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따라 걷는 사람

이수지 — 그림책 작가

일과 삶에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내달려본 사람을 만났다. 어디에 가닿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즐거워 보이는 길이라면 일단 걸어본 사람. 두려움은 없었는지, 힘겹지는 않았는지 물어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그림책 작가 이수지를 용감하게 만든 건 앞서 재미 좇아 살아간 사람들이 일궈 놓은 더 넓은 세계, 그리고 실패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나는 재미의 꼬리를 밟는 인생의 실체를 보았다.

(열린 현관문 틈 사이로) 작가님,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어머, 어서 오세요. 그냥 문고리 당기시면 되는데. 편하게 들어오시라고 일부러 살짝 열어둔 거예요. 

 

당기면 열리는 거였군요(웃음). 반갑습니다. 그림 그리는 모습이 문틈으로 보여서 잘 찾아왔구나 했어요. 

4월에 제주에서 전시를 열 예정이라 준비가 한창이에요. 여기 앉으세요. 커피 드릴까요? 

 

따듯한 물 한 잔 부탁드려요. 재밌는 게, 작업실 아래층이 어린이 미술학원이에요. 오는 길에도 미술학원이 꽤 많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에 작업실을 구한 건 아니고요(웃음). 집이 근처예요. 아이들이 어릴 땐 경기도 양평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서울로 이사했어요. 작업실을 쓴 지는 5년 차네요. 

 

아이들도 그새 많이 자랐겠어요. 

큰애는 고3, 작은애는 고1이에요. 입시에 찌들어 있죠(웃음). 마침 어제가 개학이라 큰애는 고3의 첫날을 맞은 거였는데 등교 앞두고 덤덤하더라고요. 친구들 보고 싶다고, 빨리 학교 가고 싶다고. 

 

방학은 아무래도 지루하니까요(웃음). 오늘은 조금 색다른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만약 한 아이가 작가님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어요? 

질문지를 받고 고민해 봤는데요. ‘세상 모든 것을 손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이야기가 될 만하다고 생각하면 그림으로 표현하고 책으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소개할게요. 

 

어떤 소재가 이야기가 될 만한가요? 

질문한 아이도 에디터님과 똑같이 물어보겠죠? 저는 뭐든지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아는 옛이야기처럼 사건사고나 기승전결이 있는 소재뿐만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의 분위기, 에디터님이 입고 있는 옷 같은 모든 것에서 시작될 수도 있죠. 내 마음속에 저장된 생각들이 새로운 것과 만나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순간이 오기도 해요. 서로 관련 없던 것들이 연결되는 순간이요. 

 

어른들에게는 자신을 꼭 ‘그림책 작가’라고 소개하세요. ‘동화 작가’라는 호칭은 정정하기도 하고요. 

사람은 나를 규정하는 말로 내가 하는 일을 더 선명하게 인식해요. 저는 그림책 작가라는 말이 저를 정말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림이 잔뜩 있는 책은 그림책,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은 작가라면 저는 그림을 책으로 만드는 사람이니 두 단어에 제가 다 담긴 거죠. 동화는 그림이 없어도 되지만요. 그리고 그림책은 모든 연령이 보는 책이라 ‘아이 동童’ 자로 시작하는 동화와 달라요. 예전에는 그림책을 독립된 예술 장르로 봐주길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호칭을 명확히 하긴 했는데, 동화책 작가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래도 돼요(웃음). 

 

작가님 작품은 ‘글 없는 그림책’으로 알려져 있어요. 글보다 그림이 가득한 책을 만드는 이유가 있나요? 

그림은 글과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요. 예를 들어 《파도야 놀자》 표지에는 아이가 바다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그려져 있는데요. 우리가 바다에 가면 숙연해지곤 하죠. 거대한 자연을 보면 나의 고민이 작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자연에 압도된 느낌을 표정 없이 뒷모습으로만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 감각을 글로 전달하는 것과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건 너무나 달라요. 그림은 많은 생각을 동시다발적으로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죠. 그런 이미지 여러 장이 이어지면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것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을 거예요.

