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불러줘, 귤 보내려고

뜻밖의 다정함

서귀포에서 전화가 왔다. “다운아 귤이 익어 간다. 수확까진 조금 기다려야겠지만, 새콤달콤 먹을 만해.” 그렇다. 나는 ‘귤수저’다. 제주에 귤의 계절이 도래했다. 당장 서귀포에 가야겠다.

귤에 담긴 꿈

“너희 집에 귤나무 있어?”

제주도에 산다고 하면 육지(제주에서는 섬이 아닌 지역을 ‘육지’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참 나, 상상력 부족한 육지 것들 같으니라고. 제주도 하면 귤밖에 못 떠올리지. 제주도가 아무리 ‘귤국’이라고 하지만, 귤나무가 모두 있을 거란 건 제주를 정말 납작하게 보는 거라고! 아무튼 그때마다 제주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한단다.

“제주도라고 집에 모두 귤나무가 있는 건 아니라고! 그런데 우리 집엔 있어.”
“모든 제주 사람이 귤나무를 갖고 있진 않지. 뭐, 우리 할머니 집엔 한 그루 있지만….”

SNS에서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하고 공감하며 웃었다. 나는 제주에 살지만, 우리 집은 도심에 있고, 귤나무는 없다. 아, 그런데… 나도 부모님 댁엔 귤나무가 있다. 나도 귤나무가 없진 않은 셈이다.
제주에서 태어나지 않은 내가 귤나무를 가지게 된 이야기를 하려면,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23층짜리 아파트의 22층에 살며 매일 각자의 회사로 출퇴근을 하던 우리는 어느 날 부모님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제주도로 이주해 살고자 한다고 말씀드렸다. 너네가 미쳤냐, 잘 다니던 회사를 왜 그만두냐, 여행이 웬 말이냐, 제주도라니 정신이 나갔구나, 하는 답을 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라?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도 제주도 가서 살고 싶었는데, 오히려 잘되었다.”
우리가 배낭을 메고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우리보다 먼저 제주도로 이사를 간 부모님은 애월읍의 아파트를 구해 살며 매일같이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집과 땅을 알아봤다. 그러곤 서귀포 바다가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적당한 규모의 귤밭을 구해 귤밭 한편에 반듯한 일 층 집을 짓고, 귤 농사를 지은 지 벌써 10년째.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오롯이 두 분이서만 농사를 짓고, 수확하고, 직거래로 귤을 판매하신다.

아버지는 과일 밭 주인이 오랜 꿈이었다고 한다. 사과와 복숭아 등 과일 농장이 많은 충청도 시골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는 집에 과일 밭이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단다. 어느 날 귤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꿈을 이룬 셈이지.”라고 말씀하셨다. 농장 이름에는 부모님 두 분 이름이 나란히 들어가 있다.

같은 밭이라고 해서 모든 귤이 같은 속도로 익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귤은 해를 많이 받아 먼저 익고, 어떤 귤은 구석진 곳에서 열려 천천히 익는다. 나무가 자리한 땅에 따라서도 귤 맛이 다르다. 아버지는 매일 귤나무 사이를 걸으며 안부를 살피고, 그래서 지금 가장 귤이 맛있게 익은 나무를 안다. 그리고 그 나무에서 제일 잘 익은 귤을 골라 수확한다. 농장들은 대부분 날 잡고 일을 도와줄 삼춘들을 불러 한꺼번에 따서 판매하는데, 굳이 이런 방식을 고집하는 건, 팔순이 가까운 부모님들에게 귤밭은 소중한 일터이고 또,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귤을 수확하고 판매하는 겨울, 두 분은 1년 중 가장 바쁘지만 가장 에너지가 넘치신다. 겨울에 바쁘고 에너지 소진이 많아 봄, 여름, 가을에는 겨울을 위해 체력을 관리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곁에서 볼 때는 겨울에 충전한 에너지로 봄, 여름, 가을을 사시는 것 같다.

아무튼 덕분에 겨울마다 나는 귤을 따고(사실 자주는 아니고 가아끔 딴다) 판다(파는 건 잘 판다). 그러니 내게도 귤나무가 있는 셈이다. 귤나무가 있는 제주도민의 겨울은 대개 비슷하게 흘러간다. 평일에 시내에서 살며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도 주말에는 귤밭으로 가 귤을 딴다. 겨울이면 온 섬이 부지런해진다.

귤 이상의 귤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엄마는 늘 염려스럽고 미안한 마음이다 귤을 보내니 맛있게 먹거라”

강아솔의 노래 ‘엄마’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이 노래는 제주에서 들으면 ‘엄마’보다 ‘귤’이 더 크게 들린다. 나도 귤 철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귤을 보낸다. 처음 제주도로 이사 왔을 땐, 귤나무도 없으면서 제주에 산다는 기분에 취해 동문시장 과일 가게에서 귤을 사 육지 지인들에게 보냈다. 당연하게도 귤은 제주도 현지에서 사서 보내나, 육지에서 주문하나 가격이 똑같다. 도민에게 할인을 해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나보다 먼저 제주도로 이주한 친구가 제주에서 귤 싸게 살 수 있는 팁이라며 “밀감 얼마예요?”라고 하지 말고 제주 사투리로 “미깡 얼마 마씸?”이라고 물어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통하는 거 같더라. 아무튼 한 박스에 몇만 원씩 돈이 들더라도, 겨울이면 친구들과 귤을 나눠 먹고 싶은 마음에 육지에 귤을 많이도 사서 보냈다.

