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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작은 우주
씨앗
숲 가까이에 살고 싶지만 아쉬운 대로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화분 몇 가지를 올려놓았다. 금방 시들어버리는 일도 있고,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우기도 한다. 작은 화단 안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즐겁다. 잠깐 관심을 놓은 사이 달라진 모습은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게 한다. 그런데 식물의 여러 부분 중 가장 고요하고 신비로운 것을 꼽으라면 그것은 ‘씨앗’이다.
바질은 때로
바람에 씨앗을 날려 싹을 틔운다
친구네 집에 작은 바질 화분이 있다. 덕분에 나는 주변을 서성이면서 그가 계절을 보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나둘 싹을 틔우더니 여름내 부지런히 자랐고, 가을이 오면서 잎이 많아지고 줄기가 제법 단단해졌다. 이때부턴 한두 번쯤 어설픈 요리에 장단을 맞춰주기도 했다. 이래저래 관심이 뜸했는지 어느 날 문득 씨앗이 여물었다. 더 두었다간 잎이 너무 억세질 것 같아 마음먹고 큰 그릇을 준비했다. 주변에서만 있다가 이번엔 가까이 붙어 앉아 한참 들여다보고 건드려본 후에 잎을 따기 시작했다. 줄기는 갈색빛이 섞여 더 단단해져 있었고, 올망졸망 하얗게 꽃이 피었던 자리에는 씨앗 주머니가 남았다. 바질의 두 번째 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예쁜 모양이었다. 그릇을 채우면서 아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건 즐거운 기분이었다. 친구 대신 가끔 물을 준 것 외에는 한 일이 없으면서 수확의 기쁨을 내가 몽땅 차지한 것이다. 원래 바질의 자리였던 작은 화분의 잎을 거의 다 떼어낸 후에, 그 뒤로 바짝 엉덩이를 대고 있는 조금 큰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바질과 비슷한 시기에 토마토의 씨앗이 뿌려졌던,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시든 토마토 가지를 모두 걷어낸 화분이었다. 그런데 그 토마토 화분이 이제는 바질 화분이 되어있었다. 페스토 욕심이 나서 일부러 더 심은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일이었다. 바질 씨앗이 바람에 날려 그곳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싹이 난지 제법 시간이 흘러 적당한 크기의 잎이 예닐곱쯤 되는 녀석도 있었고, 오늘 아침에야 막 흙을 뚫고 나온 듯한 연록 빛의 작은 아이도 더러 있었다. 어쨌든 모두가 꽤 당당한 포즈로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반가웠다. 조금 전에 느낀 아쉬움이 덜어졌다. 들뜬 마음으로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있는 가지 화분에도 가보았다. 바질 화분에서는 서너 걸음 거리였는데, 역시 거기도 이젠 가지와 바질의 화분이었다.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알게 되는 일은 기쁘다. 나는 이제 ‘바질은 때로 바람에 씨앗을 날려 싹을 틔운다’는 얘기를 조금 자신 있게 해도 괜찮게 되었다. 어떤 사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쪽으로 대여섯 걸음쯤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 셈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씨앗들
바람에 몸을 실은 바질 씨앗을 상상하고 난 후부터는 반으로 가른 사과라던지 숲길에서 주워 모은 솔방울, 바지 끝 단에 달라붙은 도깨비바늘에서 피어나는 상상을 막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가지 끝에 매달린 잘 익은 머루를 보면 공중에 선 채로 바쁘게 날갯짓을 파닥이며 머루를 쪼는 새가 떠오른다. 식도를 따라 흘러내려 간 머루가 연이어 몇 가지 과정을 더 거친 후에 씨앗만 남게 되어, 끝내는 어딘가로 ‘철퍼덕’ 떨어지는 과정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달고 맛있는 과일을 먹는 날이면 ‘요놈이 동물을 유혹하느라고 이
렇게나 빨갛고 달콤한 거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줄기에 매달려 있던 씨앗이 바로 근처의 흙 위, 혹은 꽤 멀리 떨어진 숲에 자리를 잡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해서 상상하다 보면 마치 끝없는 씨앗 거울 방같이 아득해지긴 하지만, 또 나름의 즐거움이 있기에 상상을 불러일으켰던 씨앗 몇 가지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목화
목화를 떠올리면 하얗고 통통한 솜털이 가장 먼저 연상되고 두툼하고 따듯한 솜이불이 연이어 생각난다. 그런데 갓 솜을 틔운 목화를 들춰보면 그 안에 까맣고 딱딱한 목화 씨앗이 숨겨져 있다.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고 덮으며 사용해온 목화솜의 본래 역할은 씨앗을 감싸 보호하고, 바람에 잘 날리도록 하여 씨앗을 멀리 퍼뜨리는 데 있는 것이다.
