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혹은 그림, 은밀하게 입양을 기대하는 나의 ‘아이’를 지키는 책

동화를 만난 어느 날

어릴 적 막연히 생각했던 어른의 모습과 실제로 어른이 된 후 알게 된 모습을 비교해본다. 상상 속 어른은 흔들리는 일 없는 딱딱한 생명체였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어른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본 대부분의 어른은 흔들리느라 상처투성이였고, 그러면서도 매년 꽃을 피우는 천년 고목처럼 성장하기를 바라는 존재였다. 어릴 때보다 더 많은 경험과 지혜가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시간도 자신감도 부족한 사람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편견과 소심함의 더께를 닦아내면 진주 같은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과거에는 가질 수 없던, 발효된 시간의 힘 덕분에 다시 읽는 동화와 그림책이 때로는 빛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다시 읽는
나의 세계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길에서 우연히 자작나무를 만나면 짧은 휘파람 같은 바람이 분다. 오랜 시간을 달려온 바람이 눈처럼 새하얀 껍질과 싱그러운 초록색 잎들 사이로 스치는데, 그 끝에 ‘빨강 머리 앤’의 수다가 들려온다. 자작나무를 유난히 좋아했던 앤이 나를 초록지붕 집 풍경으로 데려가곤 한다. 하지만 “자작나무를 보면 E자가 붙은 앤이 생각나지 않아?”라고 말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비나 눈이나 구름 때문에, 바나나 우유나 옥수수 빵이나 삼각김밥 때문에, 혹은 홍차와 마들렌 때문에 옛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그때 마주쳐야 할 대상은 진짜 사람이어야 할 것 같았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그리워한다고 고백하면 비정상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았다. 나는 정상적인 어른이 되고 싶었지 특이하다는 말을 들으며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동화 속 친구들의 존재를 부끄럼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를 뼈저리게 이해한 후였다. 두꺼운 교양서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 울긋불긋한 어린이 책을 꺼내는 일은 여전히 쭈뼛거리는 일이었지만, 오랜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으로 동화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아마 1975년이 초판인 그 전집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남 눈치 보는 소심한 어른이었던 내가 일부러 동화책을 사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 책 읽기가 내게 뜻밖의 선물을 주었다. 그 놀라움을 털어놓았을 때, 나를 잘 아는 기획자는 책으로 엮어보라고 권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쓴 글의 첫 제목은 ‘성냥팔이 인문학’. 삶이 팍팍한 어른에게도 자기 자신을 추스를 ‘동화’라는 인문학이 있으니, 자신에게 성냥이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죽어간 소녀처럼은 되지 말자는 마음으로 지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원고는 묻혔고, 지난봄에야 ‘동화 넘어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서문에는 나를 책의 세계로 이끈 ‘소년소녀 세계문학 전집’이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 썼다. 

장사가 안 되던 여름날, 동화책이 갖고 싶은 딸을 외면할 수 없었던 어머니가 진열장에 놓인 이불 두 채와 전집을 교환했던 이야기다. 생애 첫 보물이 돈이 아닌 이불과 교환된 것을 알았을 때 참 행복했다. 그런데 책을 펼쳐본 아버지는 뜻밖의 말씀을 했다. “이불 얘기는 괜히 왜 했어?” 툭 던지는 한마디에 부끄러움 같은 감정이 묻어났다. 그제야 내게는 한없이 따뜻한 에피소드가 아버지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애써도 빠듯하기만 했던 당신의 젊은 날과 시간이 흘렀어도 사라지지 않은 부모로서의 미안함을 그제야 돌아볼 수 있었다. 헤아려 보니, 이불과 동화 전집을 바꿨던 어머니는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겪어야 했을 젊은 두 분의 막막함이 새삼 절절해졌다. 아, 그랬겠구나. 부모님도 못생긴 고아 앤처럼 기댈 곳 하나 없었겠구나. 어쩌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이 언제 끝날까 불안하기만 했었겠구나.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나이 드는 일의 미덕에 대해 생각했다. 시간은 어릴 때는 볼 수 없던 것들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모든 일이 너무 근사해서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것쯤 생각했어야 했는데! 나를 정말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아,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울고 싶어!”

– 루시 모드 몽고메리, 《그린게이블즈의 빨간머리 앤 1》

다시 읽는
나의 세계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앤의 마음에 깊은 우울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어른이 된 후였다.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여러 번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스러워했다. 앤은 그 시절 그대로였지만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앤의 친구로만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많은 부분에서 나는 마릴라의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특히 입양되기 전날 밤 이야기는 어릴 적 기억 속에 없다는 것이 이상할 만큼 가슴이 아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가기 전날, 앤은 고아원 장식장 유리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이별 인사를 한다. 유리에는 상상이나 수다 같은 건 해본 적 없는 것 같은 주근깨투성이 깡마른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를 두고 가는 것이 슬펐다는 앤의 고백에 가슴이 먹먹했다. 

