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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이에서 생긴 일
정원 한가운데 코끼리가 잠들어 있다
빠이에서 생긴 일
말로와 나는 오래된 연인이다. 우리는 헤어진 뒤 아주 긴 여행을 함께 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억지웃음을 짓고 있다며 “너희는 코끼리를 감추고 있어Elephant in the room.”라고 말했다. 정말일까? 말로와 나는 자기도 모르는 슬픈 얼굴로 서로를 대했던 걸까?
에밀리 호텔의
주인 없는 방
빠이Pai로 향하는 픽업 버스 안에서 기사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도착이 지연될 거라고 말했다. 기사의 말에 버스 안에 작은 소란이 일었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말로는 몸을 웅크린 채 모포를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조금 늦을 거래.” 말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창 너머 남국의 변덕스러운 대기는 하루에도 수없이 흐렸다 개기를 반복했고,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많은 비를 쏟아냈다. “도착하자마자 떠나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의 목적지가 빠이라고 했을 때 말로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말로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그녀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빠이로 가는 길엔 칠백 개가 넘는 고개가 있었다. 마침내 모든 고개를 넘어 마을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말로는 버스에서 짐을 내리다가 “저길 봐.”라며 언덕 아래 강변을 가리켰고, 그곳에는 반쯤 물에 잠긴 방갈로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버스에 함께 탄 여행자들이 하나둘 터미널을 떠날 때까지 우리는 범람한 강물을 내려다봤다. “날이 저물고 있어.” 내가 말했고 말로는 그제야 내려놓은 가방을 어깨에 멨다.
터미널에서 구한 지도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도 위에는 세 나라의 언어가 병기되어 있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지도를 접고 사람이 많은 방향으로 걸었다. 그럴싸한 모양의 게스트하우스는 대부분 빈방이 없었다. 곧 있을 마을 축제로 적어도 삼사 일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축축한 날씨에 우리는 지쳤고, 날은 점점 더 어두워졌으며, 좁은 인도를 걸을 때 몇몇 오토바이들이 위협적으로 우리를 스쳐갔다.
나는 땀으로 젖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내가 소리치자 한참을 앞서 걷던 말로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내가 가까이 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안 보여. 어쩔 거야?” 우리는 침묵한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말로의 그을린 이마와 갈라진 입술, 야윈 볼에는 생기가 없었다. 우리는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저긴 어때?” 그때 말로가 큰길에서 한참 떨어진 한 특색 없는 건물을 가리켰다. 장식 없는 나무 간판에는 ‘호텔 에밀리’라고 적혀 있었는데 호텔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여기도 아니라면 이 작은 마을에 우리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나무문의 무겁고 어긋난 경첩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데스크 위의 벨을 다섯 번쯤 쳤을 때 안쪽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몸이 크고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한 태국인 남자였다. 그는 걸을 때마다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있었어.” 투박한 영어 발음. “미안하지만 지금은 빈방이 없어. 얼마 후면 축제가 시작되거든.”, “알아, 그거 때문에 이렇게 울고 있잖아.”, “중국인?”, “한국.”, “그렇지? 중국인들은 농담을 잘 못해.” 나는 조금 웃었다. “여자 친구가 많이 지쳐 보이는데?” 말로를 가리키며 남자가 말했다. “친구 사이야.” 남자는 볼펜으로 데스크를 두드리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어. 괜찮겠어?” 말로와 나는 서로를 쳐다봤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알렉스라고 소개한 남자는 빼곡히 꾸며진 정원을 가로질러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자신의 딸 에밀리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녀가 지금 다른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매년 정원의 꽃이 만개하는 이맘때쯤 돌아온다고 했다. 알렉스는 외벽을 하얗게 칠한 에밀리의 방 앞에 멈췄다.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와 태국식 앉은뱅이 의자가, 고동색 나무 책장에는 몇몇 익숙한 제목의 영문 소설이 진열돼 있었다. 창문틀의 작은 화분 세 개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알렉스는 우리가 실내를 충분히 둘러볼 때까지 멀찍이 서서 기다렸다. “미안하지만 이 방에는 텔레비전이 없어.”, “상관없어.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까.”
알렉스는 열쇠를 건네며 몇 가지 지켜줘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해가 지고 난 후에는 소리를 지르지 말 것. 에밀리의 물건을 가져가지 말 것. 하루에 한 번 화분에 물을 줄 것. 마지막으로 에밀리가 돌아오면 방을 비워줄 것.’ 알렉스가 떠나고 우리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나무 냄새가 좋아.”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며 말로가 말했다. “몰라, 난 안 씻을 거야.”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침대에 엎어지듯 몸을 던졌다.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화장실 문을 활짝 열며 말로가 소리쳤다. “나무 욕조가 있어!”
