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채우는 무언가

나는 지금 ‘작은 여행길’에 있다

스물일곱의 여름. 언제나 그랬듯, 낯선 나라에 도착한 나는 잠시 호텔 방 안을 둘러보곤 그리 부산스럽지 않게 캐리어의 짐을 풀었다. ‘오늘 밤은 낯설어서 깊게 잠들지 못할 거야. 그렇지만 내일은 피곤해서라도 일찍 잠이 들겠지? 이번 여행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공간이구나. 밖에 나가면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친절했으면 좋겠다.’ 온갖 생각을 하며 적어도 이번 휴가만큼은 다른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지 않고 그들의 그림자를 아름답게 바라보리라 다짐했다. 늘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다가 잠시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리려 하니 문득, 어릴 적 네 식구가 함께한 소풍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다섯 살 때 우리가 살던 좁은 방 한 칸은 내가 처음 기억하는 ‘공간’이다. 우리 가족은 유리가게의 제일 구석에 위치한 작고 좁은 방 한 칸에서 살았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우리 집이 다른 집보다 작다는 것, 우리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보다 몇 배로 더 바쁜 나날을 살고 계시다는 걸 알았다. 네 식구가 모로 누워서 자야 했던 그곳에서는 공간의 크기만큼 내 걸음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꽤나 복대기는 맛이 있었다. 밤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엉켜서 자다가도 더운 탓을 많이 했던지라, 새벽이 되면 차갑고 단단한 아버지의 등허리로 옮겨가 잠을 청하곤 했다. 그 작은 공간에서도, 따뜻함과 차가움 사이를 오가며 달콤함을 누려왔던 거다. 많은 빚을 갚아내던, 그 힘든 와중에도 늘 우리에게 당신의 품과 등을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께서는 한 달에 한 번씩은 가까운 곳으로 소풍을 함께 가주셨다. 자식들이 작은 공간에서 작은 꿈을 꾸며 성장하는 건 바라지 않으시면서, 다양한 공기와 기분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풍성하진 않지만 최고의 맛이었던 어머니의 음식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공기 그리고 우리 네 식구의 웃음소리로 작은 여행이 완성되었다.

이때의 경험들을 통해 많은 돈을 들이지 않아도 값진 여행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내게 소풍은 작은 여행과도 같았고 또 다른 경험의 시작이기도 했다. 시간이 꽤나 많이 흐른 지금, 그때 살던 집은 주변 상가들과 함께 다른 모양새가 되어 알아볼 수 없게 변했고, 잦은 사업 실패로 한참이나 기울던 우리 집도 이제는 넘치진 않지만 부족하지 않는 삶으로 바뀌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동안에도 나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낯선 장소에서 유난하지 않게 잔잔한 눈으로 풍경들을 차곡하게 담는 하루를 기대하며 말이다. 여행 기간 동안 자주 사용하게 될 화장품을 꺼내고, 편한 옷들을 소파 등받이에 걸쳐놓았다. 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필름카메라를 챙겨 호텔 근처의 해양공원으로 향했다. 한여름의 해양공원에는 해수욕하는 사람들과 일몰을 보기 위해 도시를 등지고 앉아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국이었다면 뜨거운 햇볕을 피하고자 무조건 그늘이 있는 실내로 들어가곤 했을 테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온몸으로 햇볕을 받으며 나도 해양공원 한구석에 자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저물어가며, 푸른빛을 자랑하던 이곳에 주황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랑하는 이야기를 속삭이는 연인의 모습, 넓은 바다만큼이나 서로를 이해하는 부자의 모습, 마치 돌고래 쇼를 보듯 물결을 집중해서 쳐다보는 네 친구의 모습 등 많은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어릴 적 집 주변으로 소풍 나온 우리 가족을 보면서 누군가는 위안을 얻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양공원의 뜨겁지만 시원한 일몰 앞에서, 나는 예고 없이 마주친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뜻 모를 위안을 얻게 된 것 같다. 낯섦을 바라보는 눈과 색다른 공기를 마주하는 기쁨, 이 모든 건 어린 날의 작은 여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집 앞이든 이웃나라이든 상관없이 어디론가 향하는 작은 여행. 그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은 아직도 작은 여행길에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해양공원

Detskiy Park Razvlecheniy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는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유럽’을 느낄 수 있는 러시아의 미항 도시다. 바다를 앞에 두고 길게 뻗은 공원에는 여름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소박한 놀이기구와 오리보트, 분위기 좋은 카페와 아이스크림 등 소소하게 즐길 거리가 많으며, 특히 킹크랩과 새우가 신선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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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이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