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2월 7일, 뒤늦은 후회
졸업식 시즌이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 바이러스 때문에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학교가 많다고 한다. 가족을 초대하지 않고 학생들만 교실에 모여 조촐하게 식을 진행하고 그것을 온라인 생중계하거나 녹화해서 보내준다는 소식도 있었다. 아들딸들의 대견한 졸업식에 함께하지 못하거나 아예 졸업식 자체를 생략한다고 하니, 못내 서운함을 느끼는 부모들의 목소리도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려온다. 졸업식, 입학식 시즌에 맞춰 꽃을 대량으로 준비해온 화훼농가나 동네 꽃집들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식’이 없다고 해서 ‘졸업’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문득 떠오른 어느 날의 풍경은 지금으로부터 15년쯤 전, 사촌언니 J의 대학교 졸업식이다.
지금이야 전국 팔도에 흩어져 지내고 있지만, 당시 사는 동네가 가까웠던 사촌들은 대부분 외동이거나 동생 하나 있거나 하는 식이어서 우리는 틈만 나면 어울려 놀았다. 주로 언니네 집에 이불 보따리를 싸 들고 가 밤새 먹고 놀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까무룩 잠들고, 다음 날 눈물 바람으로 헤어지곤 했다. 버스로 고작 세 정거장 떨어진 집으로 가면서.
언니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외숙모는 우리들의 그런 번잡함을 늘 감수해주셨다. 밤새 우당탕탕 시끄럽고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아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고 필요한 건 없는지 자주 내다보셨다. 우리 집이었다면 불호령 내지는 잔소리 폭탄이 떨어졌을 ‘한밤중 라면’도, 외숙모는 오히려 김치며 식은 밥을 내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하셨다.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 사이에서 엄마와 갈등이 끊임없던 나의 사춘기 시절에도, 언니는 엄마와 친구처럼 다정히 지내는 모습을 꽤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다.
아무튼 언니가 대학을 졸업할 때는 나도 대학생이었는데, 우리 학교 교정에서 선배들이 졸업하는 모습 외에 다른 학교 졸업식은 처음이라 눈 온 날 강아지 마냥 신이 났다. 외숙모와 외삼촌이 번갈아가며 언니의 학사모를 쓰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도 꽃다발을 들고 언니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그렇게 교정에서 졸업‘식’의 기운을 만끽한 우리는 서울역 맞은편 대우빌딩 지하의 갈비탕집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당시 외삼촌, 외숙모가 하시던 작은 식당이었다. 조금 전까지 딸의 졸업가운을 입고 있었던 외숙모가 이번엔 조리복을 입고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2월의 바람이 제법 쌀쌀한 데다 몸도 조금 굳어 있었다는 것을 갈비탕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야 알았다. 커다란 뼈다귀 하나가 반쯤 잠겨 뚝배기 가득 담겨 나온 갈비탕. 뜨끈한 국물에 언 몸이 녹고, 마음마저 한결 몽글몽글해진 그런 졸업식 날이었다.
그로부터 10년쯤 후 외숙모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아직 환갑인 데다 비교적 건강한 분이었다. 마음은 당장 외숙모가 계신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발만 동동 구를 뿐 그러지 못했다.
변명하자면, 너무 무서웠다. 하루하루 들려오는 더 나쁜 소식이. 눈을 딱 감고 기다리면 기적이 들려오리라 믿고 싶었다. 슬픔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매일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립되어 있을 뿐이었다. 언니에게 보낼 메시지 창을 열었다 닫았다, 병원에 가려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에 외숙모는 돌아가셨다. 나는 그때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있었는데, 식구들은 결혼을 앞두고 경조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세간의 속설을 착실히 믿은 나머지 그 일을 내게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외숙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나는 얼마간 기적 같은 소식만을 기다리며 동굴 속에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큰일이라 한들 언니에게보다 큰일이었을까. 나는 그때 언니의 손을 잡아주었어야 했다. 언니를 꼬옥 안아주었어야 했다. 주저하고 망설이고 외면하면서 혼자만의 슬픔을 그러쥐고 있는 동안 언니는 어떤 고독 속에 있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인사 한마디 못 나누고 이별한다는 것은 어떤 아득함이었을까. 평생 지고 갈 회한과 사무치는 미안함이 가슴 한 켠에 턱 들어차 앉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 감정들을 모른 체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그 불편한 단어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언니 곁에서, 그에게 필요한 또 다른 힘을 모아나갈 것이다.
가끔 한밤중에 라면이 당길 때나 몸이 으슬으슬해 뜨끈한 갈비탕 한 그릇이 먹고 싶을 때는 외숙모의 시그널처럼 느낀다. 먹고 싶은 것 많이 먹고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메시지인 것만 같다. 철없는 나는 또 이렇게 제멋대로 이기적이다.
조만간 외숙모가 계신 추모공원에, 10년 전 언니의 졸업식 때처럼 예쁜 꽃을 한 아름 들고 가야겠다. 더 늦기 전에. 정말로 더 늦기 전에.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점심 먹고 나오는 길에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저녁 식탁을 치우면서 내일 점심을 고민합니다. 바쁜 일상 중에도 마음에 선명히 남는 한끼의 식사가 있습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의 대화를 적으려 합니다.
글·사진 김지향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