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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작업실
예술가들의 작업실
클로드 모네, 선상 스튜디오, 1876
“내가 끌렸던 것은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가들의 삶이었다.”
프랑스 출신 나비파 화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의 말이다. 어쩌면 나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가의 삶을 좇느라 바빴다. 예술가의 삶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고, 많은 한숨을 내뱉고, 기쁨을 누리고, 통탄을 느끼는 곳. 바로 작업실이다. 그들은 매일 그곳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버리고, 다시 창조하고, 부수고, 통합한다.
클로드 모네의 선상 아틀리에
우리에게 ‘해돋이, 인상’으로 익숙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1873년경 중반 아르장퇴유에서 지낼 때 선박과 아틀리에 겸용으로 배를 한 척 구입한다. 수풀이 무성한 강 위에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다. 배 안을 홀로 지키는 남자는 모네 자신일 것이다. 낚시꾼이 고기를 낚기 위해 낚싯대에 미끼를 준비하듯, 화가는 풍경을 낚기 위해 붓과 재료를 준비한다. 오늘 그는 어떤 풍경을 낚을 수 있을까?
모네는 선실을 작업실로 고친 배를 타고 센강을 통해 파리에서 르아브르를 지나며 그림을 그린다. 그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반짝이는 수면을 포착해 많은 풍경화를 그릴 수 있었고, 그의 그림은 이제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 땅에서 바라보는 물의 풍경과 물 위에서 바라보는 물의 풍경은 어떻게 다를까? 모네는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던 듯하다. 훗날 모네에게 ‘물’은 가장 중요한 탐구 대상이 된다. 문득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자신의 책 《여행의 기술》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에두아르 마네, 아틀리에의 클로드 모네, 1874, 캔버스에 유채, 82.5x104cm, 노이에 시립미술관
모네에게도 물결에 흔들리는 선상 아틀리에는 생각의 산파를 일으켜주는 장소였을 것이다. 이 그림은 동료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가 선상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 클로드 모네를 그린 것이다. 1874년 여름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로 모네를 찾아간 마네는 보트 스튜디오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를 보고 곧바로 스케치한다. 배 안에서 그림에 열중하는 후배 모네의 모습이 흥미로웠던 것이다.
사실 마네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데, 이 그림이 드물게 야외에서 그린 작품이다. 마네는 모네와 그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고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 모네를 가장 좋아했다. 모네에 비해 비교적 상류층 집안 출신이라 생계를 꾸리는 데 문제가 없던 마네는 모네를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30대 후반까지 그림이 팔리지 않아 가난한 생활을 견뎌야 했던 모네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때마다 마네에게 도움을 받았다. 후배 모네의 재능을 높이 생각한 마네는 조건 없이 모네에게 생활비를 부쳐주었다. 그림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여인은 모네의 부인 카미유다. 1879년 카미유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비를 보내준 사람 역시 마네였다.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던 두 사람의 우정이 생각나는 따뜻한 그림이다.
가브리엘 뮌터의 아틀리에
가브리엘 뮌터, 자화상, 1909
역사가 품고 기억하는 남성 화가는 많지만 여성 화가의 수는 극히 드물다. 제도상 여성은 화가가 될 수 없거나 미술 학교를 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두꺼운 편견을 깨고 세상에 도전하더라도 유능한 남성 화가의 뮤즈로서만 조명되던 시선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어두운 아틀리에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그림을 응시하고 자신의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여자, 그녀의 이름은 ‘가브리엘 뮌터Gabriele Münter’다. 푸르스름한 방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를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는 듯하다. 마치 달빛이 그녀만을 위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숨죽이고 그녀를 지켜보게 된다. 이 그림은 가브리엘 뮌터의 자화상이자 그녀의 아틀리에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가브리엘 뮌터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로 ‘청기사파’의 중요한 여성 작가다. 청기사파는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 등 아홉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하여 추상미술 활동을 펼친 유연한 형태의 예술가 모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랜 시간 칸딘스키의 제자, 또는 옛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뮌터는 팔랑스 미술학교Phalanx School에서 미술 선생님인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를 만나 연인이 된다. 당시 칸딘스키는 뮌터보다 열한 살이나 많았고, 러시아에 두고 온 아내도 있었다. 그렇지만 베를린 출신의 지적이고 당돌한 소녀 뮌터에게는 이런 것들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둘은 1903년부터 1914년까지 바이에른 지방 무르나우에 집을 얻어 함께 지내며 활발히 작품 활동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두 사람이 함께하던 청기사파는 해산되고 러시아인인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야만 했다. 훗날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장군의 딸과 결혼했고, 깊은 상처를 받은 뮌터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무르나우에 혼자 남아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그녀는 색채 표현이 대담했고, 바이에른 지방의 민중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그 영감들을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려고 시도했다.
가브리엘 뮌터, 식탁에 앉아있는 칸딘스키와 에르마보시, 1912, 48.9×70.5cm
둘이 함께 지내던 무르나우 시절에 뮌터가 그린 작품에는 그녀의 눈에 비친 칸딘스키의 모습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겨있다. 테이블에 손을 얹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칸딘스키를 그리는 뮌터는 행복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아틀리에이던 이 작은 오두막은 청기사파 멤버이던 여러 화가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예술가이자 교수로서 칸딘스키는 성공 가도를 달렸지만 당시 독일을 지배하던 나치는 칸딘스키의 예술관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그가 러시아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치는 그의 작품을 ‘퇴폐 예술’로 규정하고 57점을 압수했다. 칸딘스키의 그림에 대한 수색이 시작되자 가브리엘 뮌터는 자신의 집 지하실에 칸딘스키가 젊은 시절 그린 그림들을 숨겨놓았다. 비록 헤어진 연인이고 돌아온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남자였지만, 화가로서 칸딘스키를 존경하던 뮌터는 그의 그림을 지킨 것이다. 20년이 흐른 1957년, 뮌터는 뮌헨의 렌바흐하우스 미술관에 자신이 소장해오던 칸딘스키의 그림을 기증한다.
비록 둘의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도로 완성되지 못했지만 둘이 함께한 젊은 날의 시간이 뮌터의 그림 속에 저장되었다. 결혼으로 완성된 사랑만 성공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삶에서 우리 모두를 관통한 사랑들은 과정에서만큼은 다 성공적이었다. 가브리엘 뮌터와 칸딘스키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클로드 모네의 선상 아틀리에, 가브리엘 뮌터의 오두막 아틀리에…. 그 공간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 예술가들과 함께 있었노라고.
에디터 김현지
글 이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