《파도야 놀자》

이야기의 해석을 독자에게 맡기는 거군요. 

그렇죠. 그림이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고유한 방식을 강조해 보고 싶은 거예요. 그림은 다층적인 이야기를 한꺼번에 전할 수 있어요. 최근작 《춤을 추었어》에서는 주인공 아이가 뛰노는 세상에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는데, 전쟁 장면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져요. 모티브가 된 건 어느 날 본 포털사이트인데 오류였는지 사진은 여의도 불꽃놀이 축제고, 제목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인 거예요. 축제가 열린 그날 하마스는 불꽃놀이처럼 보이는 로켓포로 이스라엘을 공격했거든요. 아름다워 보이는 포탄이 사실은 파괴의 불꽃놀이라는 걸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만약 이 내용을 구구절절 쓴다면, 효과는 반감될 거예요. 그림은 A는 A야.’라고 명확히 설명하지 않으니까 빨리 와닿지 않아요. 그게 그림의 장점이자 어렵다고 느끼기 쉬운 한계겠죠. 독자가 제 의도까지 생각이 미치면 좋은 거고, 자기만의 해석을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같은 건 아니고요(웃음). 저는 이야기를 계속 끌고 가되, 디테일을 어떻게 보느냐는 읽는 사람의 몫인 거죠. 독자가 자신이 수 있는 최대한 멀리까지 가보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작품을 굉장히 창의적으로 해석할 것 같아요. 

맞아요. 잘 모르겠으면 그냥 마음대로 해석해요. 들어보면 꽤 그럴싸하죠.《거울 속으로》라는 책에는 주인공 그림을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반전해서 나란히 붙여놓았어요. 아이들에게 뭐가 달라졌냐고 물으니까 한 친구가 한쪽 다리가 더 짧아진 것 같대요(웃음) . 책에 나오지 않는 앞뒤 상황을 상상해서 덧붙이기도 하죠. 그런데 어른들은 잘 못해요. 내 생각이 정답이 아닐까 봐. 그래서 자꾸 작가에게 해석을 확인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과 책을 읽으면 뭐랄까, 너무 오래 걸려요. 자기가 아는 모든 이야기해야 넘어가거든요. 바다 장면이 나오면 이번 여름에 자기가 갔던 바다는 어땠는지, 왜 가게 됐는지 이야길 들려주죠. 아직 몇 페이지 보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훌쩍 흘러요. 그림책은 사실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있는 책이에요. 어른들이 읽어줄 게 없다고 휙휙 넘기면 아쉽죠. 

 

책 한 권은 어떻게 탄생하나요? 

책마다 다른데요. 정말 공들여서 스토리보드를 짜거나 갑자기 든 생각을 빠르게 책으로 만들기도 해요. 영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기보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확장해 가는 거예요. 전부터 구멍이 난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어느 날 간송미술관에서 심사정의 ‘고성삼일포’라는 그림을 봤어요. 흰 점이 여러 개 있길래 눈 오는 풍경을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설명을 읽어보니 동그랗게 좀먹은 흔적인 거예요. 종이가 접힌 채로 좀먹어서 구멍이 대칭으로 났죠. 눈 오는 듯한 풍경이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아서 일부러 구멍을 메우지 않았대요. 너무 재밌잖아요. 그 자리에서 바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대칭으로 눈이 내리다가 결국 하얗게 덮여서 삼일포 풍경이 사라지는 책. 그렇게 탄생한눈 내리는 삼일포는 표지에 동그란 구멍을 냈어요.

이런 표현 진부하지만… 천재적이에요.

천재적이라기보다는 실행력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해도 막상 추진하기는 어렵잖아요. 무언가를 반드시 만들어서 손에 쥐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끌고 갈 수 있어요. 

 

그럼 작가님의 동력은 욕망인가요? 

재미죠. 재미. 

 

그림 그리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 계기를 기억하세요? 

