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친구는 어디에나 있다

부르르 —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레이터 ‘부르르’의 그림은 재치 있는 상상으로 가득하다. 사람과 손을 마주 잡은 개미, 자동차를 운전하는 화분, 바람에게 편지를 쓰는 꽃. 나는 꾸덕꾸덕한 질감으로 그려진 이 앙증맞은 존재들을 지켜보는 일이 좋았지. 어떤 이의 그림인지 궁금해져 부르르에게 만날 수 있겠냐 물었더니, 사실 부산에 살고 있다던 그는 서울로 곧장 날아왔다. 볕 좋은 날 만난 우리는 주변의 자연물과 동식물을 친구로 여기는 마음과, 곧은 자세의 중요성 같은 소소한 이야기를 와글와글 논했다.

반가워요. 오랜 팬이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자기소개로 시작해 볼까요? 

지금 녹음이 되는 거죠? 부르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창섭입니다. 아, 다시 해도 될까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부르르 이창섭입니다(웃음). 

 

좋아요! 이름이 늘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한 시집에서 “부르르 떨리는 마음”이라는 시구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이름으로 삼았죠. 저는 책은 좋아하는데 읽기만 하면 잠들어버려서 완독을 못 해요. 그래도 독서하는 내 모습이 좋아서 계속 시도하다 시집을 읽게 됐어요. 얇으니까 한 권을 클리어했다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더라고요. 

 

주로 어떤 작업을 하는지도 들려주세요. 

오일 파스텔을 사용해 일상이나 자연에서 만나는 작고 소중한 존재를 그리고 있어요. 작업 분야를 넓혀보려고 터프팅이나 도자기도 배워봤는데요. 도자기는 조금 힘들겠다 싶어서 그만뒀어요.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해서 오래 웅크려 앉아 있기가 어렵거든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최근에는 세라믹 스튜디오 ‘크래프트 프랙티스’ 제안으로 제 일러스트가 들어간 그릇도 판매하고, 워크숍도 열었어요. 흙물을 케첩처럼 짜서 그림을 그리고 굽는 식이었죠. 이렇게 도자기를 다시 만들게 돼서 기뻤어요. 

 

즐거운 기회였네요. 근데… 허리는 이제 괜찮은 거죠? 

전에는 너무 아파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수술한 뒤로 아침마다 운동해서 아주 좋아졌어요. 저는 다리를 절대 꼬지 않아요. 에디터님도 몸에 안 좋은 자세는 피하세요. 스트레칭도 필수예요. 

 

어이쿠, 네. (자세를 고쳐 앉는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크래커하우스’에서는 얼마 전 팝업이 열렸어요. 어땠나요? 

크래커하우스는 부산에 사는 제가 서울 올 때마다 들르는 카페 겸 아틀리에예요. 주인장 형들 중 한 명과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형이 이곳에서 같이 팝업을 해보자고 제안해 주었죠. 이번 팝업에서는 일러스트가 프린팅된 티셔츠나 작은 액자에 원화를 넣은 키링 같은 굿즈를 선보였는데요. 제 그림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직접 만나게 되어 정말 행복했어요.

A.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13 길 89 지1층

SNS 게시 글에서도 이번 팝업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꼽았던데요. 

작품에 대한 사람들 반응은 늘 SNS로만 살펴볼 수 있으니까, 스스로 제 작품이 실체가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거든요. 일상에서 그림이 소비되고 만져지는 걸 보고 싶었는데, 팝업은 그 갈증을 해소해 줘요. 친구들이 오늘 인터뷰를 보면 오글거려 할 것 같은데… 저한테는 제 그림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전부예요. 늘 감사하죠. 

 

뜻깊은 서울 나들이였겠어요. 지금 사는 부산에서는 학교를 다닌다고 했죠? 

