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해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법

영화

출근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숨이 가빴다. 중간에 내려서 심호흡을 하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지하철은 쾌적했고 몸은 건강했다. 삐걱인 것은 마음일 뿐. 그 무렵에는 타인을 미워하며 생긴 끈적한 앙금이 목 뒤에 들러붙어 있었고, 좋아서 시작한 일에 더는 설레지 않았다. 불안 장애, 그리고 약간의 우울증이 슬며시 찾아왔다.

나는 하지 않던 실수를 하고 중요한 일을 자주 까먹었다. 상사는 내가 전에 없이 무기력해 보인다며 이유를 물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약한 사람으로 업계에 소문이 날까 무서웠지만 살아야겠기에 마음이 아프다 고백했다. 상사는 그만두라는 말 대신, 새로 온 직원에게 업무를 나눠주고 매주 한 번 업무 시간에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가게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시간을 반납했다. 아픈 것은 죄가 아니라지만 1인분을 다 하지 못하는 죄책감은 씻어내기 어려웠다. 그때 <내일을 위한 시간>(다르덴 형제, 2014)에서산드라를 찾았다. 죄책감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지켜나간, 약하지만 단단한 그녀. 내가 찾던 사람이었다.  

 

“난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내일을 위한 시간>의 산드라는 우울증을 앓으며 회사를 쉬었지만 이제 건강해졌다. 그런데 복직을 앞둔 주말, 그녀는 돌연 해고를 통보받는다. 사장이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사내에서 산드라의 복직과 남은 직원에게 보너스 1천 유로를 지급하는 것을 두고 투표를 열어 그녀의 해고를 회유했고, 다수가 보너스를 택한 것이다.

산드라는 급작스러운 소식에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지만, 곧 자신의 복직을 선택한 동료와 함께 사장을 찾아가 재투표의 기회를 얻어낸다. 투표는 월요일 아침. 그녀는 남편의 설득에 힘내어 주말 동안 보너스를 택한 동료 한 명 한 명을 찾아 나선다. 이 영화의 영제는 ‘Two Days One Night’, 산드라가 동료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12일을 의미한다.

티무르는 수척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먹인다. 그는 사장의 회유에 넘어간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고 고백하며 재투표를 약속한다. 그러나 모두가 티무르와 같은 처지나 마음은 아니다. 가장 친했던 동료는 문도 열어주지 않는다. 이혼 후 새 출발 자금이 필요해서, 가족의 실직 때문에, 주말에 마트에서 일을 할 만큼 형편이 어려워서. 그들은난 당신을 반대한 게 아니라 보너스가 필요할 뿐이고, 선택을 강요한 사장이 나빴다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하지만 산드라의 설득에 넘어가서 안 된다고 동료를 설득하는 그들의 가족과 다투는 동료의 모습을 본 그녀는 자신이 폭력의 씨앗이 되었음에 슬퍼한다. 무더운 한여름, 한 사람씩 설득해 나가는 일에 힘이 빠진다. “복직해도 예전만 못할 거라고 하던데…”, “열여섯 명이면 충분한데 왜 당신을 복직 시켜?” 어느 두 동료의 말끝에 그녀는 진정제를 치사량 삼키고 침대에 눕고야 만다.  

 

그때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보너스를 두고 남편과 다퉜던 ‘안느가 찾아온 것이다안느는 이 일을 계기로 가치관이 다른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했다며 산드라의 복직에 투표하겠다고 말한다다시 힘을 얻어 병원에서 위세척을 하고 깨어난 산드라는 오랜만에 식욕을 느끼며 수프를 후룩 마신다그녀는 마침내 남은 하룻밤 동안 모든 동료를 만난다.

 

 

월요일 아침재투표 결과는 8 8. 자신을 응원하는 여덟 사람을 얻었지만결국 졌다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을 택해준 동료들과 인사하고 떠나려는 찰나사장은 산드라에게 제안한다직원 간 감정 해소를 위해 보너스도 주고계약 사원과 재계약을 하지 않는 대신 그녀를 다시 고용하겠다는 것산드라는 답한다

 

“아니요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아요.”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을 지나는 동안 그녀는 다시 태어났다살아만 있다면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지하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 말이다그들이 없는 삶은 안개에 휩싸이지만그들이 있다고 믿으며 손 내밀면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한 번 죽으려 했던 사람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싸우고 불화하는 일을 볼 수 없어 사라질 결심을 했던 착하고 나약한 사람산드라는 타고나길 강하지는 못했다그러나 타인이 건네준 따듯한 온기를 입고 삶의 추위를 헤쳐나갈 용기를 얻었으며약하기에 약함을 이해한다그렇기에 달콤한 굴종의 제안을 뿌리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산드라는 사장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 뒤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환해지는 순간이다. ‘해고라는 일상의 재난 속에서 상처를 입은 산드라가 그럼에도 내일을 잘 살아나가리라 믿게 되는 표정.

매일 얼굴을 마주하던 동료가 자신보다 보너스를 택했다는 사실, 가장 친했던 동료가 문전박대 한 일, 마음이 아픈 사람은 회복했다 한들정상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말. 이 자잘한 재앙들은 지진이나 해일, 교통사고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칼이 되어 사람을 베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치 산산조각 난 유릿가루를 들이마시듯, 무심결에 피가 배어 나오듯 그렇게 산드라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비슷한 처지인 사람에게 대물림하는 일을 거부했으며, 누구도 상처 주지 않으려 애썼다. 사람으로 사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데도. 하루하루 아침잠과의 전쟁을 치르고, 잘리지 않으려 애쓰는 하루를 보내면서도. 산드라는 이 비정한 세상에서 나 하나 잘살면 그만이라 말하지 않는다. 강함에 기대어 약했던 과거를 잊지 않는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그렇게 우리의 살아있음을 응원한다. 씩씩하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한 번 무너졌다 다시 시작해도 괜찮으니까

We Around Project

영화 속 그녀들을 말하다

 

에세이 《혼자서도 일상이 로맨스겠어》(2019, 새움출판사)를 썼습니다. Humans of Seoul 인터뷰어, MBC 다큐스페셜 취재 작가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화제 스태프로 일하며글로 나와 타인을 위로하며살고자 합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워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혹은 애달파서 응원하는 영화 속 여자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 도상희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