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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
여름이다. 겨울내내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계절이 왔다. 한여름 커다란 그림자 밑에 쪼그리고 앉아 쭈쭈바를 입에 물고 있는 순간을 얼마나 상상했는지 모르겠다. 나의 간절함을 알았는지 근처에 마침 편의점이 새로 생겼고 며칠 전부터는 콘, 막대, 튜브, 컵 등 형태를 바꿔가며 매일 아이스크림을 먹는 호화로움을 누린다. 그렇게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물을 연거푸 마시다 보면 더운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는 기분이다.
오이는 95%가 수분인 갈증 해소 전용 채소이다. 찬 성질을 가진 오이는 뜨거운 우리 몸에 수분을 공급하고 체온을 안정시켜 준다. 여름날 오랜 시간 자외선에 노출된 얼굴 위에 오이를 얇게 썰어 올리는 이유도 이러한 오이의 열을 식히는 효과 때문이다. 게다가 알코올 분해 능력까지 뛰어나다 하니 여름밤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날엔 들어가는 길에 오이를 사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자니 살짝 겨울이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추운 날의 나를 생각하며 여름의 짜릿함을 조금 더 누려볼까 한다.
RECIPE 01
오이와 토마토와 가지를 넣어
여름을 볶다
문득 무언가를 떠오르게 하는 힘을 가진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오이를 한입 베어 물 때면 언제나 여름이 떠오른다. 차가운 얼음물 속에 담긴 초록빛 오이와 매미 울음소리, 동그란 부채, 등으로 흘러내리는 땀 한 방울. 그와 함께 여름의 이런저런 기억이 방울방울 머릿속을 떠다닌다. 종종 좋지 않았던 기억의 회로에 스위치가 올라가는 순간에는 덩달아 오이의 맛도 씁쓸해지지만,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제철일 때 가장 맛있다는 것은 모든 작물이 마찬가지겠지만 오이는 그 차이가 확연하다. 과육의 튼실함과 수분의 충실함은 여름에만 가능한 일이다.
재 료
오이 1개, 가지 1개, 토마토 1개, 올리브오일 2Ts, 다진 마늘 1ts, 소금, 후추, 파르메산치즈 가루 적당량
* Ts(테이블스푼), ts(티스푼)
TIP
오이를 손질할 때 표면에 소금을 묻혀 도마에서 굴리거나 양손으로 비비듯 문지른다. 수분이 조금 나오면 채 위에 올려 뜨거운 물을 골고루 두른다. 열기를 식힌 뒤 마른 천이나 키친타월로 물기를 닦는다. 이 과정을 거치면 오이 특유의 풋내가 사라지고 깨끗한 맛이 남는다.
만드는 법
오이, 가지, 토마토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넣어 약한 불에서 향을 낸다. 제일 먼저 가지를 넣고 중간 불에서 볶는다. 가지가 노릇해지면 토마토를 넣고 소금, 후추로 간을 맞춘다. 토마토가 적당히 익으면 오이를 넣고 가볍게 볶은 뒤 접시에 담아 파르메산치즈 가루를 뿌린다. 토마토를 너무 많이 볶아 물러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RECIPE 02
오이를 두들겨 부숴
버무리다
어릴 때는 많은 지식을 가진 어른들이 훌륭해 보였다.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노래의 한 구절 같은 대답이 술술 돌아올 때면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곤 했었다. 하지만 어렸던 내가 우러러보던 어른들의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그 기준은 빙그르르 반대로 뒤집어진다. 어른들의 훌륭함이 언제나 지식의 양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진을 찍으려던 내가 회화과로 대학진학을 결심한 이유도 비슷했다. 세상엔 아름답고 복잡한 것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 방대한 무언가를 보기 전에 우선 마음을 유연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사실 지금도 마음속은 변함없이 알쏭달쏭하다. 하지만 훌륭한 어른을 구별해내는 눈 하나는 전보다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재 료
오이 1개, 말린 톳 혹은 말린 다시마 10g, 간장 1Ts, 식초 1Ts, 가쓰오부시 적당량 1g, 참깨 적당량
* Ts(테이블스푼), ts(티스푼)
TIP
오이를 두들겨 부수면 멋대로 울퉁불퉁 부서진 표면으로 간이 더 잘 스며든다. 비교적 단시간에 절임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만드는 법
말린 톳 또는 다시마를 물에 불려둔다. 오이를 잘 씻은 뒤 도마 위에 놓고 밀대와 같은 도구로 3~4회 내려친다. 부서진 오이는 4~5cm의 길이로 자른다. 불려둔 톳/다시마를 잘게 손질한다. 볼에 모든 재료를 넣고 버무린다.
RECIPE 03
오이와 숙주를
아삭하게 무쳐
차게 식히다
친구가 지나가는 연인의 커플 운동화를 유심히 보더니 말한다. 남자의 운동화는 뒤끝이 너덜너덜하게 닳아있는데 여자의 운동화는 마치 새것 같았다며 아무래도 남자가 여자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고. 아니야, 여자는 종종 구두를 신었기 때문일 거야, 하고 동정의 말을 던져보지만 왠지 모르게 짠한 기분이 된다. 갑자기 문득 옛 연인이 떠오른다. 무뚝뚝한 그는 나의 어깨에 손을 두르지도 손을 맞잡지도 않은 채 언제나 20cm는 거리를 두고 걸었다. 우리가 운동화를 맞춰 신었었다면 나의 운동화만 밑창이 닳아있었을까? 하지만 그래도 좋다. 사랑은 언제나 닳아버린 마음만큼 짙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기에 그 어떤 불공평함조차 용서가 된다. 눈을 감기 전까지 나의 모든 것이 닳아 없어져도 슬프지 않을 사랑을 하고 싶다.
재 료
숙주 한 줌, 오이 1개, 어묵 적당량, 설탕 1Ts, 식초 1Ts, 간장 2Ts, 참기름 1ts, 참깨 적당량
* Ts(테이블스푼), ts(티스푼)
TIP
요리의 기본 중의 기본은 바로 온도다. 어떤 음식이든 온도 하나만 잘 맞춰도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맛있는 감자탕도 식으면 맛이 반감되듯 차가운 냉채도 아무리 맛있게 간을 한들 온도가 미지근하면 아쉽다. 반드시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한 뒤 맛보길 추천한다.
만드는 법
오이는 채썰고 어묵은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끓는 물에 숙주를 10초가량 데쳐 찬물에 헹군 뒤 물기를 잘 제거한다. 볼에 모든 재료를 넣고 무친다. 냉장고에 1시간 이상 넣어 차게 식힌다.
에디터 김건태
글·사진 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