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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여자, 바람, 길
제주도의 돌은 고려 시대까지 수없이 이어진 화산 활동을 통해 만들어졌다. 용암이 흘러 내려 물을 만나거나 대지의 공기와 만나면서 굳어졌다. 현무암은 단단하지만 몸에는 구멍이 가득하다. 검은 돌 속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지닌 것처럼 보인다. 돌이 가진 구멍은 본래 흐르던 날들의 부드러운 속성을 담고 있지 않을까. 신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제주도에서 돌은 건축재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재료로 이용되고 때로는 신앙의 표식, 혹은 신체가 되기도 했다. 돌이 삶과 죽음을 동시에 담는 매개체가 될 수 있는 건 단단한 몸에 무수히 많은 구멍을 품고 있는 양면성과 유연성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글·사진 이현아
신화를 경험하는 방법
제주돌문화공원
세상에서 가장 키가 컸다는 할망이 있다. 할망이 삽으로 떠서 던진 흙은 한라산이, 낡은 치마 사이로 흘린 흙은 360여 개의 오름이 됐다. 한라산에서 한 줌 떠낸 흙으로 산방산을 만들고 떠낸 자리엔 백록담이 생겼다. 할망은 성산일출봉을 구덕 삼고 우도를 빨래판 삼아 빨래를 했고 백록담을 돌베개 삼아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바로 설문대할망의 이야기다.
제주돌문화공원은 설문대할망와 할망의 아들들인 오백 장군을 테마로 제주의 돌 문화를 보여주는 공원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좁은 숲길을 걸어야 한다. 숲길을 빠져나오면 연못과 동시에 탁 트인 공원이 펼쳐진다.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상징탑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걸으면 꼭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이 든다. 길 끝에 있는 돌박물관은 희귀한 화산석이나 제주의 형성과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지형 자체를 방해하지 않고 아래로 스며든 듯한 건물 자체도 인상 깊다.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지금은 거의 사라진 제주전통초가마을을 재현한 코스가 이어진다. 마을과 함께 동자석이 가득한 숲길, 무덤가가 이어지는 이곳에 들어오니 어쩐지 서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 세상을 떠난 사람,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길이 시작되는 곳과 끝에서 공원에 온 사람들은 오백장군 군상을 마주한다. 사실 그곳에는 들어갈 수도 없고 지대가 높아 제대로 보기도 힘들다. 하지만 좁은 시야는 오히려 수없이 늘어진 군상을 신비롭게 만든다. 곶자왈 원시림이었던 이곳은 환경 그대로 보존한다는 기획자의 신념 아래 가꿔졌다. 그래서인지 인증 사진을 찍을 만한 곳도, 조악한 조형물도 없다. 거대한 숲 안에서 신화와 과거와 현재가 돌과 함께 존재할 뿐이다.
A. 제주시 조천읍 남조로 2023
H. jejustonepark.com
T. 064 710 7731
O. 09:00~18:00(입장권 오후 5시까지 발권, 매월 첫째 주 월요일 휴무)
담이 낮은 길을 걷다 보면
제주의 돌담길
제주에 가기 전, 여권을 분주히 찾는 나를 발견했다. 바보 같은 일이지만, 비행기를 탄다는 것 때문인지 제주의 이국적인 풍광 때문인지 그런 일이 종종 생긴다. 제주를 이국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건 길고 긴 돌담 아닐까.돌이 많아도 너무 많았던 제주도에서는,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해 돌을 치우다 담을 쌓기 시작했다. 돌담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집 주위를 에워 쌓은 집담, 밭과 밭 사이의 경계가 되어주는 밭담, 목장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잣성, 무덤 주변을 둘러싼 산담,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으려 쌓은 바닷가의 갯담(원담), 큰길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돌담을 뜻하는 올렛담 등 따지고 보면 제주의 장소마다 돌이 에워싸고 있는 셈이다.
돌아다니다 보면 시멘트로 덧대거나 모양을 내 깎아 만든 담을 만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방법은 오로지 돌을 이용해 쌓는 것이다. 돌을 굴려가며 틈과 틈 사이에 딱 맞는 부분을 찾아내어 쌓는다. 돌 사이사이 난 구멍은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를 만들어 담이 쓰러지지 않게 한다.
담이 일정 공간을 둘러막으려 흙, 돌, 벽돌 따위를 쌓아 올린 것이라면 울타리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풀이나 나무 따위를 얽거나 엮어서 담 대신에 경계를 지어 막는 물건. 돌담으로 불리고 있지만 제주의 돌담은 어쩐지 ‘얽거나 엮어서’라는 부분에서, 울타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낮은 담으로 얽히고 엮인 제주를 걷다 보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하늘을 공유하는 기분이 든다. 제주를 걸을 때 느끼는 정겨운 기분의 이유를 담이 낮은 길을 걷다가 생각한다.
돌로 만든 제주
카페 세바
선흘리 길가에서 카페 세바로 가는 길은 곱다. 옹기종기 모인 낮은 집들 사이로 헤매며 들어가다 보면, 돌집 하나가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푸른색으로 칠해진 주방과 반대편 끝에 벽의 반을 차지하는 큰 창이 있다. 어디든 자리를 잡고 앉으면 돌집에서 느낄 수 있는 서늘함이 기분 좋게 카페 안의 공기를 감싼다. 높은 천장과 서가에 빼곡히 꽂힌 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휴가라고 느껴지는 곳이다.
