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을 담은 서가에서

’00의 도시 전주’. 빈칸에 들어갈 단어는 다양하다. 비빔밥, 한옥마을, 가맥. 그러나 4년 전부터 전주시는 책의 도시임을 알려오고 있다. 사실 전주는 책을 빼놓고 논하기 어려운 도시. 조선시대부터 우수한 한지를 만들어 왔고, 나라가 혼란할 때도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냈다. 특히 관청과 민간에서 목판 인쇄물 ‘완판본’을 보급하며 출판 문화를 이끌었단다. 이제 전주는 도시 곳곳에 공공 도서관을 세운다. 단순히 책만 가득하기보다 특색 있는 소재로 알차게 꾸려진 공간을. 그중 전주의 아름다운 자연까지 감상할 수 있는 도서관 세 곳을 찾았다.

학산숲속시집도서관

아늑한 다락방 공간

주제별 시집 서가

전주에는 특색 있는 콘셉트가 강조된 ‘특성화 도서관’이 열한 곳이나 존재한다. 그중 시詩 특화 도서관인 학산숲속시집도서관이 무척 아름답다고 해 그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도심과 아파트 단지를 지나 여기서부터는 혼자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는 택시 기사. 차에서 내리니 완만한 산길이 나를 맞이했다. 이곳은 학산에 오르는 길일 것이다. 학산은 해발 360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전주 시민들이 가벼운 산행을 위해 찾는다고. 좀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서자 다람쥐 한 마리가 곁을 빠르게 스쳤다. 곧이어 나타난 건 맏내제라 불리는 장천저수지. 물가를 따라 놓인 나무 데크를 거니는 등산객들이 여럿이다. 맏내제 맞은편 언덕에 나의 목적지가 있다. 도서관은 작은 오두막 같은 모습으로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아 숲속에서도 자연스러웠다. 공간은 단정하고 아담한 분위기였는데, 어디에 눈을 두어도 온통 시집뿐이다. 곳곳에 앉은 방문객들도 얇은 시집만을 펼쳐 들고 있다. 

서가는 시집 주제나 특성에 따라 ‘반하다·고르다·만나다·다르다·선하다’ 등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먼저 문학 전문 출판사인 문학동네·민음사와 전북 지역 출판사인 ‘모악’의 시집으로 빼곡히 꾸려진 서가 ‘고르다’ 앞에 섰다. 한 권 챙겨 들고 돌아서니 사랑·이별·인생 등 키워드 중심의 주제별 시집 서가 ‘반하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외 서가에서는 외국어 원서 시집이나 시화집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아름다웠던 건 숲속이 보이는 널찍한 통창. 온통 초록으로 물든 창가에서 시를 읽고 따라 썼다. 복층 다락방 역시 외부가 비치는 창이 있어, 고요한 휴식을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녹음과 함께 시를 음미하고 싶다면 전주의 좀더 깊숙한 숲속으로 들어와 보길. 작은 오두막이 시를 찾는 여행자를 기꺼이 맞이할 테니. 

A.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5길 36-46
O. 화-일요일 09:00-18:00, 월요일·법정 공휴일 휴관

아중호수도서관

전주역의 붐비는 인파를 뒤로하고 차로 10분을 달리면, 고요한 아중호수가 드넓게 펼쳐진다. 호수를 따라 걷다가, 둥근 곡선 형태 건물의 통창을 따라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책 읽는 장면을 마주쳤다. ‘모두 평화롭고 편안한 얼굴이네.’ 이들을 단서 삼아, 여기가 바로 내가 찾던 아중호수도서관임을 알아챘다. 이곳은 전주시에서 운영하는 음악 특화 공공 도서관으로, 일반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는 소장 자료와 더불어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획되었다지. 그래서인지 음악 장르·뮤지션을 주제로 한 큐레이션 코너, 음악 관련 도서가 곳곳에 자리했다. 음악 도서가 모인 별도의 책장에는 뱅앤올룹슨, 드비알레, 트랜스페어런트 등의 고품질 스피커가 놓여 있었다. 직원에게 문의하면 청음이 가능하다고. 건축 구조에도 호수의 물결, 음악의 선율이 연상되는 감각적인 곡선이 스며 있다. 호수를 마주하고 있는 둥그스름한 통창, 피아노를 본뜬 천장의 곡선 장식이 바로 그것. 이 유려한 건물이 무려 총 길이 101미터란다. 

