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할 수밖에 없어

마니아의 비밀스러운 아지트

좋아할 수밖에 없어

마니아의 비밀스러운 아지트

방과 후엔 동네 문방구 앞으로 아이들이 모였다. 보통 뽑기를 하거나 종이 인형을 샀고 미니카레일에서 경주도 했다. 그렇게 하라고 정한 것도 아니었는데, 마치 공통된 일과처럼 모여들었다. 어른이라고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것이 자리한 곳에서 천천히 자기만의 시간을 꾸린다. 누군가는 변신 마법봉을 집었고, 또 누군가는 프라모델을 찾았다. 비밀스럽게 아지트의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아지트에
관하여

아지트Agit는 러시아어로 ‘아지트풍크트Agitpunkt’라는 선동본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정부의 눈을 피해 항상 이동하며 소재를 모르게 하고 비밀지령을 전달하는 지하운동의 집합소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운용과정의 특성이나 집단의 성격에 따라 이동본부, 지하본부, 비밀본부 등의 뜻으로 이용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특정한 장소를 가리켜 아지트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타인의 눈을 피해,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니아만의 비밀 아지트라면 어떤 곳이 있을까. 마니아만큼이나 마음 맞는 사람들이 없을 테고, 각자의 공통 분모를 기꺼이 나누는 유쾌하고 즐거운 자리가 될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유별남을 갖고 있다. 특정한 대상을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서 사랑해 마지않고, 깊이 이해하고 싶은 유별남 같은 것 말이다. 마니아란 아마 이런 유별남을 애정으로 승화한 사람들일 거라고 확신했다. 마니아가 슬그머니 모여드는 아지트를 기웃거리기로 했다.

네온문NEONMOON

A.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로 194-11 H. neonmoon.co.kr

레트로 라이프 스타일 숍 ‘네온문’은 1970~80년대 미국 레트로 풍에 영감을 받아 작업을 시작했다. 잘 팔리는 제품보다는 사람들이 갖고 싶은 제품을 만들고 싶었고, 네온문 특유의 느낌이 담긴 액세서리나 파우치, 지갑, 옷 등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고운 털을 지닌 유니콘과 밤을 지키는 반달은 오랫동안 사랑받은 네온문의 상징이기도 하다. 북적거리는 연남동 거리에서 네온문의 문을 열면 마치 별세계가 펼쳐지는 느낌을 받는다. 직접 여행 다니며 수집한 물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네온문으로 많은 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오묘하고 영롱한 조명과 색감이 왠지 술 한 잔 대지 않고도 술에 취한 것만 같다. 널찍한 유리창 밖을 괜히 하염없이 보게 되는 게, 하루의 길이가 바깥 세계와 달리 느리게 흐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서교동에 네온문 브랜드 쇼룸인 ‘네온문나잇EO￾NMOONight’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곳에는 네온문에서 자체 제작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옷, 가방, 파우치 등 다양한 형태로 일상을 네온문의 색으로 물들이게 된다.

“잘 듣거라, 보노보노. 재미있는 게 끝나는 이유는 해가 져서 밤이 오고 그리고 또 해가 떠서 아침이 오듯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을 반드시 끝내기 위해서란다.”

– <보노보노> ‘야옹이 형’의 말 중에서

TIP 사람들이 늘 북적이는 주말보다는, 평일에 방문하면 더욱 한가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

마나가게Managage

A.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5길 51-18, 아람빌딩 1층

H. manashop.co.kr

 

상수동의 ‘마나가게’에서는 만화 콘텐츠를 활용한 제품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열려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편하게 드나들었다. 얼마 전, 강남으로 이전한 마나가게는 매장 형태가 아닌 쇼룸 및 비즈니스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다양한 표정을 띤 영웅을 만나는 자리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마블Marvel’로부터 공식 라이선스를 가지고 정품만을 취급하고 있다. 마나가게는 만화와 관련한 콘텐츠를 생산하고 모으며, 이야기를 쓰고, 아이템을 판매하고 있다. 만화에 대한 이야기와 기억이 그대로 공유되는 공간인 셈이다. 만화를 보고 성장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과거의 이야기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만화는 결국 결말을 맞이하고 주인공들은 자기만의 평화를 찾아 나섰지만, 그들을 여전히 곱씹고 그리워하는 이들이 마나가게로 모여든다. 아마 이것이 어른의 세계에서 마나가게가 기능하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기억을 좇는 존재다.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은 영웅을 되새기고, 같은 기억을 가진 이들과 유대감을 쌓으면서 비밀스러운 아지트가 만들어지니 말이다.