조금 긴 이야기인데 집안 사정으로 고3 때 미대 입시 준비를 그만두게 되면서 바로 군에 입대했어요. 그런데 군 생활 도중에 허리를 다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했죠. 엄마 권유로 다시 입시 준비를 했고, 부산에 있는 미대에 합격했어요. 벌써 5년째 살고 있네요. 

 

오늘을 위해 서울까지 오겠다고 해서 고마웠어요. 여행 마치고 바로 올라왔다면서요. 여행은 즐거웠어요? 

최근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광주에 사는 친구들이 집들이 겸 부산까지 놀러 왔어요. 익숙한 동네라도 친구들이 곁에 있으니까 여행처럼 느껴졌죠. 제가 좋아하는 국제시장도 보여주고, 공원에서 술도 많이 마셨어요. 친구들이 여기까지 와서 술만 마실 순 없다고 하길래 해운대에 데려갔는데, 모래 축제를 하더라고요. 모래로 조각 작품 만드는 거, 아시죠? 구경하고 있으니 진짜 관광객이 된 것 같더라니까요. 

 

평소에 여행은 좋아하는 편이에요? 

네. 가장 최근에 찾은 여행지는 베트남이었어요. 이번에 부산 온 친구 중 한 명과 떠났고 진짜 진짜 재밌었어요.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현지 아이들과 거리에서 농구를 했어요. 술도 좀 마셨겠다, 에어로빅하는 아주머니들 옆에서 같이 춤도 추고요. 아침에는 바닷가 걷고, 망고에 맥주 한잔 마시고. 그런 순간들이 기억에 남아요. 저는 도전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을 갖고 있어서 여행을 좋아해요. 한 번 사는 인생,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봐야 하지 않겠어요(웃음)? 

 

여행만큼 새로운 기억을 가득 안겨주는 일도 없죠. 

아쉬운 건 아프고 나서부터 오래 비행기 타긴 힘드니 먼 곳은 가기 어렵다는 거예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하는데 과하게 무리가 되는 활동은 주의하고 있죠. 그때부터 자연물이나 정적인 것에도 눈길이 갔어요. 학교 벤치에 앉아서 바람이 어떤 형태로 불어오는지 느껴보고 햇빛이나 식물을 오래 바라봤어요. 그런 시간이 작업에도 영향을 미친 듯해요.

오늘처럼 서울에 오면 꼭 찾는 곳이 또 있어요? 

동묘를 좋아해요. 초등학생 때부터 아빠랑 주말마다 갔거든요. 아빠는 빈티지 의류나 소품, 시계 부품을 구하시곤 했어요. 수많은 물건 중에서 조그만 걸 관찰하던 경험이 지금의 저를 이룬 것 같아요. 또 저는 창작하는 그때의 모습이 작품에 묻어난다고 생각해서, 집에서 작업할 때도 출근한 것처럼 꼭 외출복을 입어요. 동묘에서 사 오는 것들이 늘 제 몸에 꼭 붙어 있으니 서울 나들이가 그림에 자연스레 녹아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작품 이야기를 해볼게요. 그림의 첫 시작이 궁금해요. 

집안에 예술을 하는 가족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됐어요. 엄마가 사주신 고전 문학 전집 속 삽화를 따라 그리는 걸 즐겼고, 미술 학원도 꾸준히 다녔죠. 부르르라는 작가명을 쓰기 전에는 다른 스타일과 이름으로 이따금 활동했는데, 사회복무요원으로 생활하던 시절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어린 뮤지션들이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에 큰 자극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인스타그램에 일러스트를 본격적으로 올리기 시작했죠. 

 

작품은 자연물, 동물, 사람이 연결된 장면이에요. 의인화되어 함께 손을 잡거나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죠. 

저는 사랑의 힘을 믿어요.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모성애부터 연인, 친구, 동물과의 관계까지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분명한 힘이 있다고 느껴요. 사랑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고, 보는 사람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손을 잡거나 볼을 맞대는 장면처럼 따뜻하고 명확한 이미지를 그리게 됐어요. 또 보는 분들이 ‘그래, 우리가 이런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지.’, ‘사랑 없이 살 수는 없지.’라는 걸 떠올리게 되면 좋겠어요. 저 역시 그런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고요. 