솜이 생기기 전에 열리는 목화 열매는 ‘다래’라고 하는데, 갓 맺은 열매는 수분이 많고 달콤하여 옛날 배고픈 시절에 아이들의 좋은 간식거리였다고 한다. 다래가 다 자라면 점차 초록 껍질이 벌어지고 그 안에 있는 솜이 밖으로 빠져 나온다. 솜 타래가 점점 부풀어 오르고 다래껍질은 갈색으로 변해 오므라들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목화 솜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결국 다래 한 알을 따 먹는 것은 목화 솜 한 송이를 없애는 일이니, 몰래 먹는 열매라 더 달콤했는지도 모르겠다.
솔방울
솔방울은 소나무나 삼나무 등의 열매를 일컫는 말로, 비늘과 같이 생긴 조각이 여러 개 뭉쳐 있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단히 붙어 있지만 익으면서 점차 벌어지는데 그 사이 사이에 씨앗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습도가 낮은 건조한 날씨가 되면 솔방울이 활짝 벌어져 씨앗을 떨어뜨린다. 소나무의 씨앗에는 날개가 달려있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갈 수 있다. 반대로 비가 내리거나 습도가 높은 날에는 솔방울이 동그랗게 오므라들고, 이는 비늘 조각의 바깥 표면이 수분을 흡수하여 팽창하기 때문이다. 안쪽 표면보다 바깥 표면의 면적이 넓어지면서 안쪽으로 굽어지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수분을 흡수하고 방어하는 솔방울의 특성을 이용해 천연 가습기로도 사용되고 있는데, 솔방울에 들어있는 테르펜이라는 성분은 방향, 살균의 효과도 있다고 한다.
제비꽃
동물이나 바람을 이용해 씨앗을 멀리 퍼뜨리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씨앗 주머니를 터뜨려 씨앗을 흩어지게 하는 식물도 있다. 제비꽃이 그런 식물 중 하나이다. 7월이 되면 꽃이 시들고 그 자리에 보리알 모양의 꽃망울 같은 것이 생기는데 이것이 씨앗 주머니다. 주머니 안에 씨앗을 보호하고 있다가 날씨가 건조해지면 껍질을 터뜨려 씨앗을 날린다.
씨앗 주머니에서 땅 위로 떨어지는 첫 번째 이동을 성공적으로 마친 제비꽃씨는 두 번째 이동수단을 기다린다. 제비꽃 근처에 있는 씨앗을 더욱 멀리 운반하는 것은 개미의 역할이다. 개미는 무거운 씨앗을 제 집이 있는 곳까지 옮기는데, 이는 꽃씨 한쪽 끝에 붙어있는 엘라이오솜Elaiosome이라는 부속물 얻기 위함이다. 엘라이오솜은 젤리상태의 지방 덩어리로 단백질과 일부 비타민까지 포함되어있어 개미의 유충에 좋은 영양분을 제공한다. 집에 도착한 개미는 엘라이오솜만 가지고 들어가고 쓸모가 없는 씨는 밖으로 버린다. 각종 유기물이나 배설물이 풍부한 그곳이 제비꽃씨의 종착지가 되는 것이다. 개미집 사이에 자리 잡은 제비꽃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에디터 박선아
글·사진·그림 박소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