A.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중산간동로 1290 (농협 옆 공터주차가능)
H. blog.naver.com/cafeseba
T. 010 2588 9653
지니어스 로사이
공간으로 지역을 체험할 수 있는 건 건축이 가진 힘일 것이다. 섭지코지에 있는 지니어스 로사이는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로 땅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입구에 들어서면 제주의 삼다三多를 표현한 돌의 정원, 바람의 정원, 물의 정원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 성산일출봉을 담은 자연의 액자와 길이 있다. 명상의 공간답게 의식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길은 점차 깊어지고 내부에는 문경원 작가의 미디어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A. 서귀포시 성산읍 섭지코지로 107 휘닉스아일랜드 빌라콘도
T. 064 731 7791
O. 09:00~18:00(오후 5시 30분까지 매표)
나는 여자가 좋다. ‘여자’라고 부를 때 부드러운 발음도 좋고, 말끝으로 풍기는 따뜻한 느낌도 편안하다. 바람 부는 제주에는 돌도 많지만 인정 많고 마음씨 고운 아가씨도 많은 법. 아름다운 제주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만나기로 했다. 제주 여자. 제주에서 사는 여자. 그리고 제주에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여자. 이 여정에서 만날 여자들의 범위를 좁혀갔다. 그렇게 나는 작은 달방, 낯선 찻집, 그리고 오래된 빵집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글 이자연 사진 안가람
그 거리 오랜 빵집
삼복당제과
빵 냄새는 다른 냄새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 누군가에게 특정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또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한 여주인공이 ‘빵을 만드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아침을 연다’고 했던 것처럼. 오랜 시간 빵을 만들고 그 자리를 지켜온 빵집에는 그녀가 부채질하며 여름을 견디고 있었다.
INTERVIEW <삼복당제과> 이봉화
빵집이 이곳에 정말 오래 있었네요.
거의 40년 됐지? 사실 빵집에 대한 꿈이 딱히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당시에 다들 어려워서 살기 힘드니까 언니, 오빠 옆에서 하는 거 몰래 보고 알음알음 배운 거지, 뭐. 원래 어깨너머로 배우는 게 가장 정확하거든요. 우리 가게에는 일곱 종류의 빵이 있어요. 매일 아침 나와서 빵을 굽고, 포장해요. 단팥빵, 소보로빵, 잼빵, 메론빵, 크림빵 등이 있어요. 모두 한 개에 500원이죠.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비법이라면 거창하지는 않고 딱히 인테리어를 수리하거나 내부 공사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부분적으로 낡은 데가 보이기도 해요.
이 빵집 덕분에 자녀분들 결혼도 시킬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러믄! 딸이 셋이고 아들이 하나 있거든요. 애들 다 공부시키고, 대학도 보내고 했죠. 다 잘 됐어요. 우리 아들은 7급 공무원인데 1등으로 합격했다니까요. 이 빵집이 효자야, 효자.
긴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키면서 거리가 변하는 것도 전부 보셨겠네요.
아유, 원래 이 거리가 아주 작았어요. 시장만 있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커지더라고요. 우리 빵집은 이 거리의 변화를 전부 함께했죠. 동네 사람들이요? 사람들도 많이 알죠. 저희 빵만 찾으러 오는 단골도 생기고. 어떤 집은 제사마다 제사상 주인이 이 빵을 무척 좋아했더라고 하면서 제사용 빵을 사 가기도 해요.
제 여행의 테마는 ‘어느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여자’를 만나보는 거예요. ‘오래도록 빵집을 지켜온 여자.’ 굉장히 멋진 것 같아요.
뭐가 멋있어, 여자 혼자는 힘들어. 애들도 같이 도와주고 했던 한창에는 힘든 것도 모르고 일했지만 지금은 빵 만드는 게 힘에 부칠 때가 많아요. 카스텔라나 찐빵 종류는 가끔 힘들어서 못 만들 때도 있다니까.
빵집 운영하시면서 가장 행복할 땐 언제예요?
먹어보고 맛있다고 하면 그게 참 기쁨이지!
삼복당제과
A. 제주시 용담1동 135-15
T. 064 752 2475
제주와 인도
짜이다방
산방산 근처로 뿌연 안개가 꼈다. 그날은 여름 공기로 습했고 바람은 뜨거웠다. 몸을 뉘여 쉴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많은 사치 가운데 여행 중 ‘시간 사치’만큼 짜릿한 게 있을까? 여행지에서 모든 관광지를 빠릿빠릿하게 누벼야 한다는 생각을 고이 접고, 드러눕고 뒹굴고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 짜이다방에서 느린 삶을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러 갔다.
INTERVIEW <짜이다방> 봄빛
제주의 인도라. <짜이다방>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인도를 비롯한 주변 나라와 도시를 돌아다니며 2년 반의 시간을 보냈어요. 한국에 돌아왔는데 도저히 서울에서는 못 살겠더라고요. 사람도 많고 정신없고 사람들은 전부 바쁘고. 일주일밖에 없었는데 힘들었어요. 그대로 차에 텐트 하나 싣고 전라도를 지나서 여행을 시작했죠. 어쩌다 제주에 왔는데 돌아다니다 보니 1년만 살아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짜이다방>을 시작했어요.
비정기적으로 해안가에서 요가 시간을 갖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여기 바다에는 비밀 장소가 있어요. 무척 예쁘고 한적한 곳이죠. 친구들이 요가 시간을 이끌고 사람들을 한둘 모아서 그 근처에서 요가를 하죠. 요가를 하다가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누워 있으라고 해요. 바닷소리, 바람 소리 듣는 게 전부 요가니까요.
인도와 제주의 생활방식이 많이 다를까요?
