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지우는 사람

유성용

〈페이퍼〉라는 잡지의 가격이 막 5천원으로 오르던 시절, 나는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만나던 애인은 늘 같은 모양의 봉투에 편지를 넣어 보내곤 했는데, 그 봉투는 이따금 긴 지갑처럼 두툼한 꼴로 내 손에 쥐어졌다. 한 달에 한 번, 〈페이퍼〉가 발행되면, 책의 일부를 찢어서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잡지 맨 끝에 실리던 한 여행자의 글이 있었다. 당시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던 그 사람은 왠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는데, 다른 여행자들과는 달리 목적도, 기쁨도 없는 담담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왜 읽는 나는 그토록 기뻤을까. 오래전 일이라 제대로 따져 보기엔 무리가 있다. 어쨌든 나는 편지가 오길 계속 기다렸다.
전역을 하고, 체육과에서 문예창작과로 전과를 하고, 졸업 후 잡지사에 취직을 해서도 나는 그 사람의 분위기를 내내 좋아했다. 지금은 우연한 기회로 간신히 형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지만, 그건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다. 내게는 막막했던 새벽, 불침번을 서며 읽었던 그의 글들이 소중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그를 찾아갔다.

의미 없는 것들

다만 생활에 찌든 자들은 산정으로 올라야 하고 죽음에 찌든 자들은 마을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 그 길은 넓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을 막아두고 자동펌프처럼 생활의 의욕만을 자꾸 밀어붙이는 사회는 참으로 무서운 사회일 것입니다. 그대가 생활에 붙박여 있다면 마음속에나마 저만의 산정 하나쯤 마련해두길 바랍니다. 그곳에서 언제라도 세상 끝으로 다가가 다시금 길을 잃을 수 있도록.

2011년 이후엔 책을 쓰지 않았네요. 마지막 책 이후에 쌓인 원고들이 있을 것 같은데, 책으로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어요?
그간 책을 냈을 때는 그 책들이 나올 만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생각이 안 드네. 글이 좋고 나쁜 건 나한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저 무언가 쓰여졌고 그 시기에 채워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과 아주 필연적인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 그래서 지리산에 있을 땐 지리산에 관해 썼고, 다방에 다닐 땐 다방에 관해 썼어. 그걸 기획해서 쓴 적은 없고 얼마간 지내다 보면 첫 원고를 쓰게 되더라고. 마지막 책이었던 《다방기행문》 때에는 여행을 시작하고 4개월이 지났을 때 첫 원고를 썼어. 

그때 전국의 허름한 다방들을 찾아다녔잖아요. 작은 스쿠터를 타고서.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요?
없었어. 아무 생각이(웃음). 말로 어떻게든 설명할 순 있겠지. 그런데 그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어.

나는 명확하고 이름이 있는, 의미가 정확한 것들에서 별다른 의미를 못 찾겠어. 아직 잘 모르는, 이름이 없고 사라져 가는 것들이 좋더라고. 어쩌면 다방기행은 사라짐을 찾아가는 명분 같은 것 아니었을까? 뒤늦게 알아챘지만, 사실 나는 ‘사라지는 것’보다는 ‘사라짐’에 관심이 있었던 거 같아.

여기 오기 전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들춰 봤어요. 방금 말했던 부분은 네 권의 책을 쓰는 동안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태도더라고요.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잖아요.
아주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아. 목적을 가지고 많이 생각하고 꼼꼼히 조사해서 진행하는 일들에 크게 관심이 생기지 않더라고.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문제들로 고민하고 사회적인 시선도 신경 쓰며 살아가지만,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한 사람 몫의 생’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 그에 전면 부합하는 상황들, 이야기들도 있는데 그런 것들에 나는 흥미를 느껴. 지금 하는 말에 좋은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라는 책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어.