마릴라가 앤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입양을 결정한 것은 단순히 동정심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릴라는 앤이 왜 그렇게 요란하게 상상을 하고 수다를 떠는지를 알았던 것이다. 그 유난스러움은 스스로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작은 아이의 안간힘이었다. 마릴라는 그 작은 영혼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던 것 같다. 누구보다 어른스러웠던 마릴라와 그의 오빠 매튜가 감싸준 덕분에 앤은 사랑스러운 소녀로, 책임감 있고 건강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다. 그간 살아온 날의 경험으로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 나는 그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꼬마 앤의 성장을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시간만이 주는 앎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시간은 우리를 고단하고 버겁게 한다. 세상 두려울 것 없던 아이는 잔뜩 위축된 어른이 되어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확신마저 잃는다. 아이들 중에 ‘어른’이 무엇인지 알아본 후 자라는 아이가 있을까? 대부분 앞자리에서 건넨 시험지를 받아들 듯, 수동적으로 어른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른’에 대해 잘 모른다. 잘 모르니 자신감이 없고, 소심해지기 쉽다. 잔뜩 기죽은 상태에서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의무감에 짓눌리다 보니 세상은 늘 무섭고 상처받을 일투성이다. 힘들게 살아가는 만큼 알게 된 것들도 있지만, 기죽고 소심한 어른들은 그 앎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긍정하거나 위로받지 못한다. 뭔가 대단한 권위가 확인해주지 않는 한 자신의 손에 담긴 지혜를 바닷가에 뒹구는 사금파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대한다. 때로는 ‘대단한’ 권위나 책에 다가가고 싶지만, 시간도 부족하고 넘어야 할 허들이 너무 높다. 

하지만 그림책은 그렇지 않다. 슬쩍 다가와 품에 쏙 안기는 아기처럼 권위에 기죽고 소심한 우리 곁으로 편하게 다가온다. 어른스러운지 아닌지 판단하지 않고, 잘났는지 못났는지 가리지 않고,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시험도 보지 않는다. 읽었다고 자랑할 것도 없지만, 못 읽었다고 야단맞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책이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품고 있다. 물론 일찍이 우리가 갖고 있던 지혜를 확인하게 해준다. 어른의 동화책 읽기가 어릴 때보다 깊고 넓은 데는 기술적인 이유도 있다. 다시 읽기란, 이야기의 가장 큰 쾌락, 즉 처음이라는 신선함과 재미를 포기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새로 읽는 책이라 하더라도 아이들 책에서 충격적인 캐릭터, 상상을 초월한 운명, 조마조마한 사건, 허를 찌르는 반전 등을 기대하는 어른은 많지 않다. 아우토반을 달리듯 질주하는 흡인력이 없다는 걸 알면서 시작하는 드라이브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다른 것이 보인다. 이야기 주위에 숨어있던 풍경에 그간 살아온 시간이 스며든다. 여유 속에 지혜가 고이는 셈이다.

 이렇게 천천히 둘러보는 가운데, 차분해지는 자신을 경험한다. 그로 인해 되찾는 건 숨 쉬는 방법이다. 우리는 늘 가쁘고 거친 숨을 쉰다. 어쩌다 휴식 시간이 되어도 심신의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영화를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고, 책 한 줄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다. 이렇게 과열된 상태는 인생을 위태롭고 무너지게 만든다. 그렇게 되기 전에, 그러니까 너무 바쁘고 긴장해 터져버릴 것 같을 깊은 숨을 쉬어야한다. 요가나 명상에서 말하는 호흡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이
주인인 책

언제부턴가 휴식을 취할 수 없을 때 가만히 그림책을 펼친다. 말 그대로 그림이 주인이 되는 책으로, 글이 매우 적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처럼 어른도 글자가 적으면 부담감을 덜 느낀다. 그림책 작가들은 회화의 모든 기법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리드미컬한 선, 자유로운 형태, 다양한 질감이 묻어나는 풍부한 색의 그림들이 쾌락과 위안을 준다. 하지만 전시회에 걸린 그림과는 다르다. 글이 있든 없든 그림책은 마지막까지 안 보고는 못 배기게끔 계속해서 독자에게 말을 건다. 많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읽어주다가 그림책에 빠진다. 그리고 덕분에 오래전부터 잊고 있던 숨 쉬기를 다시 배운다. 그들은 안다. 20페이지도 안 되는 그림책이 100번을 봐도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을. 가만히 그림의 세계에 들어가 감동과 격려를 받다 보면 어느새 숨이 편안해진다. 상냥하게 말을 걸어준 그림책 덕분에 아늑하고 안전한 동굴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연한 기회에 그림이 말을 거는 방식을 엿본 적이 있다. 음악을 소재로 동화를 썼을 때의 일이다. 기획자가 책에 그림을 넣자고 했을 때, 어떻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림이 들어갈 자리를 생각하며 쓴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림은 그저 장식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만의 이야기 방식을 알게 되었다. 주인공은 그림 안에서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주인공은 엉뚱하고 유쾌한 남자아이다. 조손 가정이지만 그늘이라곤 없고, 꽤 유쾌한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작가는 아이 내면에 깃든 결핍을 외면하지 않았다. 부모 없는 아이의 허술한 입성을 과하지 않게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이 한 번이라도 더 아이를 보게 만들었다. 다른 등장인물과는 달리 혼자만 풀려있는 아이의 운동화 끈이 그랬다

나는 그림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숨겨놓는지, 어떤 방식으로 독자에게 말을 거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런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깊은 숨을 쉬던 때로 돌아가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순수하고, 따뜻하며, 모든 이의 귀가 크게 열려 있던 시절의 위로를…. 

사랑과 격려가 필요한 어른에게도 책은 가장 순수한 위안과 자신감을 채워준다. 우리가 얻은 지혜가 헛되지 않다고, 바보 같다며 자책한 그 일이 실은 정직한 선택이었다고, 한동안 듣지 못했을 칭찬을 해준다. 칭찬이 필요 없는 아이가 없듯이 칭찬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는 어른도 없다. 왜냐하면 어른의 가슴 속에는 잃어버린 아이가 하나쯤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라는 가면 안에 숨어야 하는 외로운 아이는 빨강 머리 앤처럼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되기를 은밀하게 기대한다. 순수함을 안아주고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지혜로운 어른이 될 때까지 도와주는 양부모를 기다린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내 안의 아이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어야 한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림을 읽어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결국 그 시간이 아이를 보듬어 좋은 어른으로 성장시켜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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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혜진

글 조정현 일러스트레이터 최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