인도에서 굉장히 행복했지만 어쨌건 그곳에 정착한 건 아니었죠. 그런데 제주는 생활과 여행의 중간지점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자유롭지만은 않지만 속박되어 있거나 어딘가 생활 한 구석에 콕 박혀있지도 않으니까요. 우리 다방도 좀 느슨하기도 해요. 인생에서 이렇게 안정적인 시기를 처음 맞이해 봐요. 그 전에는 항상 떠나고 싶고 다른 곳에 더 좋은 게 있을 것 같고,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옳은지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요. 항상 마음속으로 ‘나는 정착하지 못할 사람인가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제주에 와서는 다 좋아요. 다른 곳에 있을 땐 100으로 좋았다가 0으로 싫고 그랬는데, 제주는 100은 아니지만 8~ 90정도 소소하게 감사하고 평안해요.
스스로 어떤 여자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그냥 지금의 내가 좋아요. 뭐가 되고 싶거나 어떤 사람을 꿈꾸지는 않아요. 저는 여자라는 말을 좋아해요. 그 말에서 비롯하는 에너지가 제주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곤 하거든요. 무언가를 품어주는 기분이랄까요? 엄마의 에너지 있잖아요.
<짜이다방>을 통해서는 사람들이 어떤 에너지를 얻기를 바라나요?
그냥 여기서 늘어져 있다가 가는 거죠. 널브러지는 게 최고거든요. 편히 있다가 가면 좋겠어요.
짜이다방
A.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남로 239
H. blog.naver.com/mogan2014
O. 평일 11:00~20:30, 주말 11:00~21:30, 화요일 휴무
작은 달방
이름 하야 아끈달방
조용한 바닷가 마을, 평대리. 해안가를 따라 걸으니 작은 카페들과 국숫집만이 눈에 띈다. 이 작은 마을에 노처녀들이 두런두런 모여 사는 집이 있단다. 셰어하우스 안에는 햇살이 출렁출렁 차오르고 있었다. 마당에는 잠이 든 고양이, 키가 작은 풀꽃, 펄럭이는 흰 빨랫감들. 이곳의 여자들이 손자국을 진하게 남기는 것들이다. ‘아끈달방’에는 여자들이 산다.
INTERVIEW <아끈달방> 조리퐁
조리퐁 님은 제주 출신이신가요?
아니요. 서울에서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자유롭게 살고 싶어지더라고요. 우연히 제주에 놀러 왔다가 풍경과 사람들의 마음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제주의 삶을 고민했죠.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저는 서울에서도 셰어하우스를 했었거든요. 내리 혼자 살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TV 보고 떠들고 밥 먹는 삶이 참 좋더라고요. 타인과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안 거죠. 그래서 제주에 와서도 셰어하우스를 하며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어요. 또래가 좋을 것 같아서 <아끈달방> 입주 조건으로 ‘30대 이상의 여성’이라는 제한을 두었죠. 돈을 받고 방을 빌려준다는 단순한 목적이 아니에요. 함께 사는 거죠.
제주 말고도 떠날 수 있는 곳들은 많은데 왜 제주를 선택했나요?
이곳으로 이사 온 사람들이 제주를 선택한 이유는 비슷할 것 같아요. 제주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고, 또 멀지 않은 곳에 서울과 비슷한 도심도 있으니까요. 사실 처음에 외롭지 않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내려오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친구들과 함께 해서 좋아요. 동쪽에는 노처녀가 많거든요(웃음). 그런데 반대로 서쪽에 대평리 쪽은 남자가 많대요. 평대리와 대평리. 이름도 거꾸로 비슷하고, 지도를 접어도 데칼코마니처럼 맞닿는 지점이거든요. 정말 신기해요.
<아끈달방>은 모든 이를 환영한다기보다는 함께 살아갈 수 있고 중심을 맞춰갈 사람을 찾는 것 같아요.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현상 같은 게 있을까요?
저는 <아끈달방>을 찾으러 오는 모든 사람을 1호, 2호 이렇게 번호를 붙여서 불러요. 그리고 지금 38호까지 나왔고요. 그런데 10호까지 중에서 홀수는 정착하는 사람들, 짝수는 여행을 온 사람들로 나뉘더라고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도 말이에요. 한 달 동안 제주에서 지내면서 방값과 생활비가 다소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고사리 인력사무소>를 함께 시작했어요. 간단한 일을 도와주고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봐 주는 거예요. 제가 처음에 제주에 와서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 제일 먼저 했던 고민이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였다고 했잖아요.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았어요. 실제로 사람들이 정착해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요. 꿈은 있는데 현실은 무섭고 도전은 까마득하고. 어떤 일이 가능한지 파악할 수 있는 경험만으로도 부담은 덜 수 있으니까요. 일거리들은 보통 블로그에 게재되고 있어요. 게스트 하우스, 카페, 식당에서 일이 들어오고요, 가끔씩 풀 뽑기나 강아지 산책 등도 올라온답니다.
<아끈달방>은 어떤 여자를 보여주고 있나요?
<아끈달방>을 시작한 건 제가 서른한 살 때부터였어요. 서른에 들어서면 올라갈 자리도 별로 없고, 이 일을 내가 얼마나 더 오래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드는 시기가 와요. 그런데 우리가 해본 거라고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이어온 것이고, 주변에서 보고 접할 것들도 전부 비슷하죠. 돌아오는 조언도 그렇고요. 다양한 선례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두렵게 느껴질 수 있어요. 저 역시 그랬고요. 이곳에서는 지친 여성들이 와서 새로운 기운, 새로운 에너지, 새롭게 도전할 거리를 얻어가는 것 같아요. 직업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회사에 들어가는 것만이 선택권에 쓰여있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이 점점 체득하는 거죠.
앞으로 어떤 여자가 되고 싶어요?
