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언어

언어 차이가 연애에 미치는 영향

연애의 언어

언어 차이가 연애에 미치는 영향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남자와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연애를 하며 산다는 것.

“You can’t make Cocopop white.”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돌아온 건 새벽 세 시가 넘어서였다. 술에 취하면 기분이 언짢아지는 그는 불어, 영어, 인도네시아어 3개 국어로 번갈아 화를 내며 잠꼬대를 했다. 그가 깨기 전, 자신의 꿈에 작별 인사를 하듯,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남긴 마지막 잠꼬대가 그거였다. ‘너는 코코팝을 하얗게 만들 수 없어.’ 코코팝은 우리가 먹는 시리얼 이름이고, 당연히 코코아색이다.
“What happened to your Cocopop?”
“Did I dream about Cocopop?”
“Yes. You said something like ‘You can’t make Cocopop White.’ seriously.”
“Of course. Cocopop is very serious topic. ‘Don’t make my Cocopop white or I will kill you!’”
그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한 후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웃었다. 마흔두 살은 정색하고 ‘코코팝’ 같은 소리를 입에 담기엔 좀 덜 귀여운 나이지 않은가. 나는 개나 소나 주워들은 프로이트로 남의 꿈을 문학작품 속 은유처럼 분석하려 드는 데 진력나는 사람이다. 하지만 다인종 환경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블랙’, ‘화이트’, ‘옐로’ 따위 단어에 민감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다시 말해 나는 그것이, 그의 무의식이 우리 관계를 그려내는 방법이 아닐까 추측했다. 나의 추측에 동의하듯,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I need to go back to sleep, my Cocopop.”
도마뱀 똥으로 얼룩진 지저분한 벽에 새벽빛이 야자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정원에서는 다 익은 망고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곧 다시 잠이 들었다.

Je ne comprends pas

인도네시아에 온 후로 현지인보다 프랑스인들과 말을 섞을 일이 더 많았다. 전날 파티도 그랬다. 프랑스인 10여 명, 이탈리아인 두 명, 인도네시아 출신 불독 한 마리, 그리고 한국인 한 명이 있었다. 나 빼곤 모두 백인이었고, 프랑스어와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를 할 줄 알았다. 심지어 희미한 갈색 반점이 있는 통통한 불독조차 바탕은 흰색이었고, ‘니키타’라는 프랑스식 이름을 가졌으며, ‘Sit(영어로 앉다)’과 ‘Asseoir(불어로 앉다)’와 ‘Duduk(인도네시아어로 앉다)’을 이해했다. 나는 모두에게 내가 아는 유일한 완결형 프랑스어 문장으로 인사했다.
“Je ne comprends pas.”
나는 (불어) 이해 못 해요. ‘영어라고 그리 잘하는 건 아닙니다만.’이라는 말은 생략했다. 우리는 랍스터와 푸아그라와 파스타를 먹고 소맥과 와인과 럼을 마셨다. 밤새 시끄러운 테크노 음악이 울려 퍼졌다. 섹시한 블랙 드레스를 입은 이탈리아 여자는 모든 남자들과 살을 비비며 춤을 췄다. 술 취한 프랑스인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살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아까운 것들을 (마리화나, 애시드, 엘에스디 등을) 얘기했다. ‘정신 나간 Bule(인도네시아어로 백인을 일컫는 속어. 어감은 ‘흰둥이’ 정도 된다)들.’ 그들은 내가 다른 데로 주의를 쏟는다 싶으면 어김없이 불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Qu’est-ce que c’est…?”
내가 그의 귀에 속삭이면 이런 답이 돌아왔다.
“Food. Frenches talk about food all the time. I’m sick of it.”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다. 나도 음식 얘기 좋아해. 김치찌개, 떡볶이, 평양냉면, 통영 다찌집, 불고기… 그런 얘기 하고 싶어. 하지만 너는 밀가루로 만든 것들을 즐기지.
나는 우아하게 대화에 열중하는 무리를 피해 죽어라 술을 들이붓고, 음악을 바꾸고, 춤을 추거나 서성이며 헛소리를 해대는 주정뱅이들 사이에서 앉을 자리를 찾아냈다. 그러고는 ‘무심한 듯 시크한 동양 여인’ 연기를 시작했다. 그거라면 내가 전도연보다 잘할 수 있다. 아무리 재능보다 경험이 낫다지만 감히 ‘칸의 여왕’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봐라, 내게 쏟아진 트로피를. 가만 있는 내게 사람들이 와서 말했다. 아이러브유. 유아소뷰리풀. 리얼리. 나는 다 안다는 듯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는다. 아이러브유투. 땡스.
그가 다가와 속삭인다.
“Did you know that you impressed people?”
“Did I?”
“Yes. Because you are the only Asian here. You are unique. Enjoy it.”
잠시 후 연애문제로 실의에 빠진 그의 친구가 와서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How can you always be cool?”
“Cause I’m an Asian. We think everything will be gone at the end.”
나는 그렇게 흰 우유에 빠진 코코팝이 되었다. You can’t make me white, I will make you brown.

하지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흰 우유의 협조가 없으면 코코팝은 달아빠진 갈색 과자일 뿐이다. 언젠가 나는 초코 크런치 군을 만난 적이 있다. 이란계 이스라엘리인 그의 피부는 나보다 짙었다. 어느 날 그와 그의 친구와 그의 친구의 어머니와 내가 함께 밥을 먹었다. 그의 친구의 어머니는 영어를 하지 못했다. 나는 히브리어를 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수의 편의를 택했다. 나의 무심한 듯 시크한 동양 여인 연기는 그리 잘 먹히지 않았다. 관객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 억지 미소를 포기하고 접시 위 구운 생선의 비늘 수를 세기 시작했다. 내 귀가 무언가를 알아먹고 0.1밀리미터쯤 뾰족해진 것은 생선 비늘 수를 다 세고 뜯어 발겨진 뼈다귀의 작은 마디 숫자까지 세고 난 후였다. 전 세계 어떤 언어로 발음하더라도 여자 이름이 분명한 고유명사와 ‘Sexy’가 한 문장에 들어 있었다. 나는 희미한 소음 속에서 의미를 가진 언어를 감지한 사람이 응당 그러듯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재빨리 알아챈 것은 그의 친구의 어머니였다. 왜인지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네 여자친구가 듣잖아, 이 철딱서니 없는 자식아!”
얼마 후 나는 초코 크런치 군과 헤어졌다. 사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그의 모가지에 생선 뼈다귀를 꽂아주고 싶다. 하지만 대신 날벼락을 맞은 것은 흰 우유 군이었다.
“You talked in French for 20 minutes. This is not about girlfriend-boyfriend thing. You made me isolated at the table.
It’s so rude even if I am not your girlfriend. That was why I left the table without having dinner.”
언젠가 화를 내며 그런 말을 한 후, 그는 프랑스어를 쓸 때면 내게 허락을 구했다.
“괜-차나?”
“괜찮아.”
“조아?”
“좋아. Saya senang.”
그는 나의 어설픈 인도네시아어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알아먹지 못할 말로 알아먹지 못할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스마트폰으로 영어, 불어, 바하사 인도네시아어 낱말 퀴즈를 풀며 속으로 흥얼거린다. 나는야 코코팝, 너는 흰 우유, 언젠가 우리는 모두 사라지고 갈색 찌꺼기만 남겠지. 하지만 그건 아주 달콤해서 세상 모든 개미들을 꾈 거야. 괜찮아. 좋아. 케세라세라.

언어불통의 괴로움을 실감 나게 전달하려는 저자의 의도에 따라 해석을 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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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숙명

사진 김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