롤랑 바르트는 대표적인 후기 구조주의자인데 어머니 죽음 앞에서 아주 감상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돼. 그간 살아온 삶을 보자면 모든 상황에서 사적인 이해를 경계했을 텐데, 오히려 감상주의로 슬픔을 꿰뚫고 가거든. 나는 그런 태도에 관심이 많아. 보편적인 것들을 조금 더 많이 보는 것보다, 한 사람으로서 어리석은 얘기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한 사람 몫의 생’이란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네요. 책에서는 오히려 덜 마주하게 될 것 같아요.
보통 책을 읽어보면, 내가 궁금한 것이 쓰여 있지 않을 때가 많아. 한 사람의 고민이 어디에 얼마만큼 세상에 걸쳐 있는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 다양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다양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세계의 이야기들이 이미 코드화돼 있다는 거지. 책 속에 있는 작가의 고민과 관심들이 오히려 자신을 어떤 범주 안에 넣고 있다고 생각해. 가령 책을 읽으면 내가 가진 생각들이 그 책 속에서 개진되고 연관되고 새롭게 피어나곤 하잖아. 그런데 그런 깨달음들은 왠지 뿌리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반대쪽의 예가 있을까요?
나를 줄이고 차라리 ‘장소’에 집중해보는 건 어떨까? 내가 서 있는 장소는 내가 만난 아주 특수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생동감 있고 직접적이지. 그래서 나는 어떤 이가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는 생각들보다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가 궁금해. ‘나’를 줄인 이의 입을 통해 장소가 드러나는 거지. 생각과 마음보다는 장소. 한데 막상 내 여행기에는 장소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지 뭐야. 그나마 간신히 장소에 관한 뉘앙스라도 있어 다행이지만(웃음). 

그런 얘기에 비춰봤을 때 형의 생활은 어때요?
뭐, 늘 비슷한 것 같아. 그냥 지내고 있지. 무엇을 위해 내 생활을 밀어붙인 적은 없었어. 예를 들어 좋은 글을 쓰려고 많은 시간을 따로 내본다거나 환경을 바꾸진 않았어. 글을 쓴다는 건 그저 귀납적이었던 것 같아. 만약 글을 위해 무언가를 바꿔야 했다면, 그리고 앞으로 그렇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을 거야.

스스로 감당하고 있는 몫은 어떤 건가요?
친구가 있고, 애인이 있고, 그런 것들 있잖아.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런 게 나한테 중요해. 따로 어떤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안 들어. 직함이나 명함이 불편하기도 하고.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삶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아. 내가 여행책을 내고 그게 많이 팔렸다면 그쪽에 전문성이 있다는 얘기잖아.
하다 보면 더 노련해지기도 할 테고. 그런데 그 일을 하고 싶진 않아. 그걸 쓸 때까지의 일들이 그저 내 생활이었고, 생각이었지. 억지로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책으로 나온 순간부터는 이제 이름이 생긴 거니까. 

문득 형은 어떤 상황에 행복을 느낄지, 어떤 관계를 좋아할지 궁금해져요.
사람들은 다들 가면을 쓰잖아. 일부러 쓴다기보다 자기도 모르게 쓰는 게 가면이지. 자신의 진심이란 것도 이미 연극적으로 형성된 것이니까. 그래서 진심이란 게 뜻밖에 따분할 때가 많아. 서로 호응이 높은 유쾌한 술자리를 생각해봐. 잠시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각자 자기식의 감정이입만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 진심 너머는 여전히 텅 비어 있는 경우가 있어. 나는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전폭적인 관계가 좋아. 나도 모르는, 내 가면 너머에 있는 것들을 건드려주는 사람이 좋고. 싸우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기도 하는 관계들. 시골에서는 빚보증을 안 서주면 친구도 아니야(웃음). 

생각해 보면 참 어려운 일일 것 같아요. 어쨌든 나를 힘들게 하는 관계니까.
맞아. 무조건 깊이 침범하고, 괴롭혀야 좋다는 얘기는 아니야. 다만 회사 끝나고 여유 있는 시간에 레저 생활하듯 친구를 사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싶어.

나의
‘바깥’에 있는 희망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 나는 ‘뿌리 없이 사는 이의 생활’이란 것에 대해 다시 책을 엮어냈습니다. 그것이 《생활여행자》지요. 《여행생활자》가 두고 온 자신의 생활 자리에 대한 아득한 반추의 기억이라면 《생활여행자》는 생활 속에서 여행의 뉘앙스들을 또 다시 읽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런 것이지요. 여행생활자나 생활여행자가 희망을 이야기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사람의 체험자가 느끼는 것들을 그저 그렇다고 적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소통은 불가하고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고요. 예, 다만 그렇게 적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책을 두고 불편하다고 하지만 때로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기도 하지요. 생활여행자가 낯선 고국에서의 느낌을 말하는 것으로 그 책은 시작합니다.