오, 너무 어려운 질문이에요. 음… 저는 계속해서 모험하고 싶어요. 달방을 하면서 다른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상상을 많이 해요.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세화 오일장을 빛내줄 무언가를 팔아보고 싶기도 하고, 제주 와서 운전을 시작했는데 택시기사도 해보고 싶고요. 하고 싶은 게 많아요. 그게 뭐가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요. 아 참,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노처녀라는 말이 정말 좋아요. 결혼하지 않고도 나이를 잘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멋진 노처녀, 멋지게 홀로 살아가는 사람. 이렇게 말이에요. 집에서는 결혼을 하라고 서두르는데, 아마 제가 생각하는 노처녀의 이미지와 가족들이 가진 이미지와 달라서이기 때문일 거예요. 잘 사는 모습,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고 싶어요.
아끈달방
A.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평대해수욕장 근처
H. zoripong.com
그 여자네 집
톰톰카레
A. 제주시 구좌읍 평대2길 39-28
O. 11:30~20:00, 월요일 휴무
톰톰과 친구들이 운영하는 작은 카레 집. 바닷가를 등지고 짧은 골목을 지나면 마당 있는 집 한 채가 나온다. 일본식 카레와 인도식 카레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곳. 무엇보다 제주의 전통 한옥을 개조해서 아직도 남아있는 문지방이 퍽 마음에 든다. 따뜻한 분위기만큼 뱃속도 뜨끈해지는 걸 느낄 수 있는 곳.
할망상회
A. 제주시 구좌읍 평대2길 42
밖에서 보기에 허름하고 작은 슈퍼처럼 보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없는 게 없다. 바닷가에서 즐길 수 있는 맥주와 과자들, 낱알로 판매 중인 달걀, 그리고 간단한 음식 재료들까지. 상회에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할망이 머무는 방이 나오고, 왼쪽에는 식탁과 라면이나 인스턴트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가끔 그곳에서 할망과 동네 친구분들이 매운 족발을 만들어 드시곤 하는데, 애교를 부리면 한 입 얻어먹을 특별한 기회가 생길 수 있다.
제주도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단어가 다를 것이다. 내 머릿속엔 바다, 바람에 흩날리는 파도, 탁 트인 도로, 그리고 성게알비빔밥. 이번 제주도 여행에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제대로 누려볼 작정이었다. 하루에 한 끼는 꼭 성게알비빔밥을 먹었다. 다른 미션은 바람과 더불어 바다를 피부로 느끼는 것. 평소 배우고 싶었던 서핑만이 답이었다. 글 정혜미 사진 이현아
제주서핑소녀와의 만남
시작부터 불안했다. 제주도로 떠나기 며칠 전부터 지인들이 전해온 날씨 소식은 암울했다. 여행 예정 기간 동안 제주도는 계속 흐리다고 했다가, 일주일 내리 비가 내린다고 했다가 결국엔 태풍 소식까지 들렸다. 역시나 도착한 그 날이 우리가 머무는 기간 동안 제일 날씨가 좋았던 날이었다. 앞차가 켠 비상 깜빡이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낀 안개를 헤치며 운전을 하고, 우산을 써도 소용없는 비바람을 뚫고 걸어 다녀야 했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꼭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제주도의 바람을 마음껏 맞기 위한 서핑.
바다와 파도만 있으면 물속에서 살이 불어터져도 둥둥 떠다닐 수 있는 나다. 몇 년 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서핑이었고, 게다가 삼다도라 불리는 제주도의 바람을 제대로 맞아볼 기회였다. 서핑 슈트를 입고 발만 담그는 한이 있더라도 시작은 해볼 참이었다. 서핑에 대해서 완전 초보이기 때문에 서핑문화에 대한 이해와 기본적인 서핑 교육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일과 서핑과 인생을 즐기는 소녀를 만났다.
INTERVIEW 서퍼 김하정
언제부터 제주도에서 사셨어요?
제주 토박이예요. 10살 때부터 수영을 시작했고, 10년 정도 수영선수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제주도국제학교에서 수영강사로 일하고 있어요.
서핑과 여행. 이 두 가지가 하정 씨를 표현하는 것 같아요. SNS상에서는 ‘제주서퍼소녀’로도 유명하시고요.
4년 전쯤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그날의 차트와 현재 바다 상황, 어떤 파도에서 어떻게 서핑을 했는지 등 서핑 일지를 쓰듯이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니 조회 수가 점점 늘어났어요. 서핑에 관해 관심 가져주시는 분들도 많아지고요. 그런데 막상 제주도 서핑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줄 수 있는 사이트나 블로그가 없더라고요. 제주도에 서핑을 하러 오시는 분들이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어렵게 느끼실 것 같아서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해드리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여행도 많이 다니죠. 학교에서 일하니까 방학이 있잖아요. 여름에는 두 달 정도 긴 휴가가 생겨요. 이럴 때 여행을 많이 다녀요. 바다가 있고 서핑을 할 수 있는 나라로 일부러 정해서요.
서핑의 매력이 무엇인가요?
물 밖에서는 스마트폰을 끼고 살아요. 블로그랑 SNS를 운영해야 하니까요. 시간을 쪼개서 바다에 들어가면, 그 시간만큼은 핸드폰에서 벗어나요. 바다에 해무가 짙게 깔리면 옆 사람밖에 안 보일 정도로 심할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서퍼들이 한 곳만 바라보고 집중을 해요. 저에게는 바다가 유일하게 생각을 하게 하는 장소예요. 바쁜 일정 속에서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는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거죠.
제주도 서핑만의 장점이 있다면요?