“선생님이 전에 말씀하신 이 세상의 증오에 대해서요, 저 나름대로 생각해봤어요. 그 평화라는 목적지로 갈 방법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언젠가 제가 이 저주를 풀어 보이겠습니다. 평화라는 게 있다면 제가 찾아내겠어요. 방법보다 소중한 것을. 중요한 건 그것을 믿는 힘입니다.”

– <나루토> ‘나가토’의 말 중에서

TIP 마블 만화책의 표지를 그대로 딴 ‘커버아트 프레임’작품과 만화책 내용 중 한 칸을 따온 ‘팝아트 프레임’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도 좋다.

크리미디디Creamy DD

A.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16길 15 무광빌딩 T. 02 6015 6347

언젠가부터 요술봉에 대한 선망이 부활하면서, 일명 ‘세일러문 세대’가 급부상했다. 세일러문 세대란 <달의 요정 세일러문>을 비롯해 <천사소녀 네티>, <리리카SOS>, <뾰로롱 꼬마마녀>, <카드캡터 체리>, <마법기사 레이어스>, <꼬마마녀 레미> 등 일명 ‘소녀 변신물’ 만화를 보면서 성장한 세대를 말한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리숙한 소녀가 운명적으로 혹은 우연히 선택받아 인류의 평화를 보호하고자 마법을 펼친다. 이때, 동글동글 아름다운 마법봉이 꼭 등장하는데, ‘챠르릉’, ‘띠로리’, ‘삐리삐리’ 등 귀에서 아른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무서운 악당들을 제압해버린다. ‘크리미디디’는 다양한 변신물 만화를 연상시키는 상품을 판매한다. 실제 만화에서 등장하는 요술봉과 크고 작은 피규어, 실제 입을 수 있는 옷, 화장품 등을 보다 보면 만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보통 장난감 가게 안에선 즐거운 웃음 소리가 들리지만, 크리미디디에서는 어디선가 앓는 소리가 자꾸 난다. 이건 소비자로서의 자아와 마니아로서의 자아가 부단히 싸우고 있다는 증거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 <달의 요정 세일러문> ‘세라’의 말 중에서

TIP 가격표가 붙은 제품만 구매할 수 있다.

홍대가챠샵Gacha shop

A.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21길 20-11 A동 1층

 T. 02-777-5058

‘가챠Gacha’란 어떤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은 ‘랜덤박스’형 시스템으로, ‘무작위 뽑기 시스템’이라고도 불린다. 보통 일본의 캡슐 토이 자동판매기를 일컬으며 다수 상품이 들어있는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캡슐이 무작위로 나온다. 가챠 시스템은 상품 자체를 구매한다기보다는 상품을 뽑을 기회를 구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주는 스릴감과 두려움이 공존하기도 한다. 가챠 판매기 앞에 해당 상품에 대한 그림이나 사진이 설명과 함께 붙어 있어서 어떤 상품을 담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뽑기 한 번으로 원하는 상품이 나올 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평소보다 너그럽게 가지는 것이 좋다. 꼬마 자동차를 비롯해서 만화 캐릭터 열쇠고리, 작은 피규어, 핸드폰 고리 등 다양한 제품이 널려있다. 그 사이로 사람들의 환호성과 아쉬운 탄식이 오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돈을 탕진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남은 자금을 확인해야 한다. 스릴 만점의 캡슐 개봉과 장난감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는 곳이다.

“좋아, 이 왼손으로만 상대해주지. 자, 한판 놀아볼까?”

-《드래곤볼》 ‘프리더’의 말 중에서

TIP 캡슐은 손으로 조금 비트는 것만으로 충분히 열린다. 어릴 때를 회상하며 발로 내려쳤다가는 산산조각 난 플라스틱이 여기저기 흩어져 매우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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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포토그래퍼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