 

개미부터 애벌레, 화분까지 작고 사소한 존재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회복무요원 근무 중 쉬는 시간에 벤치에 앉아 있다가 무심코 지나가는 개미를 밟았어요. 어릴 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날은 괜히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작은 존재를 너무 쉽게 대했던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들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그냥 지나쳤던 식물이나 햇빛 같은 일상 속 존재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됐죠. 그래서 작품 속에 그런 작은 친구들이 자주 등장하게 됐고, 보는 분들도 주변을 한 번쯤 돌아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졌어요. 사소한 존재의 발견은 일상을 더 특별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니까요. 

 

그림으로 전하고 싶은 바를 좀더 들려줄래요? 

자연을 우리의 친구처럼 소중히 생각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환경을 지키자, 보호하자고 표현하고 싶진 않아요. 저도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플라스틱을 아예 사용하지 않거나 고기를 안 먹지는 않거든요. 이런 제가 환경을 보호하자는 건 모순 같아요. 삶을 행복하게 만들고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존재들이 지구 안에서 조금 덜 아프면 좋겠어요.

2021년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TONG’s VINTAGE: 기묘한 통의 만물상〉 전시에서도 그 이야기를 전했죠. 

맞아요. 낡았다는 이유로 폐기물로 버려질 운명에 처한 물건들을 예술품으로 바꿔 선보인 단체전이었어요. 음악을 좋아하는 저는 레코드판 커버에 그림을 그려서, 30점 정도를 LP바처럼 전시했죠. 첫 전시를 대림미술관에서 열다니 영광스러웠고 자부심을 느꼈어요. 작업물을 보러 와주신 분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니 기분도 좋았고요. 

 

자연이 소재라면 바깥에서 발상을 얻을 때도 많겠어요. 

네.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꼭 필요해요. 공원 같은 장소에 나들이 갔다가 소재가 떠오르면 휴대폰 메모장에 글이나 그림으로 간단히 남겨요. 집에 돌아와서는 그 메모를 어떻게 작품으로 만들지 노래 들으면서, 바람 쐬면서 생각해 보죠. 집 안에서도 영감을 얻고 싶어서 화분을 여덟 개 정도 두었어요.

뭉개진 듯한 질감의 오일 파스텔도 매력적이에요. 그 재료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요? 

처음에는 동네 문구점에서 산 크레파스를 썼어요. 붓보다 편하고 다루기 쉬우면서도 제 색을 잘 전달할 수 있었거든요. 또 많은 분이 한 번쯤 경험해봤을 재료라 통할 거라고 생각했고, 흔치 않은 느낌을 낼 수 있었죠. 관심을 조금씩 받으면서는 좀더 전문적인 도구를 사용해 보고 싶어서 오일 파스텔을 골랐어요. 기름 성분이라 책상에 묻으면 세제로 닦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가지고 다니기도 쉽고 작업도 수월해요. 

 

그런데 배경은 직접 그리지 않고 사진을 주로 쓰는 것 같았어요. 

배경까지 오일 파스텔로 그리면 그림의 매력이 떨어지더라고요. 예를 들어 잔디를 표현한다고 할 때, 풀 하나하나를 그리기도 어렵고요. 오랫동안 그린 듯한 느낌이 날수록 관람자가 무겁게 느낀다고 생각해요. 사진을 배경으로 두면 개성도 있고 다들 좋아해 주세요. 

 

제목은 늘 문장형으로 재치 있게 짓던데요. “우리 곁에는 항상 우리보다 작은 친구가 있어요.”, “동글동글 눈에는 동그란 친구들이 보여요.”처럼요. 