제주도는 섬이잖아요. 다른 지역이랑 다르게 섬 전체가 바다로 둘러싸여서 그만큼 서핑 포인트가 많아요. 계절 따라서 파도의 방향이 바뀌는데, 여름엔 남쪽, 겨울에 북쪽을 향해서 파도가 오거든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지역이어서 사계절 내내 서핑이 가능하죠.
겨울에도 서핑을 많이 하나요?
겨울에도 많이 해요. 파도의 질을 따지자면 강원도의 파도가 더 질이 좋지만, 겨울에는 아예 불가능한 지역이 있거든요. 제주도는 겨울에도 가능하니까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에요. 온도도 중요해요. 수온이 평균적으로 가장 따뜻한 지역이거든요. 만약 다른 지역에서 5밀리미터짜리 서핑 슈트를 입어야 한다면 제주도에서는 3밀리미터 두께의 슈트를 입으면 돼요. 그리고 보통 추울 때는 장갑, 부츠, 후드까지 다 착용하거든요. 제주도에서도 한겨울에는 필요하지만, 여름에는 비키니만 입고 타는 경우도 많아요. 따뜻한 기간이 다른 지역에 비해 길죠. 작년에도 추석 무렵까지 비키니만 입고 서핑을 했었어요. 아! 거리도 매력적인 것 같아요. 남쪽 끝의 서핑 포인트에서 북쪽 끝의 서핑 포인트까지 거의 한 시간 반이면 이동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물에 대한 무서움과 위험성 때문에 서핑을 배우는데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 같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위험한 부분도 있어요. 베테랑일수록 위험 요소는 줄어들겠지만, 바다에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치는 경우가 많아요. 초보자들 경우에는 발이 닿는 수심에서 시작해야 해요. 수영은 못해도 상관없어요. 제 생각에는 수영 실력보다는 잠시 잠수를 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그리고 초보자는 강사랑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좋아요. 선생님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은 안전지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위험요소가 줄어들거든요. 강사의 눈에서 벗어날 때부터 위험한 것 같아요. 보드가 무거워서 처음에는 스스로 제어하기가 힘들어요. 보드가 날아가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어요. 정말 위험한 것은 바다 밖에서는 안 보이는 조류예요. 중문 해수욕장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 입수사고가 나요. 중문이 조류가 굉장히 세거든요. 가만히 서 있어도 무릎 정도밖에 안 되는 수심인데, 갑자기 발을 힘껏 끌어당기는 느낌이 확 들죠. 걸어 나오기도 힘든 조류가 많이 생겨요.
그럼 초보자들에겐 중문보다 다른 지역이 더 안전한가요?
중문보다 상대적으로 파도가 조금 약한 바다를 추천해요. 바닥이 돌로 이루어진 곳을 리프 브레이크라고 하고, 모래로 이루어진 곳을 샌드 브레이크라고 해요. 그런데 중문에는 리프 브레이크가 많거든요. 조류가 강하면 바다에 가만히 떠 있어도 순식간에 리프 포인트로 떠내려가서 사고가 나요.
서퍼가 조난자를 구하기도 하나요?
실질적으로 입수자 구조는 바다에 들어가 있는 서퍼들이 하는 경우도 많아요. 서프보드가 구조 장비가 되기도 하거든요.
바람이 많은 날이 서핑하기에 좋을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데 항상 적당한 바람이 제일 좋아요. 여름에 태풍이 남쪽에서부터 오는데, 제주도가 직접 태풍을 맞는 지역이잖아요. 그중에서도 제주도의 남쪽인 중문, 쇠소깍, 사계 지역이 제일 먼저 태풍의 영향을 받거든요. 태풍을 받으면 입수주의보가 내려서 아예 바다에 못 들어가요.
그럼 여름부터 가을이 가장 서핑을 즐기기에 좋은 시기네요?
6~9월이 가장 좋아요. 전국에 있는 서퍼들이 매년 오고 싶어 하는 시즌이죠. 서퍼들은 서핑을 하기 좋은 나라를 찾아다니는데, 여름에는 해외로 가지 않고 제주도로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서핑을 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제주도에 내려와 있는 분들도 많이 있나요?
이직하거나 직장을 관두고 내려와서 서핑을 하면서 지내기도 해요. 보통 프리랜서로 활동하시거나 아니면 해양 경찰로 오시는 분들도 있죠. 아예 제주도로 발령받으려고 노력을 하세요(웃음). 오래 사신 분 중에는 서핑스쿨을 차리는 경우도 많고요.
오늘은 바다에 물이 많이 들어오는 날이라고 하셨잖아요. 물이 많이 들어오는 날이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 정해져 있나요?
물 들어오는 기준이 있는데, 1물부터 14물까지 있어요. 조수간만의 차를 나타내는 거예요. 오늘은 8물이에요. 제주도가 섬이라는 특성상 물 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지역이에요. 시간에 따라서 파도의 모양이 많이 달라져요. 그래서 시간을 잘 맞춰서 들어가야 해요. 초보자의 경우에는 파도 크기와 상관없이 물이 많이 빠진 썰물 때 들어가는 것이 최적이에요. 중·상급자 같은 경우는 파도의 크기에 상관없이 다 서핑이 가능하죠. 상급자들은 리프 브레이크에서 물이 꽉 찼을 때 가장 서핑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파도의 질도 좋고요. 물 때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 기상청이나 ‘윈드 그루’같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서 파도 높이와 바람의 방향 등을 확인해요.
제주도 서핑 포인트를 추천해주세요.
