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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김경주
kimkyeongju
‘시인, 극작가, 포에트리 슬램 운동가’ 명함에 적혀있는 그의 직함이다. 당장 포털 사이트에 ‘김경주’라는 이름만 검색해 봐도 쏟아지는 기사들이 수십 페이지가 넘는다. 그는 쉴 틈 없이 글을 쓰고, 기획을 하고, 불순한 일들을 꾸민다. 언젠가 극단 앞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길에 선 채로 꽤 오랫동안 그날 본 연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연극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단지 그의 시 몇 편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쩐지 우리는 아주 오래된 사이처럼 대화했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의 묘한 기분은 오랫동안 남았고 만약 언젠가 내가 시인을 만나야 한다면 첫 번째는 반드시 그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국어를
향유하는 일
비근한 삶에 그래도 무겁다고 해야 할, 첫 시집을 이제 잠든 당신의 머리맡에 조용히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초대받은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窓. 사람들아,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얘기다.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중에서
작업뿐 아니라 대개의 인터뷰도 이곳 ‘이리카페’에서 진행하신다고 들었어요.
이곳은 저의 오래된 아지트 같은 곳이에요. 초창기에 함께 시를 쓰며 음악을 나눴던 사람들이 약속 없이 모여 근황과 작업들을 공유하는 곳이죠. 상수동은 오랫동안 작업실이 있던 곳이어서 친숙하기도 하고요. 가수 하림과 양양, 그래픽 하는 나나, 그림 그리는 호야, 목수, 미용사, 디제이, 사진가, 래퍼 등 다양한 친구들이 모여서 살롱만의 잼Jam 문화를 형성하기로 해요. 단골만이 느낄 수 있는 ‘갑’의 기분은 덤으로 얻는 거죠(웃음).
창작자에게 ‘장소’는 어떤 의미인가요?
온도, 햇볕, 공기 등이 자기만의 질서를 가진 채 시간을 견디는 곳이에요. 어떤 지역이나 공간은 그런 것들이 유난히 다정하게 느껴지는 곳들이 있어요. 저는 여행이나 일상에서 영감을 주는 수많은 공간을 만났고, 그 공간들이 말을 걸어오면 충만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죠.
이곳에서 탄생한 작품도 많을 것 같아요.
카페에선 주로 가벼운 잡문을 쓰거나 인터뷰를 해요. 그게 아니라면 수다나 잡담, 밀약, 선언문 같은 걸 작성하기도 하죠. 명랑과 우울의 중간 정도 상태를 유지하다가 옆자리의 대화가 흘러들어오면 가벼운 긴장이 생기는, 그런 기운이 좋아요. 너무 조용하거나 반대로 너무 소란스러우면 기울기가 생겨서 부담스러워요. 시나 책을 쓰는 일처럼 조금 비중이 있거나 어금니를 간직해야 하는 작업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는 편이에요.
그러고 보니 워낙 왕성한 활동을 하시잖아요. 시인, 극작가, 문화운동가, 번역과 에세이 작업도 하셨고요. 그 중 가장 기본이 되는 활동이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건 시 작업이죠. 다른 활동은 그것의 확장인 셈이고요. 저는 제 작업들이 시를 중심으로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거라고 봐요. 희곡 작업도 엄밀히 말하자면 시극인 거니까. 저술과 공연, 기획 활동이 모두 시적인 것에 닿아있다고 생각해요.
‘시적인 것’이 무엇인가요?
시적인 것은 따로 있지 않아요. 음악에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어떤 것에도 담겨있을 수 있죠. 사람들이 흔하게 ‘시’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순간, 시적인 것이 발견되기도 해요. 시인은 늘 시대와 불화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시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반대되는 것, 그것이 ‘시적인 것’이 되는 거죠. 비어있고, 침묵이 살아있고, 언어의 결을 바라볼 줄 아는 것. 사실 인간의 DNA 안에는 리듬감이 존재해서 누구나 시적인 것을 알고 있어요. 그 리듬감을 타고 난다는 건 일종의 내재율을 갖는다는 의미인데, 그게 시가 돼요.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지만 단지 시를 향유하는 방법을 잊었을 뿐이죠.
