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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지속하기를 선택하는 ― 하지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스물네 번의 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쓰다듬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록한다.
농부는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제 와 다른 작물로 바꿔 심지 않는다. 양기가 기승을 부리는 이 시기에는 마음도 왕성한 태양의 열기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면서 욕심내기 십상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다시 음기를 돌보며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역시 하루 이틀 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겨울을 준비할 무렵이 되어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밤의 시간과 낮의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는 건 정말일까? 왜 밤은 언제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걸까. 그런데도 하고 싶은 일들은 유독 밤에 떠오르고, 아침은 매번 서둘러 찾아온다. 한 해 중 낮이 가장 긴 ‘하지’에는 실제로 제일 길이가 짧은 밤을 우리 모두가 만난다.
그 짧은 밤의 시간 동안 대체 무엇을 더 하려고 하는지 살펴보면 대부분이 낮에 하던 일들의 연장선이다. 읽다가 덮어둔 책을 마저 읽고 싶어서 침실에 여러 권을 챙겨가는 것은 이제 일상이고, 낮에는 분주하게 보내느라 켜보지도 않았던 넷플릭스를 늦은 밤에 열어 영화의 섬네일들을 기웃거리다가 언젠가 보고 싶은 영화들을 ‘내가 찜한 콘텐츠’ 목록에 추가한다. 그 시간에 재생 버튼을 누르고 영화 한 편을 다 본 기억은 손에 꼽는데도, 텅 빈 마음에 돌멩이 하나 들어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면 미래의 나를 위해 무어라도 준비해 두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공허한 마음의 먹이를 찾아 헤맨다. 오늘에게는 자꾸만 미련이 남고, 성장과 활력에 대해서는 좀처럼 욕망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렇게 밤의 시간을 보내느라 잠이 부족해도 아침이 되면 어떻게든 일어나 일터로 간다. 잘 시간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면 음의 에너지가 부족해져서 얼굴이 파삭하게 거칠어지고, 마음은 음양의 균형이 깨져 흔들린다. 그래도 살면서 배웠던 웃는 표정을 온몸 가득 감싸 입고 숨기고 싶은 것들을 다 가린 채 가야 할 곳에 가는 것이다. 제시간에 장소에 도착하지 않으면 기다리지 않았던 연락이 내게 먼저 도착할 것을 알고 있으니까.
낮에는 책을 읽거나 일과 요가를 하기도 하고, 음식도 먹는다. 이 모든 낮에 하는 일들은 그때그때 하지 않으면 금세 티가 난다. 그러니 낮에 할 수 있는 것 중 해야 하는 일들은 최대한 미루지 않고 한다. 오늘 먹을 밥을 내일로 미루지도 않고, 출근해야 할 곳에 간다. 그런 일들을 미루면 삶이 빠르게 환대하기 어려운 모양을 하고 마니까 그게 겁이 나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이제는 확실하게 아는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보내지 않은 낮이 금세 낯빛을 바꾸는 것과 달리 제대로 보내지 않은 밤은 덤덤한 표정 일색이다. 음의 에너지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은, 양의 에너지보다 느린 음의 에너지 속성처럼 뒤늦게 밝혀진다. 낮의 마음으로 밤을 보내다가 늦게 잠들었다고 누군가에게 연락이 오지도 않고, 어둠의 시간 내내 한낮의 분주한 태도로 지냈다고 해서 혼내는 사람도 없다. 얼른 자라고 잔소리하던 어른들은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집에 없고, 이 집에서 나는 나를 키울 뿐이다.
계속해서 모른 척할 수 있을 것처럼 상황을 외면하며 분주하고 소란한 밤의 시간을 보내다가 그 피로감이 누적되어 몸과 마음에 생채기가 나고 말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아니 그보다 여러 번 탈이 반복해서 날 때까지 알아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상처가 곪아서 밖으로 진물이 흘러나오니 그제야 제대로 본다.