중문해수욕장은 서핑을 즐기기에 굉장히 좋아요. 여름에 태풍이 오면 조금 위험하죠. 쇠소깍은 기본적으로 바다 전체가 리프 포인트예요. 돌과 좀 단단한 검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리고 질 좋은 파도가 들어와서 상급자들한테 좋은 장소인듯해요. 서핑을 막 시작하신 분들은 북쪽의 월정리해변을 추천해요. 여름에 태풍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해변이 워낙 예쁘고 비교적 잔잔한 파도가 많아서 초보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그밖에는 이호테우해변, 표선해수욕장, 함덕 서우봉해변, 하도해수욕장, 곽지해수욕장 등을 많이 이용해요.
제주도에서 서핑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좀 더 제대로 서핑을 즐길 수 있는 팁이 있을까요?
장기로 여행을 한다면 제주도의 포인트마다 돌아다니면서 서핑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요즘에는 여행객들을 여러 서핑 지역에 데려다주는 서핑 스쿨들도 있더라고요. 강습은 하지 않고 데려다주기만 하는 거예요. 프로젝트 겸 이벤트로 간혹 진행하는 것 같아요. 중급자의 실력이면 그런 이벤트를 찾아서 서핑 여행을 다니면 좋죠. 다양하고 질 좋은 파도를 따라 다닐 수 있잖아요. 서핑은 경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주 하느냐에 따라서 실력 차이가 나요. 그렇게 다양한 파도에서 서핑을 하다 보면 실력이 확실히 향상될 것 같아요.
서핑을 목적으로 제주도에 온다면, 서핑 스쿨 게스트하우스에 묵는 것이 좋은가요?
어떤 분은 월정리 부근에 숙소를 잡고, 중문으로 서핑을 하러 오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러면 차를 타고 최소한 1시간 30분을 다시 이동해야 하잖아요. 왕복이면 3시간 이상이에요. 숙소를 먼저 정하셨으면 숙소 주변의 서핑 스쿨이나 서핑 포인트를 찾는 것이 당연하고, 숙소를 아직 안 정하셨다면 원하는 서핑 포인트를 먼저 정하고 주변에 숙소를 잡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제 블로그에도 질문이 너무 많아서 공지용으로 글을 하나 올려두었어요. 제주도에 있는 모든 서핑스쿨의 위치와 게스트하우스가 겸비된 서핑스쿨도 표시해 두었어요.
서퍼들만의 문화나 공감대가 있을 것 같아요.
일단 같은 바다에서 같은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쉽게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서퍼들끼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자국이 있어요. 제 발목에도 이 선이 항상 있는데, 리쉬코드라고 하거든요. 서프보드랑 연결된 줄을 발목에 차는 거예요. 그 부분에 자국이 남아서 서로 알아보죠. 해외에서도 서퍼들끼리 금방 친해져서 친구가 된 경우도 많아요. 제가 포르투갈에 서핑 트립을 갔던 적이 있어요. 그때 피셔맨 하우스라고 포르투갈 작은 마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었었어요. 남녀 혼숙 도미토리였는데, 서핑 포인트 근처여서 서핑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서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들 친해지고 친구가 되었죠. 낮에는 서핑하고 밤에는 맥주 마시면서 밤새 서핑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도 서로 다 연락하고요. 서퍼들이 모인 장소에 가면 혼자 가더라도 외롭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와 대화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서핑을 배우기 위해 중문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서핑 슈트를 장착하고 나오니 작은 펭귄이 된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수영과 서핑으로 다져진 몸매를 가진 그녀 옆에서 땅꼬마인 난,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바다에 들어가서는 그새 잊은 채 바다와 파도에 집중했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 모래사장에서 실전 연습을 했다. 기본적으로 서프보드를 끌고 파도가 이는 바다의 중간 지점까지 가서 서프보드에 올라 엎드린 후 구호에 맞춰 보드에 올라서서 파도를 타면 되는 것. 말로 하니 굉장히 쉬워 보이지만 거친 파도 속에서 보드에 올라서기란 꽤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파도가 거친 날이어서 초보자가 처음 서핑을 배우기에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드디어 실전에 돌입했다. 뒤에서 보드를 잡아주던 하정 씨가 구호를 외칠 때마다 나의 몸짓이 달라졌다. 하나라고 외치면 보드에 엎드려서 팔을 접어 보드를 짚고, 둘 하면서 보드를 밀어주면 허리를 일으켜서 일어날 준비태세를 취하고, 셋 하면 보드 위에 일어서는 순이었다. 그 과정 중에 엎어지고 뒤집히고 쓰러지고 짠물을 마셨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보드에 우뚝 서서 3초 정도 파도를 탔다. 잠깐이지만 바다 위에 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기분은 꽤 짜릿했다. 자신감이 생겨 좀 더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파도에 휩쓸려 보드와 함께 바닷속에서 360도 회전을 했다. 보드 판과 키스를 했다. 순간적으로 입술이 부어오르는 느낌이 들고 무릎에는 몽둥이만 한 멍이 생기고 말았다. 그래도 기분만큼은 황홀했다.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바다에 떠 있는 동안 나란 인간이 한층 더 성숙해진 듯했다. 그리고 요즘 나를 괴롭히던 것들이 바람에 날려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걷는 걸 좋아한다. 수직이든 수평이든 일단 자동으로 운반해주는 기계는 잘 이용하지 않는다. 어차피 세월이 지나면 무릎 관절이 닳아버려 걷기는커녕 서 있지도 못할 수 있으니 가능할 때 즐기자는 생각이다. 산책 예찬은 지난 기사에서도 충분히 했으니 더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제주의 삼대장 ‘돌’, ‘바람’, ‘여자’에 이어 ‘길’을 포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을 걸어야 하고, 사람(여자)이든 사물(돌)이든 혹은 자연의 춤 (바람)이든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을 통과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나는 일주일 여의 시간 동안 제주를 걸었다. 걸으며 내가 가진 원칙은 최대한 천천히 오래 걷는 것, 그 하나가 전부다. 글·사진 김건태