시를 향유하는 방법이 따로 있나요?
모국어죠. 국어와는 다른 거예요. 엄마 뱃속에서 배우는 게 모국어거든요. 국어는 국가를 바꾸면 변할 수 있어요. 하지만 모국어는 그렇지 않죠. 엄마와 태담을 나누면서 시작되는 거라서 스스로 부정할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모국어의 회복. 그것이 시의 언어가 가야할 방향이고, 시를 향유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자신이 모국어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말은 잘하지만 글을 잘 쓰지는 못하죠. 본인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몇 개 없다면 그건 모국어를 잊어간다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첫 번째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의 판매부수를 아시나요?
절판되기 전엔 38쇄 정도였고, ‘문학과 지성사’에서 복간한 후에는 조금 더 찍은 걸로 알고 있어요. 대략 40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시집이 이렇게 많이 팔리는 경우는 드문데, 독자들이 김경주 시인의 시를 읽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등단 전후로 몇 년간은 야설을 쓰거나 대필을 하면서 유령작가 생활을 했어요. 시집이 나올 당시만 해도 이 정도의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게 사실이고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시를 쓸 때 누구에게나 있는 외로움의 시절들, 그 보편적인 감정의 질서에 최대한 집중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독자들과 교감을 했던 것 같아요. 다행이고 늘 감사하다는 생각입니다.
큰 성공 이후의 창작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세요?
글 쓰는 작업을 게을리 할 수 없어서 일 년에 두 권 정도는 책을 써왔어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모두 네 권의 시집과 다섯 권의 산문집, 세 권의 희곡집이 있네요. 부담감은 저를 포함한 모든 작가에게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글을 쓸 때 생기는 충만함이 그런 부담감을 밀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어떤 기막힌 표현 하나, 멋진 이미지와 진술 같은 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늘 궁금했어요. 하나의 발상이 시로 발화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때 입장권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아요. 또 입장권은 많은데 정작 놀이공원의 입구에만 머물다 오는 느낌도 별로지요. 시가 발생하고 시 스스로 자연이 되는 과정은 모든 시인마다 호흡이 다르고, 머묾과 드나듦의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진행된다고 명확하게 말하기가 곤란한 부분이 있어요. 저 역시도 하나의 발상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경우가 많고, 때로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때도 있어요. 다만 어떤 시적 상태로 있으려는 생각은 늘 가지려고 해요. 일상에서 자신을 예열하고 문학적 긴장을 갖는 것이 중요한 거죠. 삶의 구체적인 순간 안에서 태어나지 않는 언어나 상상력은 휘발되기 쉬워요. 제 스스로도 그런 발상에는 금방 흥미를 잃고요.
그렇다면 의도하고 시를 쓰는 느낌이 아니라, 무언가를 쓰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곧 시가 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죠. 서사적 글쓰기가 이야기를 채우는 방식이라면, 시는 이야기를 쓰면서 이야기를 지우는 과정이에요. 지우고 문지르는 과정의 반복인 거죠.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지우는 프로세스는 굉장히 아이러니한 거예요. 그 아이러니의 틈에서 뚝뚝 떨어지는 체액들이 있어요. 이상한 현기증이 생기고 멀미가 나는 경험들. 그런 것들이 시가 되는 거예요.
작년에 네 번째 시집 《고래와 수증기》를 내셨잖아요. 5년 만에 새로운 시집인데, 오래 걸린 이유가 있나요?
다른 작업에 비해 시를 쓰는데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첫 시집 역시 등단 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요. 저는 시와 속도는 반대의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시는 속도에 저항하죠. 빨리 쓸 수 없고 빨리 읽을 수도 없어요. 현대의 스토리텔링이 속도감에 바탕을 둔다고 봤을 때, 시적인 영화들은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전개되죠. 20세기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 시적인 것들이 가진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나요. 그 작품이 단순히 말장난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에게 침묵과 기다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한다는 말이죠.
