기보다는 조용히 펼쳐 보인다. 통창으로 들어오는 채광과 녹색의 식물들. 바에 앉아 벽면에 빼곡히 채워진 바이닐을 둘러보면, 안목 좋은 멋쟁이 삼촌네 집에 놀러 온 기분이다(왠지 독신이어야 할 것 같다). 윤수 씨는 재즈를 숨 쉬듯이 듣고, 재즈 킷사를 좋아한다.
그렇기에 카타오모이가 재즈 킷사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창 재즈가 주류 음악이던 시절,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듯 일본인들은 재즈를 듣기 위해 킷사로 갔다고 한다. 그러니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선 ‘최고급 음향 시설 완비’, ‘레어 바이닐 컬렉션’ 같은 말로 어필해야 했다고. 카타오모이의 메뉴판에 음향 스펙과 컬렉션이 기재된 이유다. 선곡 능력은 사장이 모은 바이닐 수에 비례하고, 음향은 투자한 비용만큼 정직한 결과가 나오는 기술의 영역이다. 카타오모이는 전자와 후자 모두를 만족하는 훌륭한 재즈 킷사다. 후자는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그가 대략적인 비용을 귀띔해줬다. 가게에 외제 차 한 대가 주차된 셈이었다. 음향은 잘 모르지만, 그만큼 투자해놓고 소리가 별로면 억울하지 않을까 싶다. 본인이 개입하는 비중이 적은 생맥주가 제일 맛있다는 윤수 씨의 말처럼, 재즈 킷사는 음식보다 음악이 중심인 장소다. 음표가 가장 큰 테이블을 차지하고, 남은 자리를 사람이 메운다. 재즈는 몰라도 된다. 다만, 음악에게 자리를 내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카타오모이는 좋은 선택지다.
바 가까이에 놓인 턴테이블
카타오모이의 주력 메뉴 삿포로 생맥주
뱅가드
구수한 냄새가 피어나는 공덕시장에 저녁이 찾아오면, ‘뱅가드’의 조명이 켜진다. 뱅가드는 바이닐을 기반으로 술과 음식을 선보이는 바다. 얼큰하게 취한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피어나는 족발집과 나란히 있는 바이닐 바는 마치 열대 과일로 김치를 담그는 듯한 낯선 조합이지만, 이곳은 오래된 재래시장 한복판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품은 장소다.
시장 한복판이라는 입지만큼 이목을 끄는 사실은 운영자가 네 명이라는 점. 각자 본업은 따로 있고, 시간을 쪼개 돌아가면서 운영하고 있다. 이쯤 되면 뱅가드라는 가게가 작은 시장처럼 느껴지는데, 이곳에서 만난 사장 W는 “사장이 네 명이라, 음식 메뉴를 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어요.”라며 웃는다. 차가운 에그메시를 올릴지 말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인 끝에 탄생한 ‘뱅가드 핫도그’는 쪽파의 알싸함과 마요네즈의 고소함이 한 번에 터지는 메뉴였다. 이처럼 뱅가드는 운영자 네 명의 취향이 잘 조율된 공간이다. 와인은 물처럼 와인을 마시는 W, 음악은 DJ 활동을 하는 J가 맡는 식으로, 각자 자신 있는 분야를 맡아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사장 네 명을 한데 묶는 건 바이닐과 음악이다.
뱅가드의 선곡은 변화무쌍하다. 오픈 땐 자이언티의 [Red Light](2013)가 가게를 채우는데, 해가 넘어가면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Grover Washington Jr.의 색소폰 소리가 우렁차게 나오고, 브라질 삼바와 퓨전 펑크로 이어지다가, 손님이 한창인 오후 10시쯤 송골매의 앨범이 턴테이블에 올라오는 식이다. 시대와 장르도 제각각. 마포에 위치한 공덕시장의 풍경이 그려지는 플레이리스트다. 다양한 취향을 아우르는 뱅가드의 선곡은 바이닐 바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면서, 공간에 시장 특유의 정겨움과 환대의 정서를 녹여낸다.
뱅가드가 있기 전, 그 자리에는 시장의 오래된 신발 가게 ‘왕자 신발’이 있었다고 한다. 가게를 열 장소를 물색하다 지금의 장소를 발견했을 때, 국내 신발 브랜드 ‘뱅가드’의 진열장을 보고 가게 이름을 똑같이 지었다고. 뉴욕의 재즈 클럽 ‘빌리지 뱅가드Village Vanguard’에서 따온 줄 알았는데, 공덕시장의 역사가 담긴 유구한 이름이었을 줄이야.
키 컬러인 레드로 꾸민 DJ 부스
뱅가드의 음악을 책임지는 턴테이블과 아날로그 믹서
구스커피앤바
영화〈스윙걸즈〉(2004)에서 주인공 토모코는 재즈를 “배 나온 아저씨들이 와인 잔 들고 폼 잡으면서 듣는 음악!”이라며 질색한다. 재즈하면 떠오르는 중후한 이미지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장면인데, 망원의 ‘구스커피앤바’는 그런 오래된 재즈의 풍경을 멋들어지게 구현해 냈다. 당연히, 재즈도 흐른다.