제 일러스트가 단순한 장면으로 끝나지 않고, 어떤 여운을 남기길 바라요. 음악이나 문학처럼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 감정을 담고 싶거든요. 그래서 종종 문장을 제목으로 붙이는데, 글과 그림이 잘 어울린다며 다들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무제(Untitled), 캔버스에 아크릴, 2025’ 이런 거창한 제목은 저한테 좀 어색해요(웃음). 

 

지금의 모습이 잘 어울려요. 이야기하다 보니 그림을 좋아해 주는 분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큰 것 같네요. 

한 번 받은 사랑은 똑같이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요. 부르르를 좋아해 주는 분들 덕분에 저는 행복해요. 그분들에게 행복과 사랑을 전하고 싶어요.

우리와 연결된 바깥의 존재들

1. 사랑으로 바라보아요. 

귀여운 존재들이 둘러앉아 작은 식물을 바라보고 있어요. 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쳐다본 나머지, 식물 그림자가 하트 모양이에요. 그림에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두 담겼네요. 음악과 개미, 무언가 잔뜩 들어 있는 가방, 사랑하는 우리 집 막내 강아지 루비도요.

2. 서로의 노래를 불러주어요.

평온히 누워 쉬는 두 주인공, 사람과 잔디가 보이세요?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자 잔디들이 노래하기 시작해요. 사람은 조용히 그 노래를 들어요. 솨- 답가로 휘파람을 부는 모습이에요.이 그림은 집에서 볕이 드는 창문으로 화분을 옮기며 불던 휘파람에 식물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떠올렸어요. 소리가 담긴 바람으로 식물에게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죠. 집에 둔 귀여운 화분에게, 혹은 익숙한 자리에 항상 서 있는 나무에게 휘파람으로 노래를 불러주면 어떨까요?

3. 저를 밟지 마세요. 

작은 개미가 거대하고 무서운 발바닥에 밟히기 직전, 자신을 지키려고 총을 쏴요. 5년 전, 날씨가 따스했던 봄에 지나가던 개미를 아무 이유 없이 밟은, 바로 그 일을 겪고 탄생했어요. 그때부터 개미를 자주 그리기 시작했죠. ‘총이 있었다면 내 발을 쏘고 도망쳐 잘 살 수 있었을 텐데.’라며 상상하곤 해요. 모든 개미에게 총이 있다면….

4. 우리 다시 거꾸로 가요. 

산책하는 평범한 모습인데, 자세히 보면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어요. 올해로 열일곱 살이 된 우리 집 막내, 루비는 착하고 예쁘고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생명체예요. 그런 루비가 많이 늙었어요. 더는 늙지 않았으면 하고,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어요. 시간을 거스르고 싶을 만큼이요.

5.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에요.

구름 위를 걸으며 음악을 듣는 모습이죠? 같은 곡이라도 언제 어디서 듣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데, 반대로 음악이 주변 풍경을 달리 보이게 만들기도 해요. 봄, 여름 푸릇푸릇한 거리에서 보사노바를 들으면 그림처럼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들죠. 스탠 게츠Stan Getz의 ‘The Girl From Ipanema’를 추천할게요. 햇빛이 가득한 오후, 이 노래와 함께라면 구름 위를 걸을 수도 있어요.

6. 나비의 장례식

나비 모양으로 짜인 관 주변에서 친구들이 슬퍼하고 있어요. 나비를 자주 마주하던 꽃은 눈물 대신 가장 좋아하는 꽃가루를 남겼죠. 나무는 자신의 일부를 주었고, 날기 힘들 때 도와주던 바람 친구도 슬픔에 빠졌어요. 개미도 무당벌레도 풀도 모두 슬퍼해요. 길을 가다가 화단을 두른 시멘트 울타리에 가볍게 떨어져 있는 나비 사체를 발견하고 나서 그렸어요. 집으로 가는 길, 나비를 추모해야겠다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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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박은비 장소 협조 크래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