동심원
안쪽의 것들
사내(창문을 바라보며) 눈은 세상에 자신의 고요를 조금씩 쌓고 있는 거예요. 파출소 직원 아가, 이제 자야 할 때야.
사내 네… 곧 저 눈은 다 고요가 될 거예요. 깊고 아득한 것들로 돌아가기 위해서. 파출소 직원 그래그래… 자자 자자.
–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중에서
갑자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는 데요. 지금 ‘포에트리 슬램Poetry Slam(시를 쓰고 랩처럼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활동을 하시잖아요. 시를 빠르게 낭독하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음미할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것은 시를 눈으로 읽는 방식이죠. 포에트리 슬램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듣고 감각하는 시적 체험이에요. 백그라운드 반주에 의존하지 않고 비트나 선율, 멜로디를 스스로 부연하는 거예요 마치 연극이나 고백 같기도 하죠. 우리나라에는 아직 생소한 편이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살롱이나 광장에서 포에트리 슬램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낭독용 시가 따로 있는 건가요?
낭독용 시를 따로 쓰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텍스트 안에 갇혀있는 시는 죽은 시라고 생각해요. 레코드 작업을 하지 않고 라이브만 고집하는 뮤지션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그들은 기본적으로 시라는 것이 라이브를 통한 울림으로 전달돼야 하는 거지, 읽어서 이해하는 것은 학문적인 태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저 역시 정밀하게 시를 쓴 다음 그것을 눈으로만 읽으면 재미가 없고, 독자를 향해서 나갈 때 즐겁고요. 시가 난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어도 울림을 가져갔다면 그게 좋은 거거든요. 저는 독자들이 실제로 집에서 시를 읽을 때도 눈으로만 읽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로 낭독해봤으면 해요. 그런 다음 그걸 타인에게 들려주기도 하고요. 전혀 다른 느낌이 들거든요.
텍스트로서 의미를 가져가는 것과 낭독을 통한 울림에 취하는 것, 그 둘 사이에 더 옳은 방식이 있을까요?
당연히 우위는 없어요.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는 의미보다 더 중요한 건 소리라고 생각해요. 소리가 없는 시는 죽은 시나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한국시가 왜 이렇게 안 읽힐까? 현대시가 난해하다는 이야기들을 거의 질식할 만큼 듣고 난 다음에 생각을 해봤죠. 그건 아마 소리의 부재 때문일 거예요. 한국시를 회복하려면 소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자면 노 래 가사를 눈으로만 읽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표현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멜로디를 입히고 목소리로 부르는 순간 노래가 살아나죠. 시도 똑같아요. 소리와 울림이 없는 시는 화석이나 다름없어요. 노래가 되지 못한 시들은 슬퍼요.
래퍼 MC메타, 음악평론가 김봉현 씨와 함께 ‘시와 랩의 전격 소통 작전’이라는 공연을 하셨잖아요. 반응은 어떤가요?
앞서 이야기 한 포에트리 슬램을 알리고자, ‘포에틱 저스티스Poetic Justice’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시를 랩으로 바꿔서 들려주고, 그 다음은 제가 랩을 읽는 방식이에요. 마지막에는 그 둘을 섞어서 보여주죠. 아무래도 생소한 장르이다 보니 낯설어 하는 관객도 있고, 신선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많아요. 반응이 어떨지는 저희도 늘 궁금하네요.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은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라임Rhyme(운을 맞춰서 리듬감을 주는 것)’ 안에서 찾으신 것 같은데, 라임 하나만으로 둘을 합치기에는 이미 너무 다른 길을 걸어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서로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몸을 낮추는 행위는 아닐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잃어버린 라임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시와 랩을 묶기에는 분명히 고유한 각자의 위치가 있지요. 그러니까 시의 리듬은 침묵과 지우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랩은 비트에 있어요. 둘은 본질적으로 달라요. 하지만 텍스트 속에 매립되었을 때 공감을 잃게 된다는 점이 같죠. 시와 랩은 소리를 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발화해야 라임이 살아나요.