망원시장으로 향하는 큰길에서 주택가로 빠지는 골목. 차분히 새어 나오는 피아노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구스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이 눈에 들어온다. 구스커피앤바는 이름처럼 낮에는 카페, 밤에는 바의 면모를 지녔다. 동생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한재영 씨는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직접 꾸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열었다. “책 한 권 들고 카페를 찾아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완전히 만족스러운 공간을 찾기란 쉽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동생과 어떤 공간을 꾸릴지 고심했고, 자연스레 즐겨 듣던 ‘재즈’의 이미지로 이어졌다고. 힙합만 듣던 동생도 장르의 매력에 스며들면서 미국의 재즈 바는 형제의 이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구스커피앤바는 재즈가 주류이던 20세기 중후반을 떠올리게 한다. 소파에는 정장을 입은 멀쑥한 사내가 담배를 태우며 위스키 잔을 흔들고 있을 것 같고, 바에서는 커플이 서로를 향해 코를 찡긋거릴 것 같다.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흐르는 스탠다드 재즈 (재즈 음악가들 사이에서 널리 연주되는 작품)를 들으면, 가본 적 없는 시절의 미국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이 형제 미국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재즈는 감정을 전달해 주는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한 번도 안 가봤느냐고 되묻자, 한재영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둘이 재즈를 들으면서 가장 강하게 느낀 감정을 토대로, 가보고 싶었던 미국의 한때를 상상했죠.” 그가 내준 ‘쿠바노(럼과 에스프레소를 섞은 칵테일)’를 마셨다. 마침 신청했던 곡의 트럼펫 소리가 잔잔히 퍼졌기에, 미국의 시가 바에 온 기분으로 창 밖을 바라봤다. 물론, 나 역시 미국엔 가본 적 없다. 한재영 씨는 수면 위의 구스처럼, 이곳을 유유히 쉬어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단다. 성실히 잔을 닦는 그의 모습은 수면 아래에서 쉴 새 없이 발을 구르는 구스 같았다. 취재 중 술을 마시던 나도 그런 모습이었을까. 그때는 점심으로 뭘 먹을지만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직접 만든 바이닐 액자와 김민주 평론가의 책
《재즈가 너에게》
가게 이름을 본 딴 구스커피앤바 로고
취재하며 만난 세 공간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본인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게를 꾸린 사람들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머물고 싶은 공간을 직접 만들어낸 사람들. 그래서 이들의 가게는 취향의 일상과 감정이 스며든 생활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채, 생업이 곧 일상이고, 일상이 다시 쉼이 되는 구조. 좋아하는 걸 하다 보니 주말도, 야근도 사라졌다고 말한 이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이들은 자신이 만든 공간에서 어떻게 쉴까. 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 음악이 잔잔히 감도는 공간에 홀로 앉아 감상하는 시간일까. 잠시 가게를 떠나 나들이를 떠날 때, 귀에 꽂고 싶은 한 곡은 무엇일까. 쉼이라 부를 수 있는 순간과, 그 곁에 어울리는 음악을 물었다.
250 [뽕](2022)
가게에 머무는 시간이 긴데요, 주로 어떻게 쉬세요?
제가 쉬는 방식은 조용한 곳에서, 납득할 만한 소리를 들으며 고립되는 거예요. 이 가게에 오시는 분들도 비슷한 마음일 거라 생각해요. 이 조건 위에 각자의 방식이 얹히더라도 크게 어색하진 않을 것 같고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음악에 대한 감각이 남다른데요. 나들이할 때 들으면 좋을 만한 앨범이 있다면요?
음악보단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세요. 음악은 필요할 때 언제라도 들을 수 있지만, 그 순간의 소리는 그때만 들을 수 있어요.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말소리, 고운 풍경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 밤바다의 고요 같은 것들 말이죠.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고요도 좋은데, 앨범을 추천받아야 해서요. 이야기 나누다가 잠깐 일렉트로닉 이야기로 빠지면서 250의 [뽕] 얘기를 했잖아요. 그걸 추천 앨범으로 적어도 될까요?
아, 예, 그럼요(웃음).
바비 브룸Robert Broom Jr. [Clean Sweep](1981)
뱅가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쉼은 어떤 순간일까요?
혼자 왔을 때 가장 완벽한 쉼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맥주의 기포, 바 테이블의 식물, 칵테일을 만드는 장면, 턴테이블 위에 돌아가는 바이닐을 찬찬히 감상하는 거죠. 저도 그런 식으로 쉬고 있어요.
짧은 외출에 어울리는 앨범을 추천해 주세요.
너무 들뜨지 않으면서, 적당히 즐겁고 편안한 음악이 좋겠죠. 바비 브룸의 1981년작 [Clean Sweep]을 추천해요. 재즈와 퓨전, 펑크가 섞인 이 앨범은 상쾌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아서, 외출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잘 어울릴 거예요.
도널드슨Lou Donaldson [Gravy Train](1962)
창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사장님은 언제 ‘쉰다’고 느끼나요?
휴일에도 종종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요. 평일 낮, 햇살이 창문을 통해 공간 안으로 스며들 때 바 자리에 앉아 드립 커피나 얼음이 담긴 잔을 천천히 저어요. 그러면서 재즈가 들려주는 감정에 귀 기울이며 생각을 정리하죠.
그럼 반대로, 몸을 조금 움직여 나들이할 땐 어떤 앨범이 어울릴까요?
루 도널드슨의 [Gravy Train]을 들어보세요. 앨범 전체는 물론, 한 곡 안에서도 템포가 계속 변해요. 나들이 가는 길의 설렘, 목적지에 도착한 여유, 저녁에 술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까지. 그 모든 순간에 자연스럽게 어울릴 거예요.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Straight Ahead](1968)
현관문을 열고 나설 때마다, 카운트 베이시의 [Straight Ahead]를 튼다. 박력 있는 빅밴드 사운드가 매력적인 앨범이다. 간질이다가 터지듯 쏟아지는 트럼펫과 색소폰 소리에 발끝에 힘이 들어간다. 경쾌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희망찬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속 주인공처럼 걷는다. 나들이의 끝은 마감을 하러 가는 카페지만, 그 여정만큼은 충분히 즐거우니까.
에디터·사진 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