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폭력 앞에 손을 마주잡는 법

영화

엄마가 쪼그려 앉아 종이를 태우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을 빤히 바라보며. “엄마! 엄마 뭐해?”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모르는 여자처럼 선득했던 옆얼굴. 나중에 엄마는 그게 아버지에게 보내려던 편지라고 했다. 불을 보고 있으면 속이 개운해진다고도 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한평생 함께 있어도 외로운 사람이었다. <벌새>의 은희가 혼이 나간 듯 선 엄마의 뒷모습을 소리쳐 부를 때, 거기엔 엄마 아닌 한 여자, 지난 생을 돌아보는 한 여자가 서 있다. 여자의 얼굴에 불빛이 번져 붉던 내 엄마의 옆얼굴이 겹쳤다.

그때 엄마는 사랑을 받고 싶었을까. 아니면 온전히 자신을 사랑해보고 싶었을까. 먼 데서 엄마의 마음을 가늠하며 타인 없이 오롯해지는 일과 간절히 사랑에 매달리는 일을 오가던 가을, <벌새>의 여자들을 만났다.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권위에 인정받고 싶지만 동시에 제멋대로 살고 싶은 은희와 언니. 아버지의 폭력 앞에 전등을 깨 자신과 딸을 지킨 엄마. 비빌 언덕을 찾지 못한 은희에게 따스한 우롱차와 듣는 마음을 내어준 선생님. 그들이 맞잡은 손의 온기를 전해 받았다.

 

 

은희는 불안하다. 심부름을 다녀와 집 문을 두드렸는데 엄마가 나오지 않는다. 미친 사람처럼 엄마를 부르며 문을 두드린다. 그러다 문득, 층을 잘못 찾아온 걸 깨닫는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마음은 늘 불안에 떤다. 다른 모양의 사랑을 찾아 갈증을 채운다. 아버지는 아들의 반찬 하나까지 걱정하며 온 식구가 그의 공부를 도와야 한다고 이르지만, 은희가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쳤을 땐 주인에게 그냥 경찰서에 데려가라며 무심하다. 그런 은희가 방과 후 교문 앞에서 자신만을 기다리는 남자친구를 만날 때, 하루 중 가장 활짝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여자들의 집착에 가까운 애착은 타고난 것도 아니며, 누군가와 첫눈에 반해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우리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가부장적 세계에서는 결코 충분히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사랑에 대한 집착은 시작된다.

─벨 훅스 ≪사랑은 사치일까≫ 중에서


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성은 가치가 높지 않은 존재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여자들은 소녀일 때부터 자연스럽게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지를 걱정해야 했다.

은희는 남자친구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려 입을 맞추자고 제안한다. 늘 관심에 굶주릴 수밖에 없었기에 아픈 귀조차 반갑다. 아버지가 수술 후의 흉터를 걱정하며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것을, 어머니가 반찬을 자기 숟가락에 놓아주는 것을 보며 기쁨을 삼킨다. 방학 전 자신에게 다가왔던 후배가 개강 후 모르는 척을 하자, 은희는 사랑의 증발을 예감하며 뛰어가 묻는다. “너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이렇듯 사랑을 확인하려는 끝없는 흔들림 속에, 은희는 한문 학원에서 자신을 단단하게 붙잡아 줄 김영지 선생님을 만난다.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선생님. 처음 마주한 그 뒷모습에서 은희는 그녀를 자기만의 자장 안에서 고요히 헤엄치는 사람처럼 느낀다. “선생님도 자신이 싫을 때가 있으세요?” 물어보게 되는, 타인에게서 사랑을 갈구하지 않아도 꼿꼿할 것만 같은 단단한 사람.

첫 수업 시간, 선생님은 은희에게 “좋아하는 게 뭐에요?” 질문을 건넨다. 학교 성적이나 부모가 하는 일, 장래 희망 같은 게 아니라 은희 자신을 물어보는 사람, 그전에도 있었을까. 친구는 곁에서 “너 김지환 좋아하잖아. 김지환이요!” 놀리지만, 은희는 “저는 만화 그리는 거 좋아해요” 하고 작지만 분명히 말한다. 사랑을 주는 이름에 매달리는 여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가진 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 그 순간부터 은희에게 선생님은 최초의 연대를 느낀, 자신을 존중해주는 존재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은희가 찾아와 울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우롱차 한 잔을 우려낸다. 가만하고 무엇도 기대하거나 속단하지 않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오빠에게 당한 잦은 구타 때문에 은희의 귀 밑에 염증이 생겼을 때, 병문안 온 선생님은 말한다.
“은희야, 너 이제 맞지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김일성이 사망한 은희의 1994년. 시대의 격랑 속에서 엄마가 아빠에게 맞고, 은희는 오빠에게 맞는 집안의 일은 아주 작게만 여겨진다. 일상 속의 폭력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멈춰지지도 않는다. 그때 폭력 앞에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라고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주는 선생님이 은희 곁에 존재했다. 모든 것이 무너질 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곳에 발 디디고 서 있을 수 있다.

<벌새>의 여자들 속에서, 사랑받는 일과 자신을 사랑하는 일 사이 길을 잃고 무기력했던 마음은 소원을 품게 됐다. 엄마의 텅 빈 뒷모습을 야속해 하기보다 꼭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내가 만났던 한문 선생님들의 온기를, 살면서 만날 은희들에게 물려주는 것. 언어와 언어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모든 폭력 앞에,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 것. 그렇게 우리를 지켜내는 것.

We Around Project

영화 속 그녀들을 말하다

 

에세이《혼자서도 일상이 로맨스겠어》(2019, 새움출판사)를 썼습니다. Humans of Seoul 인터뷰어, MBC 다큐스페셜 취재 작가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화제 스태프로 일하며 ‘글로 나와 타인을 위로하며’ 살고자 합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워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혹은 애달파서 응원하는 영화 속 여자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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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상희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