코끼리가 나오지 않는
코끼리 꿈
호텔 에밀리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매일 조금씩 마을을 산책했다. 빠이는 태국의 여느 도시와는 확실히 달랐다. 작고 조용했고, 그래서 조금 더 오래 머문 것처럼 적응할 수 있었다. “저녁에 뭔가 만들어 먹을까? 알렉스에게 주방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볼게.” 가판 위에 진열된 과일을 살피며 내가 말했다. “나는 괜찮아.” 말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미니바나나 한 송이와 마을의 풍경이 그려진 엽서 묶음을 샀다. 우리는 시장이 끝나는 지점까지 걸었다. 강이 보이는 언덕, 거기까지가 우리의 산책로였다. 강을 가로지르는 대나무 다리 위에서 웃통을 벗은 소년들이 강으로 뛰어들었다. “건너가볼까?” 말로가 앞장서서 강가로 내려갔다. 아이들은 장난스럽게 다리를 흔들었고, 내가 화난 표정으로 다가가자 소리를 지르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나무로 지은 방갈로 테라스엔 웃통을 벗은 백인 남자가 동그란 배 위에 책을 올려 두고 잠들어 있었다. 짙푸르게 우거진 열대 식물과 울창한 나무 위의 새들. ‘Don’t cry’라는 낙서가 새겨진 버려진 이정표. 검은색 흙이 깔린 벌판과 몇 개의 이름 모를 무덤들. 멀리 산허리에 안개구름이 흘렀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그 뒤쪽에 버려진 작은 카페도 있었다. 목조 건물엔 덩굴이 무성했다. 카페의 출입에는 ‘SALE’이라는 문구가 적힌 판자가 걸려 있었다. 말로는 손차양을 만들어 하얗게 먼지 낀 창문 안쪽을 살폈다. 그러고는 내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창문 너머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테이블이며 의자가 그대로 있었다. “들어갈까?” 말로는 유리가 없는 빈 창틀을 가리켰다.
카페는 서늘하고 축축했다. 진열된 컵 위에는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말로는 “아아아”, 의미 없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사이를 걸었다. 그녀는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았다. “재료가 다 떨어졌어. 영업 끝이야.” 의자를 당기며 내가 말했다. 말로는 조금 웃었고 엽서를 하나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책이라도 가지고 올걸 그랬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책 읽다 잠드는 버릇은 여전하니?”, “그 정도는 아니야.” 창 너머에서 바람이 불었다. 덥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아무 표정도 없는 그저 그런 바람.
“코끼리가 보고 싶었어.” 무심한 듯 조용히 말로가 말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그림을 그리는 말로의 손을 쳐다봤다. “이곳이라면 거리 어느 곳에나 코끼리가 있을 줄 알았거든.” 바보 같은 소리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코끼리가 나오는 꿈을 꾼 적이 있어. 아니, 코끼리가 나오지는 않아. 하지만 코끼리는 분명히 있었어.”, “코끼리가 나오지 않는 코끼리 꿈이라니?”, “잘 모르겠어. 코끼리는 분명히 보이지 않는데, 사람들 안에는 코끼리가 있었어. 너무나도 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코끼리.”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말로가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엽서에는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코끼리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가져도 돼?” 말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끼리만 한 사람이라면 알 것 같아. 이를테면 알렉스라든지.”, “그럴싸해.” 그녀는 가만히 앉아 코끼리 그림을 몇 장 더 그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구석구석 뒤졌다. 그러다 창밖에 서 있는 늙은 태국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가 돌아간 뒤 서둘러 창문을 넘었다.
축제와 침묵이
함께 자라는 밤에
말로와 나는 점점 함께하는 시간을 줄여갔다. 어느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건 여행이 끝났을 때를 대비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행이 끝나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로 만드는 일.
길게 낮잠을 자고 방에서 나왔을 때 알렉스의 정원에는 늦은 태양이 내려앉았다. 흔들의자에 앉아 싱하를 마시던 알렉스가 나를 보며 맥주병을 눈높이까지 올렸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말로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어?”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네가 알겠지.”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래, 안녕.”이라고 대답하고는 호텔을 빠져나왔다.
