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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담은 정원의 찰나들
정원을 탐험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취향을 담은 정원의 찰나들
정원은 누군가의 취향이나 애정,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담은 공간이다. 식물의 크기, 화분의 색깔, 연못의 위치, 돌멩이의 촉감. 그 안의 모든 것이 정원의 주인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그곳이 정원이었던 공간들. 각자의 정원으로 모여들었던 장면을 모았다.
영원이 모이는 정원
옥자 Okja, 2017
에디터 이자연
“I want to buy Okja, ALIVE.”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으로 종종 상인이 모였다. 조악한 장난감이나 불량식품을 팔았고 이따금 요구르트 아주머니나 학습지 선생님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어느 날 트럭 아저씨가 커다란 상자를 꺼냈는데 그 안으로 몇 마리의 병아리가 보였다. 아저씨는 마리당 5백원에 판다고 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조용히 한 마리를 골랐다. 그건 나의 ‘삐약이’였다. 고양이는 나비, 강아지는 백구, 병아리는 삐약이. 진부한 이름표를 얻은 내 친구는 검은 봉지에 담겨 건네졌다. 전형적인 거래의 형태로 내 품으로 들어온 것이다. 삐약이는 이틀 정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집 뒷길에 인적 드문 땅을 찾아 삐약이를 묻어주면서 악악대고 울었다. 엄마가 삐약이의 천국을 위해 기도해주라고 했다. 대답 없이 걸었다. 앞으로 아무것도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재앙일 뿐이었다.
미자가 옥자를 만나게 된 것도 일종의 거래 형태였다. 미자는 할아버지에게 계속해서 확신을 요구한다. “옥자 우리가 샀잖아. 이제 우리 거잖아.” 거래 끝에 온 친구, 하지만 이제는 완전한 나의 일부기도 한 옥자. 눈을 뜨고 잠자기 전까지 온통 세상은 그 둘의 편이다.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고, 단감을 씻어 먹고, 풀숲에서 뒹굴고 놀다가, 살을 부대끼며 함께 낮잠을 잔다. 집 앞 너른 숲속이 둘만의 영원한 시간을 그대로 쏟아낸 정원이 되는 셈이다. 사랑이 널찍이 자리한 것처럼.
미란도가 수많은 ‘옥자들’을 다시 회사로 데려가면서 미자는 옥자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미자가 미란도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통유리를 마주했을 때, 나는 그녀가 진입하지 못한 미란도의 세상을 느꼈다. 그리고 곧 유리는 깨지고 만다. 그건 하나의 신호였을 거다. 옥자를 찾을 거야, 옥자를 찾기 위해 뭐든 할 거야, 옥자를 둘러싼 모든 유리벽을 깨부술 거야. 평화로웠던 정원이 위협을 받고 흔들리면서 유일하게 단단해지는 것은 서로를 향한 그리움뿐이다.
현대인의 또 다른 이름이 소비자가 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옥자에게 작은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의 아름다운 정원을 한 번씩은 침범했고, 겁을 주었고, 또 가끔은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파괴와 살상으로 빼곡히 차오른 세상을 해독하는 것은 상상력이다. 옥자의 눈을 보고, 미자의 외침을 들으며 우리는 둘 사이의 간격을 상상으로 재어본다. 그 뒤에야 비로소 소란을 멈출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상상을 지속하는 것은 모두의 숙제기도 하다.
옥자와 미자 사이로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돈에 굶주린 자본가, 옥자의 팔자를 강조하는 할아버지, 그들을 구출하려는 동물보호단체, 겉과 속이 철저히 다른 방송인. 그들 사이로 내 얼굴은 어떤 빛을 비추고 있을까. 다만 숲과 어울리는 표정이었으면 좋겠다. 미자와 옥자 사이로 들어가 함께 놀고 싶으니까.
바다를 품은 정원
안경 Glasses, 2007
마케터 최현희
“여기서 마시는 맥주도 최고지만
사색하는 것도 최고네요.”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바다에 가지 않으면 왠지 서운하다. 그렇다고 수영을 잘하는 것도, 물놀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볼 뿐이다. 수평선이나 파도치는 물결을 본다. 그럴 때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고요한 그 순간이 좋아, 나는 종종 바닷가 앞 나만의 정원을 상상하곤 했다. 일상의 쳇바퀴에서 튕겨 나와 도망치듯 섬에 도착한 타에코. 지친 그녀의 눈에 섬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하다. 바닷가 앞에서 수상한 체조를 하고, 빈둥대다가 수업에 늦으며, 관광할 곳을 물으면 그런 곳은 없으니 사색을 해보라는 답변만 늘어놓는 게 영 불편하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모습에 이질감을 느낀 타에코는 하마다 민박을 떠나 다른 숙소로 향한다.
