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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에서 만나요
광명을 떠나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경기도 ‘광명’이다. 서울과는 다리 하나 사이에 두고 있어 주소는 경기도이면서 지역 번호는 02를 쓰는 서울과 경기의 경계. 봄이면 동네 구석구석부터 안양천까지 벚꽃이 장관을 이뤘는데 내가 기억이 있는 유치원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나무들이니 만개한 벚꽃이 여의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또, 안양천을 따라 걷기에도 좋았고 자전거를 타고 한 30분을 달리면 선유도 공원이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 구름산, 도덕산, 관악산이 있어 주말이면 가족들과 산에도 많이 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프렌차이즈 음식점과 레스토랑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고 대신 자랑이었던 광명시장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지금은 스타벅스니 아웃백 같은 체인점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래도 그들이 상업지구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동네 풍경은 그대로다.
우리 가족은 딱 2년 청담동에서 살았던 시기를 제외하고 평생 그곳에 살았다. 부모님께서 내 집 마련을 위해 2년마다 동네를 옮겨 다니기는 했지만, 모두 광명시 안에서의 짧은 이동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부모님의 신혼집 건물을 보며 중학교에 다녔고, 태어난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 워낙 오래 살아서 동네 곳곳 안 가 본 적이 없었는데, 돌이켜 보니 다세대 주택 반지하부터 앞마당에 목련 나무가 있던 빨간색 기와지붕의 이층집까지 살림살이의 변화도 무척 버라이어티했다.
뭣 모르던 학창 시절에도 봄이면 목련과 벚꽃, 라일락이 차례로 핀다는 것, 가을이면 온 동네가 붉게 물든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자랐다. 대학에 들어가 을지로에서 낡은 하프카메라를 처음 산 이유도 매일 보는 이 동네를 기록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시간이 흘러 꽤 오래 연애를 한 지금의 남편과 결혼이야기가 오갈 때쯤 나는 내가 다른 곳에 가서 잘 살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광명을 떠나야 했던 2년간 느꼈던 삭막함, 향수병에 걸려 매일 울며 잠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신혼집의 위치는 아마도 남편의 상황에 맞추어야 할 텐데 이곳을 떠나 어디에 정착할 수 있을까. 몸만 옮겨가고 마음은 둥둥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다니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서촌’이었다. 낙산공원과 대학로가 있는 이화동도 좋아했지만, 청와대 아래 사람 살기 좋다는 조용한 동네에 더 마음이 갔다. 남편과 연애 시절 인왕산에 등산도 가고, 통인시장 떡볶이를 먹으러 가기도 하고, 갤러리 구경도 하며 나는 서촌과 천천히 친해졌다. 그러면서 건물이 더 낮은 이곳에 어느새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나 보다. 남편도 서촌이 마음에 들었는지 번듯한 아파트가 아닌 한옥과 오래된 일본식 주택, 빽빽한 빌라가 대부분인 이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싶다는 아내의 의견에 큰 불평 없이 따라 주었다. 서울의 중심에 있으니 교통은 두말할 것 없이 편했지만, 주차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 동네 말고 다른 곳에는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준비의 첫 단계로 서촌의 부동산 사무실을 돌아다녔다.
서촌에 살기로 마음먹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이 동네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단순히 서촌 구경을 왔던 예전과 누하동 주민이 되고 나서의 서촌은 깊이가 달랐다. 몇몇 카페와 통인시장, 금천교 시장만을 슬쩍 지났을 때는 이렇게까지 근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심심하고 친해지기 어려운 까칠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리를 잡은 우리에게 서촌은 낯가림 있는 전학생처럼 천천히 마음을 열어주었다.
좁은 골목 사이로 마주하고 있던 이웃들은 이사 첫날부터 내게 인사를 건네주었고 경비실이 없는 주택인지라 택배 때문이라도 서로 안부를 묻고 지내는 날이 많았다. 눈이 오면 모두 빗자루를 들고 나와 집 앞을 쓸고, 봄이면 집 앞 골목에 화분이나 스티로폼으로 작게 텃밭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볕이 좋을 때는 차가 다니지 않는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엄마들은 빨랫줄에 빨래를 널었다. 그런 소소한 풍경을 주방 창밖으로 지켜보는 게 내 신혼생활의 큰 행복 중 하나였다.