거리에 하나둘 가로등이 켜졌다. 나는 시장을 향해 걸었다. 가짜 신호등과 빨간 우체통, 직접 만든 가방을 파는 상점, 진열장 속 ‘I LOVE PAI’라고 새겨진 티셔츠. 꼬치를 끼워 파는 간이식당에서는 하얗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말로는 인파 속에 있었다. 그녀는 히피풍의 털모자를 쓴 거리예술가 앞에 서있었는데,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 말로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말로 옆에 나란히 섰다. 조금 여윈 얼굴의 예술가는 자기 얼굴보다 큰 구슬을 목 뒤에서 어깨로, 다시 가슴으로, 무릎 방향으로 굴렸다. 표정이 너무 진지해 마치 심오한 코미디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는 구슬을 높이 던졌다가 받으며 동작을 멈췄고, 그걸로 공연은 끝이었다. 아주 짧은 박수와 다시 평범한 시장의 풍경. 예술가는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구슬을 닦았다. 말로는 지갑을 꺼내 우리의 하루 숙박비보다 많은 돈을 모자 안에 넣었다. “중간에 한 번 구슬을 떨어뜨렸어.”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차양을 드리운 노천 술집에 앉아 싱하와 창을 한 병씩 시켰다. 반병쯤 비웠을 때 안주가 나왔다. 우리는 거의 미친 듯이 먹었다. 음식은 금방 동났고, 돼지고기 꼬치와 쏨땀을 하나씩 더 시켰다.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야?”, “아까 네가 그 히피한테 준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는 더 많은 맥주를 마셨다. 이상하게도 취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밤거리는 넓고 시끄럽고 곳곳이 예술가들의 난장이었다. “기분이 어때?”, “좋아.” 말로는 건너편에서 아이리시 팝을 연주하는 밴드를 쳐다보며 건성으로 말했다. 말로의 얼굴은 붉었고, 눈동자는 연한 갈색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무슨 기분을 말하는 거야?” 말로가 말했다. “그냥 기분 말이야. 너의 감정, 상태, 생각. 모든 것들.” 그녀는 말없이 병을 만지작거렸다. 길 건너편 밴드는 다른 음악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옆으로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걸어갔다. 몇몇이 그들을 따라 행진했다. “축제가 시작됐나 봐.” 그렇게 말하며 말로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코끼리는 찾았어? 차라리 그렇게 물어볼걸, 나는 조금 후회했다.
비밀 정원에서
모두가 울거나 웃었다
우리는 시장을 뒤로한 채 천천히 걷다가 알렉스의 호텔이 보이는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잔 더 할래?” 말로는 고개를 저었다. “더 마시고 들어와.” 말로는 천천히 호텔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있었다. 시장 쪽으로 걸었고, 문득 발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불 꺼진 알렉스의 호텔, 문 닫은 상점, 칠백 개가 넘는 고개를 생각했다. 시장의 소란은 아주 멀리 작은 성냥불처럼 보였다. 인적 없는 도로 위에서 오랫동안 오줌을 누고, 며칠간 머릿속을 맴돌던 의미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드럼 소리가 들렸는데, 소리를 따라 흙길을 걷자 공터가 나타났다. 나무판자를 대충 얹어 지붕을 올린 조잡한 가건물에는 각종 장식이 난잡했다. 레게를 연주하는 밴드 음악에 맞춰 몇몇 히피들이 몸을 흔들고 있었다.나는 한쪽 구석에서 맥주를 주문했다. 히피 차림의 바텐더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컵 받침 위에 병을 올렸다. “아 유 레게?” 그는 연신 무언가를 씹고 있었는데, 입에서는 지독한 풀 비린내가 풍겼다. “지금이 몇 시야?” 내가 묻자 그는 아주 멍청한 표정으로 밴드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 남자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탬버린을 흔들었다. 나는 노래 하나가 끝날 때까지 맥주를 홀짝이다가 흐느적대며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서있었다. 반쯤 눈이 풀린 사람들. 그들을 따라 싸구려 양주가 담긴 바스켓을 쥐고 공터로 나갔다. 모닥불 주위에 잡풀이 무성했고, 대여섯 명의 남녀가 길게 누인 나무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눈 화장이 진한 여자가 내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안녕.” 나는 그들 사이에 앉았다. 코에 커다란 피어싱을 한 남자가 “안-녕.”이라며 흐느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마른 풀잎을 종이에 말아 내게 건넸다. 한 모금, 두 모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쓰고 떫은 기침을 토했고, 여자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녀는 바스켓에 꽂힌 빨대를 빨면서 “핫바를 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 손에서 담배를 가져가 오랫동안 빨아들였다.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말하자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담배를 건넸고, 나는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연기를 마셨다.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맑아진 눈으로 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혹은 어떤 상태인지, 모든 것을 지켜봤다. “너희가 말로를 알아?” 내가 소리 지르자, 누군가 “말로가 뭐야?”라고 물었고, 나는 그에게 “꺼져.”라고 한국말로 대답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기분.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었다. 모두 일어나 춤을 췄다. 울거나 웃거나, 무엇 때문인지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늪으로 들어간 코끼리는
어떻게 사라지는지