《여행생활자》, 《생활여행자》 두 권의 책이 아주 다른 개념의 책은 아닌 것 같아요.
간단히 말하면 여행을 생활처럼 하는 것이 ‘여행생활자’고 ‘생활여행자’는 생활에서 여행의 느낌을 본다는 거야. 나는 여행과 생활이 서로를 살려주는 개념이라고 생각해. 반대말이 아니고. 생활이 없는데 여행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고 여행은 생활을 지탱해주잖아. 그저 여행에 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여행이 뭔지 알 수는 없을 거야. 생활의 한계라든지 답답함 때문에 여행의 의미나 가치가 있고, 여행은 생활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거지.

《여행생활자》를 먼저 쓰고 《생활여행자》를 썼잖아요. 그 사이에 변한 게 있을까요?
생활여행자가 여행생활자라는 이름보다는 조금 더 진화된 말인 것 같긴 해. 실제로 여행을 다니던 시절엔 여행이 생활 같아지길 바랐으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말해보면 여행에서 보낸 많은 시간들 때문에 지금 나는 두 겹의 뉘앙스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아. 여행생활자, 생활여행자, 서로 달랐던 두 가지 개념이 내게는 이제 하나로 느껴져. 일상의 산책길에서도 여행에서 느꼈던 것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여행길에서는, 살아온 생활이란 게 있으니, 견주어 볼 것도 있잖아. 두 겹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두 겹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일이에요?
간단한 예로는 생활의 어떤 풍경에서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거야. 여행지에서처럼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해 보기도 하고. 또 여행을 할 때에는 내가 떠나온 곳들을 더 잘 들여다볼 수도 있지. 처음부터 생활 속을 잘 들여다보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잖아. 생활 속에 잠겨서, 매몰된 상태에서는 생활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바깥으로 나가야 가능하지. 만약 여행 중에 그런 힌트를 얻었다면, 이제는 답답한 생활을 여행의 홀가분함으로 살아낼 수도 있다고 생각해. 

형 얘기를 들어 보니 저는 생활 속에 깊이 잠긴 사람인 것 같아요.
내가 일단 시간이 많잖아(웃음). 예전에 교사 생활할 때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어. 둘러볼 여력이 없었어.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들은 아주 여유가 많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이야. 여유와 성공을 둘 다 얻으려고 했다면 지금처럼 살지는 못했을 것 같아. 지금 내게는 사회화가 덜 된, 유아적인 태도가 있어. 

그건 무슨 의미에요?
분업화된 역할들이 내게는 도통 익숙지가 않아. 고장난 보일러를 스스로 고칠 수가 없어서 어제는 수리공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왔는데, 나는 그게 왠지 불편해. 서비스를 받는 동안 뭔가 잘못하고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건 사회적으로 보자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아주 오래전에 함께 여행을 했던 후배가 얼마 전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어. 우리가 처음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 얘기를 나눴는데, 릭샤Rickshaw에 관한 것도 있었거든. 사람이 직접 발을 굴려서 누군가를 태워주는 거잖아. 처음에 우리는 그게 너무 불편했어. 그런데 여행이 길어지면서 나중에는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거야. 돈을 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게다가 나중에는 우리처럼 불편함을 말하는 여행자들을 대하는 태도까지 달라졌어. 여행을 오래 안 해봐서 그렇다, 뭘 그렇게 유난이냐, 그런 식으로 생각했지. 아무튼 불편함에 관한 그들의 말이 달갑게 들리지 않았어. 나도 모르게 그랬어.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가 처음에 느꼈던 그 불편함 말이야, 그게 참 귀한 것 같아. 세상일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지. 효율이 중시된 환경에서는 어떤 불편함들이 무조건 제거의 대상이 되잖아. 그 어색함을 지나온 선배는 후배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그런데 어쩌면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끼는 그 사람이 ‘더 잘 보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런 불편함을 더 잘 보고 싶다는 건가요?
주변에는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 그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심지어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아직 덜된 인간으로 여기고 폄하하기도 해. 부끄러움, 불편함을 인정한다는 건 지금 잘 지내고 있는 자신을 욕 먹이는 행위니까. 그런 걸 보면 욕을 먹어야 할 사람들이 욕을 하고, 혼나야 할 사람들이 누군가를 나무라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 