여러분 뒤를
부탁합니다
많은 남국의 날씨가 그렇듯 제주는 변덕스러웠다. 하늘은 자주 비를 내렸고, 여우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올해만 해도 벌써 다섯 번째 여행하는 제주였지만 이번 계절은 좀 불길했다. 신이시여 비를 멈춰주세요, 아멘, 제발요. 잠들기 전 몇 초 정도는 꼭 그렇게 기도했는데, 신은 사이비 신자의 부탁에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워낙 바쁘신 분이니까.) 어떤 날은 자동차 와이퍼의 속도를 최대치로 올려도 앞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조수석에 앉은 동료는 안전벨트를 아주 세게 조인 다음 자라처럼 목을 수축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불안감을 표출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래요.”, “나는 롯데월드 바이킹 탈 때도 죽을 각오를 해.” 애써 태연한 척 그렇게 대답했지만 핸들을 잡은 손에서는 자꾸만 땀이 났다. 길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울 수 있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비가 많이 내리면 불편한 점이 꽤 많이 생긴다. 습도가 높아져 몸이 무거워졌고 청바지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으며 자꾸만 속옷이 말려 올라갔다. 애써 스타일링한 머리는 힘없이 쳐졌다. 오름에 오를 때는 빗물에 녹은 소똥과 흙이 함께 섞여 도무지 어디를 밟아야 좋을지 모를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그 지뢰더미를 앞에 두고 나는 고등학생 때로 돌아가 제자리멀리뛰기 기록이 얼마였는지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한편 비가 많이 내려 좋은 점도 있었다. 풍성한 습기와 안개 때문에 얼굴이 늘 촉촉했다. 미스트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음…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도무지 비가 싫고 양말이 젖는 건 더더욱 싫다. 아무리 관대하게 생각해도 안개와 채색된 풍경은 여기가 거기 같고 저기도 거기처럼 보였다.
세심하게 세웠던 여행계획은 엉망이 됐다. ‘이번 취재는 망했고, 아마 나는 잘릴 거야. 뒤를 잘 부탁합니다.’ 제주 하늘 아래 어디선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동료 에디터들에게 유언을 전했다. 그런 다음 이 엉망인 상태를 조금 더 화끈하게 망쳐보자고 마음먹으며 계획표를 찢어버렸다.(혹시나 마음이 바뀔까 휴대폰으로 찍어두기는 했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의 길을 떠났다.
허공에도 길이 있다는 말은
내가 생각해도 참 괜찮네
빽빽하고 치밀하게 세운 계획표를 찢어버린 다음 나는 마음을 비우고 한량처럼 구는 일에만 집중했다. 사나운 바람, 부러진 나무, 안개와 소똥, 혼자 멈춘 트럭, 옥빛 파도, 섬이 된 사람들. 눈앞의 것들을 천천히 바라보게 됐고, 그것들 또한 제주의 일부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나아졌다. 언젠가 비행기 창문 너머로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땅에서 멀어질수록 지구가 보인다’라고 쓰고 스스로 대견해 했는데, 제주는 걸어서 오를 수 있는 하늘이 많아 자주 지구를 구경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 그것은 길마다 세워진 가로등이었고, 지붕의 방향이었으며 사이사이 혈관처럼 퍼진 마을 길이었다.
천천히 보고 또 걸으며 제주의 길을 생각했다. 풀이 눕는 방향이 곧 바람의 길이다. 수첩에 그렇게 적었다. 파도는 절벽과 닿으며 자신의 길을 증명했다. 나무의 길은 허공이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길을 내고 휘어지며 자라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길이 있다는 게 바보 같은 말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찾은 제주의 자연은 스스로 길을 내는 쪽이었다.
다행히도 궂은 날씨 뒤에는 볕이 들었다. 비 갠 뒤 찾아오는 청명한 하늘이란, ‘이 맛이 맥주지!’라고 외치던 광고 모델의 표정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을 정도였다. 독기가 빠져나간 구름은 하나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올레와 오름, 숲을 헤집고 다녔고, 돌담이 낮은 마을에선 드르렁 후르렁 코 고는 강아지도 구경했다. 안개로 미스트 샤워를 했을 때의 나는 주로 한곳에 머물며 정적인 여행을 했는데 해가 들자 똥개처럼 킁킁대며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비행기 값이 아깝다!’ 그런 생각이었다. 가능한 한 많은 곳을 힘껏 걸은 다음, 하루의 마지막에는 숨 쉬는 것 빼고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오늘의 걸음들을 곱씹었다. ‘오늘은 어디에 가봤지?’가 아니라 ‘어디를 걸었지?’라고 질문하며 여정에 집중했다. 목적지보다는 방향을, 방향 뒤에는 속도를, 그저 걷는 순간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자고, 그렇게 되뇌며 내일을 기약했다.
숫자로 보는
제주의 길 이야기
26 제주 올레길은 현재까지 26개의 코스가 정식 개통되어 있다. 1코스 ‘시흥~광치기올레’를 시작으로 21코스 ‘하도~종달올레’까지 총 21개 코스와 우도, 추자도 등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올레길을 합한 숫자이다.
368 제주에는 368개의 크고 작은 오름이 있다. 하루에 하나씩 오름길을 올라도 꼭 1년이 넘게 걸리는 숫자다. 설화에 따르면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만들며 바다의 흙을 날랐는데, 그때 떨어진 흙덩어리가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1947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자, 대한민국 최고봉 한라산의 높이는 1947미터이다. 1901년 최초 관측 당시 1950미터로 측정되어 공식 높이로 사용되다가 지난 2003년 GPS 측량으로 더욱 정확한 수치를 얻게 되었다.