되짚어보니 계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부모님을 졸라 동네 화실에 갔어요. ‘명원 화실’이라고. 어른들이 아이들 그림은 다 칭찬하잖아요. 저는 그 말을 믿는 아이와 안 믿는 아이로 나뉜다고 생각해요. 저는 칭찬이 진짜인 줄 알았던 아이였고요(웃음). 거기 화실 선생님이 되게 특이했어요. 그림 잘 그리는 법을 알려주기보다는 “응, 왔냐? 이제 가냐?” 정도만 하는 사람. 학생들과 분리된 작은 공간에서 개인 작업도 했어요.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고 상상만 하던 화가의 실체를 본 느낌이었죠. 이렇게도 살아가는구나, 나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다.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네요. 얼마 전에는 딸 친구가 작업실에 놀러 왔어요. 그 아이는 이런 공간 처음 볼 거 아니에요, 그쵸? 어쩌면 그 친구에게 제가 명원 화실 선생님처럼 보였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떤 삶의 실체를 보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막연한 동경을 떠나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실제로 마주할 때 피부로 느끼는 감흥은 굉장히 달라요. 

 

저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렇게나 삶의 모습이 다양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어요. 

저는 우리나라 미술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북아트를 배우러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요.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저거 해서 뭘 먹고 살까 싶은데, 작지만 멋진 공간에서 자기만의 책을 만드는 사람부터, 책이 멋지면 되지 다른 게 무슨 소용이겠냐는 포스를 풍기는 사람까지…. 그들의 삶과 작업에 감동하면서 제게는 작고 추상적이던 책의 의미가 점점 커졌어요. 유학할 때 ‘볼로냐 아동도서전’을 처음으로 보러 갔어요. 어마어마하게 큰 공간에 전 세계에서 그림책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모여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죠. 그림책은 어린이를 위한 작은 세계라고만 생각했는데, 도서전에 와보니 그림책은 핑계일 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나도 해보겠다는 생각에 돌아와 급히 첫 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다소 난해한 그 책이 이탈리아에서 정말 출간이 되고 나니, ‘이렇게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어도 되는구나’ 싶었죠. 그렇게 자신감을 얻고 지금에 이르렀네요. 제 삶에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어. 거기는 너무 재밌는 곳이야.’라고 말해주는 계기들이 있었어요.

그때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할 수도 있잖아요. 나는 과연 저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 나는 이 세계에 들어올 자격이 있을까 하고요. 

아니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나도 저렇게 멋진 책 만들고 싶다 같은 마음이 앞섰어요. 내 눈앞의 재미를 좇는 하루살이적인 관점이었달까요. 

 

사실 예술 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격려보다는 걱정의 시선이 앞서기도 하잖아요. 생계를 걱정하는 두려움은 없었어요? 

(고개를 저으며) 없었어요. 근시안적이라 바로 앞의 것만 생각했지,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면 몰라도 미래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품어본 적이 없어요. 예술 하는 사람은 배가 고프다는 말이 있는데요. 뭐, 다른 분야는 안 그런가? 어떤 분야든지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잖아요. 남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대단히 성공하지는 않아요. 어느 길을 가도 힘든데 그럴 바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해야지요(웃음). 

 

그림책 작가로 20년을 살아왔어요. 여전히 일이 재미있으세요? 

네. 늘 재밌진 않지만요. 무슨 일이든 다 그렇잖아요. 에디터님도 이렇게 인터뷰하는 거, 재미없으면 못 할 거 아니에요? 

 

그렇죠. 고역이겠죠. 

어떤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재미예요. 해온 대로 나아간다면 이번에도 역시 재미있을 거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잖아요. 저도 작업이 안 풀리면 괴롭죠. 하지만 결국 결과물이 나온다는 걸 아니까 끝까지 가볼 수 있는 거예요. 사실 지금 준비 중인 전시가 제가 해오던 작업과 조금 다르고, 채워야 할 공간도 커서 처음에는 부담이 됐어요. 그런데 이것 보세요. 얼마 전에 당근에서 5천 원 주고 거래한 거울인데요. 꼭 무대 같아 보이는 거예요. 아래 달린 서랍이 무대 하단 오케스트라 박스 같기도 하고요. 이걸 보면서 전시 공간도 하나의 무대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나는 관람객들이 예술의 놀이터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경험을 하게 해주면 되지 않을까,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걸 하면 되지 않을까. 전시 공간을 얼마나 재밌게 꾸밀지 생각하다 보니까 또 즐겁더라고요. 이제는 욕심이 생겨요. 