얘기를 듣다 보니 저를 불편하게 했던 순간들이 떠올라요. ‘빨리 벗어나고 싶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불편에 관해서는 나중에 따로 어떤 얘기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 그게 내게는 희망처럼 느껴지거든. 사회에서는 불편이 곧 ‘적’이잖아.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신이 좋아하고 믿는 사람이 자신에게 불편함을 말하고 다르다고 말해도 무조건 싫어하진 않잖아. 오히려 문제를 잘 들여다보려고 하지. 그런데 왜 사회 속에서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견디지 못할까. 불편을 공대해야 한다고 생각해. 불편은 자기답지 않은 무엇이기 때문에 곧 희망이야. 우린 자문자답 속에 늘 갇혀 있으니까.

불편함이 오면 힘들지 않아요?
힘들지 않아. 아마 오랜 버릇인 것 같아. 나는 늘 내가 답답하거든. 내 안에 답이 없으니까. 그래서 방안에 편하게 누워 있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어. 바깥에서 만나는 불편함들이 늘 반가웠고. 그런데 내게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불편함은 견디기 힘들 거야. 내일 당장 새벽같이 출근을 해야 하는데 지금부터 밤새 보일러를 고쳐야 한다면 끔찍하겠지. 그런데 내겐 꼭 해야 하는 일이 없어. 어쩌면 보일러 고치러 온 아저씨와 노는 게 내 일이야. 정말로 다음 주쯤에 차 마시러 온다고 했어(웃음). 그런 게 내 삶의 내용이야. 성과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늘 설레지. 어쩌면 매저키스트Masochist(피학대 성애자) 같은 기질이 있는 걸지도 몰라. 예전에 히말라야 서쪽을 여행하고 있을 때 여로를 정하려고 ‘론리플래닛Lonely Planet’을 들춰보니까 ‘울트라 메저키스트들이 가는 길’이라고 쓰여 있더라고. 자신을 학대할 사람이나 가라는 거지. 그런데 직접 가보니 그 길이 정말 좋았어. 어떤 것도 내 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나를 떨리게 하더라고(웃음).

원래 하루 일과 같은 걸 잘 물어보는데, 지금 그런 질문을 하면 좀 바보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정해놓은 삶의 방법이나 원칙이 딱히 있진 않아. 그저 내 앞에 벌어지는 순간을 빤히 지켜보다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빨리 채용하는 게 내 방법이라면 방법이야. 뭔가 고장이 나서 고칠 때도 정석으로 고치는 경우가 별로 없어. 길이 정해져 있으면 괜히 딴 길로 가보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 공식이 있으면 일부로 다른 식으로 풀어보고. 젊었을 때 나는 내가 특이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부분은 좀 특이한 것 같아(웃음). 이런 걸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어쩌면 내 근간이 성과주의적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젊었을 때 나는 엄청 모범적이었고, 성실했었어. 나를 ‘탱자탱자’ 노는 사람이라고 여길 이들이 많겠지만, 사실 나는 머리카락에 홈파는 성격이거든(웃음). 놀 때야 좋아도 아마 나랑 일을 같이하면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을 거야. 평가주의적인 상황에 놓이면 금세 괴물이 될 거라는 것도 잘 알아. 그래서 나는 정말 안 그러고 싶어.