앞으로 이 운동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까요?
정의가 실종되고 예술가의 선언이 부족한 시대예요. 특히 시와 랩은 어떤 선언이나 고백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끄러운 공통점을 가지고 있죠. 작년에 ‘한국작가회의 40주년 기념’ 행사에서 진은영 시인과 함께 젊은 작가 대표로 선언문을 쓴 것이 있는데, 그걸 래퍼 ‘키비’의 목소리로 되살리는 작업을 해봤어요. 매우 흥미롭고 생기가 넘치는 작업이었죠. 앞으로도 ‘랩드라마’라는 형식을 통해 좀 더 시의적이고 동시대성을 담아내는 공연을 보여줄 계획이에요.
희곡도 하시잖아요. 이번에 나온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역시 같은 희곡집 아닌가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시극이에요. 시적인 느낌이 더 살아있죠. 사실 저는 연극을 처음 하면서 시를 알게 됐어요. 그래서 연극적 텍스트는 언제나 시적으로 느껴져요. 오랫동안 극작가가 되고 싶기도 했고요. 저에게 시와 극은 하나예요. 시극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 해보자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전부 시극이었어요. 근대 이후에 극은 드라마의 색깔이 더 짙어지게 됐죠. 저는 그 예전의 시극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두 번째 시집 《기담》도 시와 극을 접목한 형식이 아니었나요? 처음 봤을 때 조금 낯설었거든요.
맞아요. 그게 처음 시도였어요. 욕을 엄청 먹었지(웃음). 그런데 그때 한 번만 하고 끝냈으면 욕을 먹어도 싸지만 10년 동안 계속 하고 있잖아요. 그럼 이제 비난을 하면 안 되지. 저게 대체 뭐 길래 저렇게 계속 하는 거지? 그런 궁금증이 있다면 제 작업을 보면 돼요. 나름 섭섭했던 게 있는데 저를 비난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단 한 번도 저의 연극을 보러 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럴 거면 책을 내서라도 보여줘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이번에 또 한 번 책을 내게 된 거죠.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도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도대체 어떤 점이 매력적이기에 비난을 받으면서도 시극을 하시는 건가요?
시극은 언어로 공간을 비우고 지우며, 그 안에 이야기가 아닌 침묵을 채워 넣는 작업이에요. 배우의 목소리가 그곳에 닿을 때 공명을 만들어내죠. 그때의 질감과 질서는 희곡 쓰기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쾌감이고요. 바로 그 점이 이 작업을 멈출 수 없는 이유죠.
멀미를 위한
여행
우리는 누구나 세상에 없는 지도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 세상에 없는 지도를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당신은 여러 번 길을 잃어본 사람이거나 여러 번 사랑을 통과해본 사람일 확률이 크다.
– 《패스포트》 중에서
어쩌면 독자들은 ‘김경주’ 하면 《패스포트》라는 여행 에세이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아요. 어떤 책인가요?
절판 된 지 꽤 됐죠. 고비사막과 시베리아를 횡단했던 시간들을 다룬 산문집이에요. 첫 시집을 출간한 후 한동안 헛헛한 마음으로 지냈거든요. 그래서 크리스마스이브에 강원도 속초 동춘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지요. 그 다음부터는 책에 나온 것처럼 헤매고 멀미하고 아련한 계절을 보냈네요. 사실 《패스포트》가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여행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작가의 여행 산문집은 어디를 여행했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흘러가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읽는 게 더 즐거울 것 같아요.