에밀리의 책장, 에밀리의 화분. 그러나 말로는 없는 방.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차갑고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짚고 갔는데, 그것 역시 꿈처럼 느껴졌다. 겨우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정원을 손질하던 알렉스가 허리를 길게 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좀 어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로는?”, “너는 항상 똑같은 질문만 하는구나? 그녀는 떠났어.”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알렉스가 웃었다. “저기 네 엄마가 돌아왔네.” 검게 그을린 얼굴의 말로가 호텔로 들어왔다. “좀 있으면 저녁이 준비될 거야. 그동안 네 엄마에게 혼 좀 나고 있어.” 알렉스는 내 어깨를 툭 친 다음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는 둥그런 나무 식탁에 둘러앉았다. 알렉스는 손수 음식을 덜어주며 밤에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아주 늦은 밤, 내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로의 말에, 둘은 직접 거리로 나섰다고 했다. 그들은 거리의 주정뱅이들에게 너무나도 평범한 나의 외모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시장과 골목,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자 내가 강물에 빠졌을 거라고 단정했다. 현지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해 함께 수색을 다닐 무렵, 텅 빈 거리에서 달려오는 반라의 주정뱅이를 보고야 말았다며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넌 칼 루이스처럼 달려왔어.”, “너는 정말 미쳤어.” 경찰관의 볼에 정신없이 뽀뽀를 하고 사랑한다고 수없이 외쳤다는 한 주정뱅이의 영웅담을 들으며, 나는 접시에 거의 고개를 처박고 음식을 먹었다. 나는 지난 밤 내가 겪은 일들에 대해, 그 사람과 음악과 장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런 정원은 어디에도 없다고 알렉스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아마도 넌 숨겨진 정원에 다녀온 거구나. 맨 정신으로는 찾기 힘든 곳이지.”
우리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었다. 그러고는 맥주를 하나씩 들고 정원이 보이는 나무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코끼리는 찾았니?” 알렉스의 말에 말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두 발을 앞으로 길게 뻗은 채 허공에서 까닥거렸다. “온통 먼지와 흙뿐이었어.” 말로의 대답에 알렉스가 내게 설명했다. “네가 뻗어있을 때 엄마는 코끼리 사냥을 다녀왔어.” 알렉스는 빠이 캐년이라고 불리는 작은 협곡에 대해 말했다. 그는 그곳이 이 작은 마을에 코끼리가 숨어있을 만한 거의 유일한 곳이라고 덧붙였다. “코끼리는 보지 못했어. 좁은 길을 걷는데 반대편에서 누군가 걸어왔거든.
발밑은 낭떠러지였고, 무서워서 다시 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이 내 옆을 지나쳐 갔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어.”, “아마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럴까?” 말로는 양손으로 병을 쥐고 조금씩 나눠 마셨다.
알렉스는 담요를 꺼내와 우리에게 건네며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 너는 지금 사랑하고 있니?” 문득 말로가 물었고, 알렉스는 조금 머뭇거렸다. 그러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이 정부군의 장교였으며 반란군에게 총을 겨눴다는 이야기. 폐허가 된 마을에 버려진 전쟁고아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반쯤 부서진 침대 위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울고 있던 한 아기에 대한 이야기. 그는 만약 에밀리가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쏜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말로와 나는 아주 철저한 이방인의 표정으로 알렉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야.” 알렉스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잠깐 말이 없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주가 떨어졌어.” 그는 다리를 절며 식당으로 걸어갔고,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말로는 조금 더 깊숙이 의자 속으로 몸을 묻었다.
얼마 후 알렉스는 맥주 세 병을 들고 나왔다. 우리는 병을 부딪쳤다. “너희는 코끼리가 어디에서 죽는지 알고 있니?” 알렉스가 말했다. “밀렵꾼들은 알지 않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알렉스는 수염에 묻은 맥주를 닦았다. “코끼리는 늪에서 죽어. 나이가 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질 때, 씹기 좋은 풀을 찾아서 조금씩 늪으로 들어가는 거지. 그러다 천천히 사라지는 거야.” 알렉스는 우리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코끼리가 사라지는 걸 볼 수가 없어. 그의 냄새도, 두꺼운 피부도, 길고 커다란 코조차도 말이야. 언제 사라진지 몰라서. 그래서 아주 오래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꽃이 피기 직전의 나무들, 에밀리가 돌아오기 전까지 한 남자가 거대한 몸을 이끌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가지를 치고 흙을 다듬던 작은 정원을. 커다란 녹색 이파리에 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아주 많은 비가 내리며 정원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때 말로가 나를 보며 아주 촌스럽고 밝은 표정으로 무언가 말했는데, 커다란 빗소리에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글 김건태
일러스트 이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