여행은
무용無用

여행은 드러냄이 아니고 숨김입니다. 함부로 생활의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커다란 비밀을 제 속에 품을 때까지 제 몸을 숨기면서 가야 하는 길인지도 모르지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여행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지만, 여행자가 그 말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을 때에야 그 말은 간신히 유효합니다. 알아도 모른 척하며 제 밖에 드러나는 길들을 오롯이 걷는 일이야말로 여행의 근간이지요. 여행의 장소들에는 자연과 도시와 문명이 있고, 또 그 속을 살아내고 싶어서 심장이 팔딱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여행 내내 늘 그런 어느 곳인가에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같이 나의 해석과 이해 혹은 경솔한 개입과 섣부른 동정同情 감정이입을 넘어서는 엄연한 장소이지요.
여행이 길어질수록 헛된 ‘나’를 줄이고 차라리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면 형에게는 여행자라는 이름이 붙어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사회는 자꾸 내게 이름표를 달아 주려고 해. 여행자라고 부르잖아. 그런데 여행자라는 이름표가 어디 있어. 여행의 다른 이름은 무용無用이라고 생각해. 여행에서는 쓸모 없음이 곧 쓸모야. 

좀 헷갈리는 말이지만, 무슨 얘긴지 알 것도 같아요.
여행은 어떤 쓸모도 생각하지 않고 떠날 때 간신히 의미가 있다는 거지. 지금 있는 곳에서의 ‘쓸모’에 지치고 피곤해져서 그걸 벗어나고픈 마음에 우린 어딘가로 떠나잖아. 여행을 잘하려면 최대한 우회하라는 말도 있고. 사회에서는 목적지까지 빨리 가는 게 목적이지만, 여행은 그렇지 않은 거지. 우회하면 할수록 체험이 많아져. 그런데 어떤 이들은 여행에까지 ‘쓸모’를 붙여. 느리게 걷기, 도보여행자, 이름을 짓고 카테고리를 만들어. 생각해 보면 여행에서는 걷기도 했다가 버스를 탈 수도 있고, 기차나 비행기를 탈 수도 있잖아. 모르는 일이지. 도보여행자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 누군가는 분명 걸으면서 많은 행복을 느꼈을 거야.

그런데 일단 이름이 붙고 난 뒤에는 분명 억지스러운 부분이 생기지 않았을까? 도보여행자도 도보여행을 안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래서 나는 끊임 없이 이름을 지우는 사람, 자신의 이름에 달라붙은 걸 잘 지우는 사람이 여행자라고 생각해. 

형의 쓴 마지막 여행책은 《다방 기행문》이네요. 그땐 어땠어요?
다방기행을 하던 시절에 다방 아가씨하고 앉아서 천오백 원짜리 커피를 마시면서 목적도 성과도 없이 앉아 얘기 나누던 때가 되게 좋았어. 동네 얘기나 좀 하고 기억도 나지 않을 것들을 서로 물었는데 마음이 정말 편안했었어. 착각이었겠지만, 마치 세상 끝 절벽에서 마시는 마지막 커피 같더라고(웃음).

그나저나 여기 이 동네, 왠지 형 같네요.
이 동네는 서울인데 서울 시내가 멀지만 잘 보여. 뭐 나도 그랬음 싶은 거지. 내가 있는 곳을 잘 보고 싶어.

《여행생활자》가 잠시 반짝이고 사라져버리는 그 어느 별똥별 같은 빛을 좇아 타박이고 헤매는 이야기였다면 《생활여행자》는 사실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밋밋하고 지겨운 일상의 결들을 다시 여행의 느낌으로 읽어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좀 쓸쓸한 일이네요. 사람들은 묻습니다. 생활여행자란 무엇이냐고. 그럼 나는 이런 대답을 들려드린답니다. 

“생활여행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활에서 나의 집을 잃고, 나의 가족을 잃고, 나의 친구와 애인을 잃고 뿌리 없이 사는 이야기다. 마치 여행 속에서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활 속에서 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내 밖의 풍경과 사건들 속을 헤매면서 나의 것도 되지 못하는 누군가의 일상 속을 걷는 일이다. 급박하고 변화무쌍하면서도 한편 너무 따분한 이생에서 우리가 뭔가를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늦은 일이다. 사랑하면 당신의 사랑은 이미 고갯마루를 넘어선 것이며 이제 너무 혼자라면 그대는 이미 혼자인 시간들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죽고 싶다면 이미 살 만해지는 것이고, 살 만하다면 이제 죽을 일만 남은 것이다. 쉬! 사는 일의 현명함을 구하지 마라.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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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포토그래퍼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