14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한라산은 하산 시간이 정해져 있다. 일몰과 하산 소요시간을 고려해 만들어졌는데, 이 책이 발행되는 9월에는 춘추절기 시간 적용해 늦어도 14시(동능정상 기준)에는 하산을 시작해야 한다.
13 제주에는 크게 13개의 지방도로가 있다. 1119, 1136 등의 네 자리 숫자가 매겨진 도로를 말하는데, 세로로 뻗은 길은 마지막 자리가 홀수, 가로 길은 짝수를 매긴다. 한라산과 인접한 1139(1100도로)와 1131(516도로)은 안개가 잦고 길이 구불구불해 초보자는 피하는 게 좋다.
240 해안도로는 제주 바다에 인접한 포장된 도로를 말한다. 제주에는 모두 11개의 해안도로가 있으며 총 길이는 240킬로미터에 이른다. 도로 구석구석 아름다운 자연요소들이 많으니 며칠간 여유를 두고 일주하는 것을 추천한다.
50 육지에서 제주까지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은 김해와 제주를 잇는 하늘길이다. 차이는 있지만 대략 50여 분이 소요되며 이착륙 시간을 제외한 순수한 비행시간은 35분 안팎이다.
17948 제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은 17948킬로미터 떨어진 남대서양의 바다 위이다. 비행시간만 꼬박 하루 이상이 걸리는 거리로, 아르헨티나 최남단과 남극 인근의 엘리펀트섬 사이에 있다.
친구와 함께 걷고 싶은 제주의 길
올레길: 21코스(하도~종달올레)
섬 안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생긴 올레길로 해주해녀박물관 정자 앞에서 출발해 종달리 백사장으로 마무리하는 코스이다. 마을 길과 바닷길, 오름길까지 제주의 자연을 두루두루 즐기도록 구성했다. 전체적으로 길이 온화해 무리 없이 걸을 수 있고, 코스 2/3지점에 위치한 지미봉에 오르면 동쪽 해안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어 기분이 좋아진다. 오전에 걸을 때는 해를 정면으로 받기 때문에 모자를 챙기는 게 좋다.
A.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길 26
소요시간: 도보 4시간(11.1km)
오름길: 백약이오름
제주에 수많은 오름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백약이오름을 좋아한다. 완만한 오름길을 걸어 정상에 오르면 한라산을 비롯한 이웃 오름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 보인다. 이곳은 특히 해가 지는 광경이 장관이다. 완만한 언덕에 소를 방목해두어 목가적인 풍경이 연출되는데 그 모습이 참 평화롭다. 물론 좋은 점이 있으면 꺼려지는 것도 있는 법. 길과 언덕을 가리지 않고 싸놓은 소똥을 피하려다 자칫 먼 길을 돌아갈 수도 있다.
A.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산1
소요시간: 도보 25분(357m)
숲길: 사려니숲길
‘신성한 숲길’이라는 뜻의 사려니숲길은 비자림로(1112번 도로)와 남조로(1118번 도로)를 잇는 숲길을 말한다. 비자림로에서 출발해 반대쪽 출구인 붉은오름까지 걷는데 편도로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의 물찻오름을 반환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을 택한다. 숲길은 대체로 평탄해 천천히 걸을 수 있고, 화산 송이가 깔린 길에서는 맨발로 걸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A. 제주시 봉개동 사려니숲길 입구
소요시간: 도보 3시간(10km)
해안도로: 조천~함덕 해안도로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나는 자주 스쿠터를 타고 제주 해안도로를 돌았다. 많은 도로 중에서도 동쪽 해안선의 조천~함덕 구간을 추천하고 싶은데, 바다를 옆에 끼고 완만한 경사를 활강하는 기분은 단언컨대 해방감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다.(규정 속도를 지킵시다.) 특히 이 코스에서는 굽이굽이 해안선을 돌다 해수욕장에 몸을 담갔다 나오는 것도 자유롭다. 함덕해수욕장 옆 서우봉에 올라 전경을 한눈에 조망해보는 것 역시 필수코스다.
A. 제주시 조천읍 조함해안로
소요시간: 스쿠터 20분(5.5km)
등산길: 어리목탐방로
먼 하늘에서 보면 제주는 지구가 아닌 전혀 다른 행성처럼 보인다. 섬 가운데 비현실적으로 솟은 한라산과 300개가 넘는 오름 때문이다. 특히 한라산을 오른다는 건 우리나라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라산을 오르는 방법은 시작지점에 따라 여러 코스가 있는데, 나 같은 초보자의 경우 경사가 완만하고 주변 경관이 좋은 어리목탐방로를 추천한다. 남벽분기점에 도착해 영실 코스로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A. 제주시 해안동 어리목매표소
소요시간: 도보 왕복 6시간(13.6km)
골목길: 공천포
공천포는 위미리 근처의 조용한 마을이다. 골목마다 무심하게 놓인 작은 가게들은 스스로가 정한 흐름대로 문을 여닫고, 평상 위의 노인들은 해변의 둥글고 검은 돌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 나는 오래 전 한 친구에게 이곳을 추천받았다. “제주에 가면 공천포에 꼭 가 봐. 정말 너무 좋아.” 너무 좋다는 말만 반복하던 친구는 식물과 길고양이를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이 마을의 골목이 꼭 그 친구를 닮았다.
A.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공천포쉼터
소요시간: 무한대
글·사진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