 

일에 대한 애정이 가득해 보여요. 그림책 작가로 살아가는 게 좋은 이유도 역시 ‘재미있어서’겠죠? 

네. 저는 이 일이 이렇게 즐거운지 몰랐어요. 그림책 업계에 들어와 보니 동료들이 재밌어요.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엉뚱하고 순수하죠. 그림책 덕분에 여러 나라에 가보게 되었는데 새로운 사람과 세계를 만나는 즐거움이 계속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어린이를 계속 만날 수밖에 없는 직업이라 좋아요. 아이는 뒤에 숨겨 놓은 생각이 없는 존재라 오히려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즐거움을 줘요. 이걸 다 알고서 그림책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건 아니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니 직업의 장점을 발견하게 됐네요. 

 

다른 직업을 택했다면 어떤 일을 했을 것 같으세요? 

질문지 보고 미리 고민해 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답을 해보자면 그림책과 문학, 시각 예술, 음악, 춤 등 여러 예술 장르를 연결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니까, 다양한 장르가 시너지를 내도록 예술 작품을 총괄하는 기획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을까요? 잘했을 것 같아요(웃음).

 

동의해요(웃음).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은 직업은요? 

이것도 생각해 봤는데 딱히 없어요. 기획 일을 하지 않고 작가가 된 이유는 나의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많아서일 거예요. 무슨 일을 하든 나의 것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풀어갔을 것 같아요.

책상에 계속 앉아서 반복된 업무를 하는 것도 괜찮으세요? 

반복된 일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제가 하는 일도 계속 앉아서 엉덩이로 하는 일이긴 해요. 

 

맞아요. 끈기와 인내력이 중요하죠. 그런데 작가님과 달리 일에서 재미를 잃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래도 뭘 하든지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아니면 일에서 내가 살아 있도록 만들든지요. 아니면 빨리 떠나든지,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면 그다음으로 옮겨 가야 해요. 

 

작가님도 그런 선택을 한 적이 있나요? 

바깥에서 보면 제가 그림책 작가라는 직업 안에 계속 머무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만의 선택을 계속해 왔어요. 예를 들면 회화과를 졸업할 무렵에 아르바이트로 일러스트레이션을 했어요. 그런데 순수 미술을 하던 사람이 그래도 되냐며 변절자를 대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게 오히려 명확해졌어요. 내 작업이 세상이 정의한 순수 미술의 카테고리에 포함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직도 편견과는 계속 싸우고 있죠. 그림책은 그냥 어린이용 책 아니냐 같은 말이요. 그런데 어린이가 보는 첫 번째 미술이기 때문에 더 예술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림책으로 아이가 책 읽기가 얼마나 즐거운 행위인지 깨닫고, 평생 나와 함께할 예술에 친숙함을 느낀다면 그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없을 거예요. 사람들이 예술의 범주를 더 넓게 바라보길 바라요. 

 

실패를 대하는 마음을 듣고 싶어요. 출판사에 보낸 원고를 반려당할 때도 많았다고 했죠. 어떤 마음으로 작업을 지속하셨어요? 

물론 화가 나고 슬프지만(웃음), 제 장점이라면 실패를 오래 붙들고 있지 않아요. 이건 됐고 다음에 하고 싶었던 걸 해보자면서 그다음 작업으로 빨리 넘어갔어요. 내 탓이나 남 탓이라는 생각은 안 했던 것 같고요. 그림은 내가 하는 수많은 일 중 하나일 뿐이고, 사활을 걸 만큼 제 작업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양한 나라의 출판사 문을 두드려보는 일은 오히려 재밌는 과정이었어요.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어떤 나라에서는 우울하다며 출간을 거절당한 작품이 다른 곳에서는 좋다는 반응을 얻는 것도 신기하고요.