특성별로 나뉜 내부 공간은 ‘MUSIC’을 한 글자씩 따와 이름 붙였는데, 가장 마음에 남은 곳은 청음 공간 ‘C101’이었다. C는 ‘Communion, 교감’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고 이 공간에서는 LP 감상이 가능하다. 팝·록·힙합·OST 등 다양한 장르로 구분된 LP 사이에서 내가 고른 음반은 까데호의 [당신께](2022).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작동한 LP가 플레이어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호수에서의 잊지 못할 순간을 안겨주었다. 어디선가 들리는 풍성한 음악 소리에 뒤돌아보니, ‘브리온베가 라디오포노그라프 스피커’에서 선율이 흘렀다. 이 스피커는 전 세계 유명 예술가들의 애장품으로 알려진 물건으로, 방문자들을 위해 오전 시간 중 이따금 재생된다고. 산과 호수로 들어찬 장면에 시선을 두고 음악과 책에 푹 잠기는 시간. 전주를 찾은 낯선 여행자에게 아중호수도서관이 선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다.

호수가 보이는 LP 감상 공간

브리온베가 라디오포노그라프 스피커

A. 전북 전주시 덕진구 아중호수길 131
O. 화-금요일 09:00-21:00 (동절기 11월-2월: 09:00-19:00),
토-일요일 09:00-18:00, 월요일·법정 공휴일 휴관 

연화정도서관

전북대학교 근처의 덕진공원.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초록빛에 압도되었다. 한여름을 맞아 연꽃이 공원을 가득 메운 덕분. 이 정도 규모의 연꽃 군락지는 본 적이 없던 터라, 시야 끝에 여전히 연잎이 펼쳐진 게 맞는지 자꾸만 살피게 되었다. 연못 위에는 전통 석교 형태의 다리인 ‘연화교’가 놓여 있는데, 일부 구간에는 다리 밑이 반원형인 무지개다리도 더해져 있어 한국적인 정취를 가득 느낄 수 있었다. 

연화교는 거대한 섬처럼 보이는 한옥에 닿는다. 과거 덕진연못 위에 있던 정자 ‘연화정’을 허물고 전주시에서 2022년 새롭게 조성한, 연화정도서관이다. 외관에서 드러나듯 이곳은 전주의 정체성과 한국적 아름다움을 담았단다. ‘연화당’과 ‘연화루’로 구분된 이곳에서 나는 먼저 도서관 공간인 연화당의 문을 열었다. 노부부가 전통 문살 창 아래서 책장을 넘기는 모습에 미소부터 번진다. 내부 곳곳에는 ‘점·선·면·그리고·여백’이 적힌 팻말이 있는데, 한옥의 구조적 특징에서 착안해 지은 코너 이름이란다. ‘점(찍다)’ 코너에는 전주를 소개하거나 전주의 아름다움을 담은 문학 도서가, ‘선(잇다)’ 코너에는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도서가 마련된 식. 내가 이곳을 방문한 8월, 공간 중앙에는 전북 지역 여성 작가들, 국제 문학상을 수상한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큐레이션 되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가져와 창가에 앉았다. 연못 위에 지은 한옥에서 책 읽는 시간이라니. 덕진공원에서의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리라 생각한 순간이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문화 공간과 쉼터 역할을 하는 ‘연화루’. 앞서 둘러본 연화당과 달리 방문객들이 좌식 의자에 앉아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이곳에서는 전주 여행자를 위한 전통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단다. 한지 조각보 무드등 만들기, 자개 냉장고 자석 만들기 등 이미 진행되었던 강좌가 적힌 안내지에 시선이 맺혔다. 11월 중순까지 프로그램은 계속될 예정이라고 하니, 전주를 찾는다면 방문해 봐도 좋을 것이다.

바깥에서 바라본 도서관

연화루의 좌식 공간

A. 전북 전주시 덕진구 권삼득로 390-1
O. 화-일요일 10:00-19:00, 월요일·법정 공휴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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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박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