부모님이 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드디어 지인들에게 ‘공짜’로 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공짜라고는 하지만 노동력이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도 물론 완전히 공짜는 아니다. 한 해에 대략 스무 박스 정도 선물하는 것 같다. 매년 엑셀 파일에 귤 보낼 주소 리스트를 정리한다. 작년까지 귤을 선물한 사람의 주소를 지우기도 하고, 올해 처음 귤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서도 시장에서 살 때부터 우리 귤나무에서 직접 딸 때까지 몇 년째 빼놓지 않고 귤을 보내는 사람이 가장 많다. 매년 겨울 그들에게 귤을 보낼 때마다 생각한다. ‘올해도 나랑 친구 해주어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육지에서 제주도로 이사 와 사는 일의 단점을 하나 꼽는다면, 정든 친구들을 자주 만날 수 없는 거다.

집 앞에서 만나 함께 떡볶이를 나눠 먹고 커피를 마시며 그날그날의 대수롭지 않은 일에 대해 수다를 떨던 일이 가장 그립다. 육지에는 명절 때나 겨우 가는 편이라 친구들 만날 일이 거의 없다. 가끔 친구들이 제주도로 여행을 올 때나 겨우 만나게 된다. 그나마도 가족여행으로 오는 경우가 많아서, 둘이서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시간이 많지 않다. 물론 사이사이 안부를 전하며 살고 있지만 일상의 감정을 결결이 공유하던 시절은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게 꼭 내가 섬에 살아서만은 아니라는 것. 한 시절 우리가 함께 시간과 감정을 가까이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계속 친구다. 어디에 살든 서로 응원하는 사이는 귀한 것이니까. 나의 귤엔 그리움과 응원과 사랑이 담겨 있다는 걸 친구들은 언제나 알아차린다.

“너에게 귤을 받으면 인생 잘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어느 겨울 한 친구가 말했다. 겨우 귤 한 박스에 다정함을 더해 받는 나의 친구들. 종종 커피 쿠폰부터 잘 짠 참기름이며 예쁜 유리컵 같은 선물들이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도 생각한다. “나 인생 잘 살고 있나 봐.” 그런 의미에서 아낌없이 따서 나눌 수 있는 내 귤나무 하나 있는 건 좀 근사한 일이다. 귤나무 한 그루에선 최대 수십 박스까지 귤을 수확할 수 있다. 그래서 겨울이면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겨울이 좋은 이유

육지에 선물로 보내는 귤은 완전히 공짜는 아니지만, 사실 내가 먹는 귤은 공짜다. 귤나무를 갖기 전에도 그랬다. 공짜라기보다는, 귤이 저절로 생긴다고 하는 게 맞겠다. 제주도에 이주한 (귤나무 없는) 친구들은 귤이 공짜로 생기면 말한다.
“내가 진짜 제주도민이 되었나 보다.”
그것은 귤나무 있는 친구가 생겼단 뜻이고, 제주 삶에 조금 더 뿌리내렸단 이야기다. 귤나무가 있는 친구에게 직접 귤을 받는 것 말고도 식당 입구에 누구나 가져가라며 귤이 컨테이너째로 쌓여 있는 일은 흔하고, 아파트 일 층 현관 앞에 귤이 쌓여 있는 장면도 자주 볼 수 있다. 처음엔 공짜 귤이 보일 때마다 즐거워하며 가리지 않고 가져다 먹었지만 이젠 귤을 가려 먹는 어엿한 도민이기 때문에 먼저 묻는다.
“이거 어디 귤이죠? 서귀포 귤인가요?”
서귀포시 귤이 제주시 귤보다 언제나 맛있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더 맛있다. 서귀포의 부모님 귤밭에 다녀올 때면 차 트렁크에 귤을 가득 싣고 돌아온다. 한라산을 넘어 집까지 오는 길에 친구 집에 들러 귤을 조금씩 나눠 준다. 귤이 저절로 생기는 걸 넘어, 도민 친구들에게 귤을 나눠 주다니, 정말 어엿한 도민이 된 거 같다. 이 글에서 귤 향기가 느껴진다면, 맞다. 귤을 열 개도 넘게, 사실은 셀 수도 없이 계속 까먹으면서 썼다.

내 꿈은 제철 음식 꼬박꼬박 잘 챙겨 먹는 삶이다. 더불어 제철 음식을 다정한 이들과 나눠 먹으며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건강해야 하고, 친구가 있어야 하며, 주머니 사정도 나쁘지 않아야 하니 쉬운 꿈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겨울에는 성공이다. 나도 아버지처럼 꿈을 이룬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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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