한국인 최초로 아동문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하셨는데요. 인정과 주목을 받으면서 더 좋은 작업물을 선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었어요? 

없었어요. 격려를 받은 느낌이었죠. 여태 해오던 대로 계속 나아가도 된다고 누군가 손을 들어준 거라고 생각했어요. 부담감을 느끼는 건 미련한 일이에요. 왜 그런 생각을 하죠? 제 아이들이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외모에 관심도 많아지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다 쳐다본다고 생각하더라고요. 하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잖아요. 그래서 제가 “사람들은 너한테 관심 없거든!”이라고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알거든! 내가 좋아서 하는 거거든!”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 말이 맞아요. 수상은 내가 좋아하는 작업을 사람들과 같이 누리고 축하하는 자리일 뿐이에요. 나한테 부끄럽지 않고 재미있는 작업을 하면 누군가는 나와 같은 마음으로 볼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창작자의 태도는 그때 당면한 문제를 첨예하게 맞닥뜨린 다음, 열과 성의를 다해, 솔직하게, 즐겁게 작품을 만드는 거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그럼 창작이라는 일을 꾸준히, 오래,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 꼭 묻고 싶었어요. 

에디터님은 언제 글이 잘 써져요? 

 

음… 전달하고 싶은 바가 명확하게 떠오를 때요. 

그렇죠. 어떤 걸 써야 할지 내가 알고 있을 때. 그러니까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때죠.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아이디어를 얻어도 실제 작업에 돌입하면 할 일이 많아요. 저는 그림을 그리고 나면 책 모양도 고민해야 하고, 단가가 맞는지도 살펴봐야 해요. 스파크가 튀었을 때만 재미있고 나머지는 다 재미없는 일인 거죠. 그런데 그 스파크를 현실화하고 싶어서 이 일을 하는 거잖아요.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잊지 말고,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불씨가 튀었던 첫 마음으로 자꾸 돌아가고 또 돌아가면서 나를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힘들면 좀 쉬고요. 다시 스파크가 튀면 불씨를 잘 살려가면서 또 하나 만드세요. 장대하고 숭고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결심보다는 작은 성공을 해내면 일단 칭찬하세요. 그다음 또 다른 작은 성공을 향해 가는 거죠.

늘 ‘이수지 작가님 마음 자세’로 글을 써야겠어요(웃음). 

(웃음) 힘들 때는 뭐, 징징거리면서 하는 거죠. 그런데 재미가 있어야죠. 무언가를 하고 싶은 사람들만이 가진 눈빛이 있어요. 인상적이고 매력적으로 기억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그 빛이 있었죠. 

 

저도 그 빛을 오래 갖고 싶네요. 아직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 어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찾아야 돼요. 찾는 건 원래 어려워요. 그렇다고 좋아하는 일을 못 찾는 나를 부정할 필요는 없어요. 중요한 건 희미할지라도 맞다고 생각하는 것, 재밌어 보이는 것을 좇아가 보는 거예요. 그 길의 끝에 가면 또 다른 길이 열려요. 계속된 선택을 하면서 나아가는 거죠. 어느 지점까지 왔으니 두 갈래 길이 나오는 거지, 안 가면 몰라요. 아직 좋아하는 일을 모르겠다는 분들은 나아가 보지 않고 제자리에서 걱정만 하는 경우가 많아요. 가끔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데 그림책 작가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저는 괜찮다고 절대 조언하지 않아요. 다음 선택을 할 수 있는 기본 실력까지는 가야 해요. 일단 가보세요, 그래야 다음 길이 열릴 테니까. 가다 보면 어딘가에 닿아 있겠죠. 그럼 그 길이 맞는 거지.

어렵지 않았느냐, 힘들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줄곧 고개를 젓는 그였다. 다른 사람과 외부 환경을 견주며 나를 작게 바라보지 않고, 내 안의 진솔한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걷는 사람. 이수지 작가처럼 조금은 더 대담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나도 재미 따라 인생을 걸을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작업실 밖을 나서며 그와의 대화 속에서 일었던 불씨를 마지막까지 휘휘 잘 살려 보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다시 불씨를 일으키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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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임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