최근에는 그렇게 오래 덮어두었거나 생략해 버렸던 것들이 다 보였다. 밤에 돌보아야 하는 휴식과 회복을 향한 노력의 결핍, 하나하나는 작아 보이지만 한자리에 모이고 나니 큰 덩어리가 되어버린 그것이 심장을 누르는 장면을 줄곧 마주한다. 누군가는 번아웃이라는 표현을 쓰고 또 어떤 이는 우울증이라고도 부르는 증상들. 서둘러 결론 내리려 했던 작은 조각들의 습격 같았다. 하나의 상황을 얼른 이해하고 다음으로 넘어가 어서 멀리 걷고 싶은 마음, 단번에 종이접기 하듯 탁탁 접어 단정하게 만들어 버린 많은 현재가 뒤늦게 탁한 냄새가 나는 까만 꽃을 피웠다. 몸의 사정도 마음의 갈피들도 너무 빨리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된다면 그건 과거 경험의 언어로 현재를 정리해 버린 탓일 수도 있다. 생은 단순하기도 하지만 또 그렇게까지 단순한 일만 일어나지도 않는 장소이다. 복잡한 삶의 조각을 너무 서둘러, 부자연스러울 만큼 선명한 언어를 통해 쉽게 정리해버리면 오히려 먼 훗날, 제대로 소화되지 않았기에 악취가 나는 덩어리로 눈앞에 드러나기도 한다. 새로운 경험들은 자주 사용해 본 적 없는 낯선 단어들로 서서히 정리가 될 것이고 그건 그렇게 순식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요즘 나는 여기에 서서 긴 시간을 사용하며 마음을 닦아내어 보고 만져보고 느껴보면서 안아주어야 하는 것들을 살피는 중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해 나가보자고 다짐은 했지만,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고 나무들이 무성해지는 때가 오니 다시 한낮의 눈빛으로 어둠을 응시하면서 스스로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밖으로 너무 멀리 가려고, 혹은 더 많은 것들을 품에 안아보려고 욕심 내며 새로운 많은 일들을 시도하는 것은 지금 도착한 ‘하지’에는 적당한 일이 아니다. 농부는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제 와 다른 작물로 바꿔 심지 않는다. 양기가 기승을 부리는 이 시기에는 마음도 왕성한 태양의 열기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면서 욕심내기 십상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다시 음기를 돌보며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역시 하루 이틀 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겨울을 준비할 무렵이 되어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양기가 새롭게 도전하는 것 안에 있다면 음기는 이미 시작해 둔 것을 유지하는 것 안에 있다. 올해 내 삶에서 씨앗으로 삼으며 시작하고 물을 주고 있는 것은 그늘진 마음을 잘 돌보는 일과 실제 밤이 되었을 때 이렇다 할 이룬 것이 없는 날에도 눈을 감고 쉬는 일이다. 손쉽게 지금의 상황을 결론 내리려 하지 않고 아득하고 막막한 마음 곁에서 머무르는 연습, 수련하는 요가 동작들이 제자리걸음 같아도 계속해서 해보고, 수많은 마음의 뒤척임으로 인해 매번 어깨가 뭉쳐도 두 팔을 사방으로 열면서 숨 쉬는 시간을 갖는다. 당장 성과가 드러나지 않아도 살피기로 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묵묵히 유지하기로 한다. 지속하려고 노력했던 거북이 같은 시간은 매번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잠재력이 되는데, 이 시기에는 그러함을 더욱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몸은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잘 돼야 건강한데, 그 말인즉 차가운 기운은 올라가게 하고 뜨거운 기운은 내려가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 ‘하지’의 양기는 머리로 열을 올려 더위를 먹게 하는데 거기에 더해 더 많은 걸 해내려는 생각들이 머리를 더욱 뜨거워지게 한다. 쉽게 효과가 드러나지 않으니까 더운 날씨에 특히 멈추고 싶어지는 몸의 움직임들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내는 것은 발을 차가워지게 한다. 이것이 수승화강이 어려운 상태인데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빠르게 정돈되지 않아 막막한 마음이 되고 마는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을 멈춘 채 기다림을 택하고, 속도감 있게 성장하지 않는 몸 앞에서는 나를 무겁게 하는 기대 대신 가볍게 한 번 더 해보기를 택하면 된다. 다리의 근육들은 지루해도 단련하고, 크게 숨 쉬면서 어깨의 긴장을 내려놓는다.
‘하지’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고비를 맞게 되는데 그때에는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우제를 지낸다. 그리고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왔다고 한다. 하늘이 감동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으니까. 나는 이 기우제 이야기가 무척이나 좋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어딘가에서 비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 어려운 밤의 어둠 속에서 기약 없이 나를 안아주는 아득한 시간을 어루만지는 것 같다. 결국 밤은 매번 아침에 도착하고, 비는 때가 되면 내리게 되어있다. 우주의 율동과도 같은 커다란 오르내림 속에서 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과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 할 수 없는 일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것뿐이다.
*하지(夏至) : 24절기 중 열번째로,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긴 절기. 하지 이후로 기온이 상승하여 몹시 더워진다.
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