집 근처에는 저렴하게 원두를 살 수 있는 동네 사랑방 같은 카페가 있었고 언제 구경해도 좋은 작업실과 공방들도 있었다. 꽤 규모가 큰 어린이 도서관은 몇 년 후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 딱 좋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나오며 평일 하루를 마감하는 일도 즐거웠다. 금요일 밤이면 금천교 시장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서로에게 토라졌던 일도 꺼내어 달랬다. 주말에는 마을버스를 타고 남대문 구경도 갔다가 정동길이나 가회동을 걸으며 데이트했다. 우리에게 놀라울 정도로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하지만 불편한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선은 만만치 않은 전세금에 우리가 생각했던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보태야만 그나마 햇볕이 들어오는 살림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매물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촌에서 집 구하기가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오래된 주택이 대부분이라 벌레나 곰팡이와도 친해져야 했다. 조금만 관리를 소홀해도 집이 금방 신호를 보내왔다. 우리가 막 이사했던 장마철에는 이틀만 집을 비워도 벽과 천장에 금세 푸른 꽃이 피었다. 벌레가 생기지 않게 항상 꼼꼼히 청소해야 했고, 밖에서 돌아오면 거실과 방으로 흩어져 곰팡이가 생겼는지 체크하는 게 일이었다.
대형마트 대신 시장에서 장 보는 것에 익숙해지는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 때문에 명동의 백화점 지하 식품코너까지 간 적도 있었다. 집을 구할 때 제일 고민스러웠던 주차 문제도 끝내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버스로 몇 정거장이나 떨어져 사는 시누이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꼭 필요할 때만 쓰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러고 사냐며 혀를 내둘렀는데 이상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리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사느냐’ 결국엔 그 차이일 뿐이었다.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면서 누하동의 이 허름한 집이 참 마음에 들었고 불편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이 동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슈퍼 사장님이나 떡볶이 가게 아주머니께 “새로 이사 왔어요.” 하고 인사를 하면 하나같이 살기 좋은 동네에 잘 왔다며 반겨주셨다. 이 불편한 동네 뭐가 좋다고 왔냐며, 불평을 꺼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서촌을 떠날 때까지도 변함없었다.
서촌을 찾는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들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우리는 급작스럽게 서촌을 떠나게 되었다. 이곳이 좋아서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매일같이 사진을 찍고 글을 쓰던 나는 청천벽력 같은 서촌과의 이별에 힘들어했지만, ‘자주 올라오면 되겠지’ 담담한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돌아보면 그때 이미 서촌은 나에게 고향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후였다.
이제는 서촌의 정들었던 가게들도 많이 사라졌다. 건물주가 바뀌었다는 사람도 있고 월세가 너무 높아져서 어쩔 수 없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낡은 건 보수하고 또 너무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가장 천천히 시간이 흐르던 서촌의 변화는 낯설다. 그런데 하루는 동네에서 오래 사랑받던 카페가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 장사를 시작한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도 여기가 좋아서 온 건데 제가 꼭 그분들을 내친 것처럼 보이
나 봐요. 다들 예전에 가게가 왜 없어진 거냐며 꼭 한 소리씩 하고 가세요.” 내가 살 때만 해도 적대감 없이 누구나 반겨주는 정겨운 동네였는데, 지금은 서촌을 찾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의 모습 모두 공감할 수 있어서 마음이 짠하다. 차가운 한 마디를 남기고 간 동네의 터줏대감들도 아마 지난 추억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지 새것에 대한 일방적인 적대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촌의 변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주변의 상권처럼 서촌이 변하진 않을까, 우려가 크다. 하지만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작은 골목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일은 쉽지 않을 거라고,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다시 조용해 질 거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기다려 보려 한다.
『낭만 서촌』 문희정 지음 | 문화다방 | 160쪽 | 135 X 210mm
소규모 출판으로 만든 책으로 서촌에 대한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겨있다. 서촌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부부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도 한 번 서촌에 살아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촌에 대한 많은 것이 생생하게 담겨있는 책. 서촌의 가가린, 더북소사이어티, 옥인상점을 비롯한 독립서점이나 그녀의 블로그(blog.naver.com/moonzakka)에서 구매가 가능하다.
에디터 박선아
글·사진 문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