사색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는 사람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도착한 곳은 밭일 체험 콘셉트의 숙소다. 호미를 쥐여주는 주인장에 타에코는 질겁하며 뛰쳐나온다. 한참 동안 커다란 캐리어를 끌다가 주저앉은 그녀 앞에 자전거를 탄 사쿠라가 나타난다. 간신히 뒷자리에 올라탄 타에코는 결국 캐리어를 길에 두고 온다. 커다란 짐짝을 버린 후부터 마음의 짐도 덜어진 것일까. 그녀는 좋아하지 않는 빙수를 먹어보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바닷가 앞 빙수 가게는 매년 봄에만 문을 연다. 가게 주인 사쿠라가 그때 섬을 찾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빙수 맛 하나는 최고라는 것이다. 맛있는 빙수를 먹으러 하나둘 모이다 보면 가게는 어느새 섬사람들의 아지트가 된다. 얼음 장수, 민박 주인 유지, 생물 선생님 하루나, 아이들까지 모두 가게 앞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 간다. 먼 산 보듯 바다를 바라보며 빙수를 먹는 그들의 표정은 마냥 평화롭다. 사쿠라는 빙수 값을 받지 않는 대신 손님들의 마음을 받는다. 어떤 아이는 고이 접은 종이 접기를 전하고, 유지와 하루나는 만돌린 연주를 정성껏 들려준다.
때때로 가게 앞에서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거나 바둑을 두거나 체조를 한다. 누군가는 멍하게 있고 누군가는 시를 읊는다. 의식적으로 멈추려 하지 않아도 빙수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이 공간에서는 파도 소리와 드넓은 바다가 배경이 되어, 침묵을 깨지 않고 생각에 잠긴 서로를 존중한다. 사쿠라의 빙수 가게는 여러모로 사색하기 딱 좋은 공간이다.
여름을 알리는 비가 내리고 빙수 가게는 문을 닫는다. 사쿠라는 떠났다. 하지만 바닷가 앞 빙수 가게는 섬 사람들 마음에 남아 ‘모두의 정원’이라고 불릴 것이다. 길을 걷다 쉬어가는 곳, 계속 찾고 싶은 곳, 마음을 전하는 곳, 사람들이 아끼는 그곳은 그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모인 공간이자, 어떤 조형물보다 아름다운 바다를 품은 정원이기 때문이다.
맛있는 요리가 있는 정원
줄리 & 줄리아 Julie & Julia, 2009
디자이너 최인애
“Bon appétit (잘 먹겠습니다)!”
나는 주기적으로 친구와 한 가지 음식을 정해 장을 보고 같이 요리를 해 먹는다. 요리를 잘하는 친구가 불 앞에서 재료를 지지고 볶으면, 옆에서 나는 보조 도우미가 되어 설거지와 주변 정리를 하곤 한다. 하루는 프랑스 요리를 만들어 먹고 있는데 친구가 말했다. “디자인은 답이 없는데 요리는 확실해서 좋아. 이건 어떤 맛이 나고 어떤 걸 넣으면 맛있어지는지 알잖아.”
줄리도 그렇다. 줄리는 남편과 함께 퀸스타운에 위치한 작은 피자집 2층으로 이사를 왔다. 그녀는 테러 피해자 담당 공무원으로 매일같이 피해자들의 불만과 눈물, 고통이 섞인 전화를 받으며 일한다. 피자집 위층에 사는 것도, 남들의 불만을 듣는 것도 점점 지쳐서 맘에 드는 것이 없다. 그럴 때면 그녀는 집에 돌아가 자신만의 공간인 부엌에서 좋아하는 요리를 하며 하루의 고단함을 날리곤 한다. 줄리는 남편에게 말한다. “직장 일은 예측불허잖아.
무슨 일 생길지 짐작도 못 하는데 요리는 확실해서 좋아.” 그렇게 시작된 ‘365일 524레시피 프로젝트’. 1년을 기한으로 두고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을 마스터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처음엔 구독자가 없었지만 꾸준한 도전에 응원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심지어 《뉴욕 타임스》 1면에 실리기도 한다. 그녀의 도전에 관심을 가진 여러 출판사와 TV프로의 러브콜로 자동응답기는 조용할 새가 없을 정도다.
줄리아 차일드는 전설의 프렌치 셰프이자 유명 요리책 《프랑스 요리의 달인 되는 법》의 저자다. 사실 그녀가 처음부터 요리를 잘했던 건 아니다.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프랑스로 날아와 정착한 그녀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금세 적응했다. 하지만 그녀도 줄리와 마찬가지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하다 우연히 프랑스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요리는 그녀의 모든 일상을 채우고 새로운 원동력이 된다. 그녀 곁에 요리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이고 함께 요리책 출판에도 성공하게 된다.
내 친구와 줄리, 줄리아가 부엌을 맛있는 요리들로 채우며 자신감을 얻고 마음의 쉼을 얻은 것처럼 꼭 풀과 나무가 있는 정원이 아니어도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서 힘을 채워줄 나만의 정원이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엽서와 그림으로 꾸며진 책상이 나만의 정원이고, 그림 그리는 일이 나의 가드닝일지도 모르겠다.
에디터 이자연
글 이자연, 최인애, 최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