《패스포트》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사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시차죠. 저에게는 시차가 제일 중요한 화두였어요. 시차는 세 가지 의미가 있어요. 시간時間의 차이, 시詩의 차이, 시각視覺의 차이. 10년간의 나의 멀미들. 세 번째 시집 《시차의 눈을 달랜다》 이후에는 더 이상 시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요. 대신 이제는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여행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여행을 하며 셀 수 없이 많은 도시를 다녔네요. 사하라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떠났던 여행부터 여객선의 3등석만 타고 다녔던 경험도 있고요. 몇 년 전부터는 사람이 없는 지역에 관심이 많아서 가능하면 인적이 드문 곳이나 인간의 호흡이 덜 묻은 곳으로 가곤 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런 곳은 거의 찾기가 힘들죠.
여행을 떠나며 단 한 권의 책만을 가져가야 한다면요?
매번 다르기 때문에 대답하기가 힘든 질문이네요. 대신 음악을 권한다면 ‘닉 드레이크Nick Drake’나 ‘에디 베더Eddie Vedder’를 추천해요. 해가 지는 저녁 무렵에 들으면 외로움도 자존감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겸허한 마음이 되곤 해요. 밤이 덜 무서워지기도 하고요.
시인으로서, 극작가로서, 문화운동가로서, 그리고 여행자로서의 삶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나요?
아직까지 설레고 있다는 것이에요. 또 적어도 그런 작업들을 통해 남들을 지루하게 하고 있지는 않구나.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작업을 하다보면 각자의 문법이 달라지는 데서 오는 혼동은 없나요?
특별한 어려움은 없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종종 해요. 몸은 늘 피로하고 골은 늘 가뭄이네요(조기축구클럽에서 11년째 단장이다). 사실 문장은 자신이 어디에 놓이던지 그 순간의 고유함을 간직하죠. 문장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생명력을 믿는 한 혼동은 피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앞으로의 작업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저술과 공연, 여행의 순환일 거예요. 곧 나올 책도 몇 권 있고요.
조금 이상한 질문이기는 한데, 시간이 더 지난 후에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세요?
제가 이 세상에 남긴 똥은 이미 충분히 많아요. 그리고 그걸 치우겠다는 생각도 딱히 없어요. 다만 이제부터는 조금씩 아껴서 싸다 가고 싶어요. 저도 남의 똥을 쳐다보는 일은 항상 곤혹스러우니까요. 어릴 적에는 세상에 열심히 속아주었으니 이제는 세상이 시를 숨기지 못하도록 애 쓰는 일도 저의 몫이겠네요.
요즘에는 밤에 어떤 꿈을 꾸시나요?
어른이 실종된 세상이에요. 갑甲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마일리지가 궁금하고요. 시리아에 간 한국 청년의 생사도 궁금하네요. 그리고 가끔 군대로 돌아가는 악몽을 꾸곤 합니다.
인터뷰와 함께 읽으면 좋을
김경주의 책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문학과지성사 | 191쪽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그의 등장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이 무시무시한 신인의 등장은 한국 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 시인으로서의 믿음과 비평가로서의 안목 둘 다를 걸고 말하건대, 이 시집은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다.”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열림원 | 159쪽
두 번째 시집 《기담》 이후로 ‘시극’이라는 외로운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극작가 김경주의 새로운 시극집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의 대사를 차용한 이 책의 제목처럼 오래 곱씹을수록 더욱 진하게 남는 시적 감성과 여운이 책 속에 가득하다.
패스포트
랜덤하우스코리아 | 403쪽
고비사막과 시베리아를 횡단하던 시절의 멀미들을 담은 산문집이다. 그의 문장들을 천천히 더듬어 읽다 보면 시인이 쓴 산문집은 아무런 쓸모를 찾지 않을 때 더 가치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재는 절판되어 중고 서점에서만 구할 수 있다.
Let me in
김경주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너라는 이름이야
너를 처음 보았을 때
하얀 눈 위에
넌 잠들어 있었지
네 곁에 나는 가만히 누웠어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난 잠옷을 입고
널 따라갔어
네 잠옷 속에 들어가 웅크렸지
무서워도 난 소리 내지 않고
사랑해
무서워서 난 소리 내지 않고
사랑해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네가 불러준 이름이야
에디터 김건태
포토그래퍼 박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