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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기가 이렇게 별게 없었나?” 볕이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산책로였다. 그 애 손을 잡고 걸을 땐 찬란하던 길. 그 길을 걸으며 나는 물었다. “너는 내가 어떤 옷을 입었으면 좋겠어?”, “무슨 음식 좋아해?”, “나도 필름 카메라 배워볼까?” 먹는 일, 입는 것, 쉬는 일.. 모든 것을 맞춰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사랑을 얻을 줄 알았다. 그 애가 떠나고, 나는 몇 계절을 밀랍 인형처럼 살았다. 산들바람 살랑임도, 라일락 깊은 향도 느낄 수 없었다. 사랑을 핑계로 자신을 버린 값이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도록 허락한 건 나였다.
“앞가림도 못 한다고요? 그건 숙모 생각이고요.”
감정이 사라졌나 싶던 무렵 <내 사랑>에서 붓 한 필, 창문 밖 구름 하나만 있으면 혼자서도 온 세상을 누리는 ‘모드'(샐리 호킨스)를 만났다. 그녀는 선천적 관절염 때문에 기형으로 태어나 다리가 불편하다.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난 뒤, 오빠는 그녀를 숙모네에 내버렸다. 숙모에게 모드는 밥만 축내는 천덕꾸러기, 길가의 아이들에겐 돌을 던지게 만드는 ‘기분 나쁜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입고 싶은 대로 붉은 원피스를 차려입고, 절룩이는 자신만의 걸음으로 클럽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다. 누가 보든 말든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숙모의 구박을 자신의 생각대로 꼬박꼬박 받아치는 사람. 그게 ‘모드’다. 숙모의 억압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고 싶던 그녀는 어느 날 식료품점에서 ‘에버렛’이 낸 가정부 구인공고문을 보고, 무작정 그의 집으로 찾아 나선다.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혼자 사는 어부 에버렛은 “여자를 구한다고 했는데… 힘쓰는 일이나 할 수 있겠소?” 퉁명스레 말한다. “그럼 내가 뭐로 보이는데요? 저 일 잘해요.” 모드는 그의 무례함에 주눅 들지 않고 받아치지만 자기 필요 없다는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고 돌아간다. 며칠을 고민하던 에버렛은 “일단 일하는 거 보고 정합시다.”라며 모드를 데려오고, 그녀는 숙식 제공 외에도 임금을 당당히 요구하며 에버렛의 작은 오두막에 자리 잡는다.
고된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에버렛을 위해 씩씩하게 닭도 잡고 청소도 곧 잘하는 모드를 보며, 그는 그녀를 향한 의심을 거둔다. 모드는 손 가는 대로 구석구석 꽃과 새를 그려 넣기 시작하고, 칙칙하던 오두막은 사람의 훈기가 나는 집다운 집으로 피어난다. 그녀는 자신의 작은 오두막과 퉁명스럽지만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준 에버렛에게 정을 붙여간다. 관절염을 앓고 있지만, 자신이 부족하다 굽히지 않고, ‘내가 감히’라는 생각 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그녀는 에버렛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부부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에버렛은 “차라리 나무토막이랑 하겠다”며 그녀에게 상처를 준다.
그럼에도 모드는 사랑을 애걸하거나, 동정심을 자극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당신이라도 좋아한다’고, ‘당신은 내가 필요하다’고 고백한다. 나만 이 오두막과 당신의 튼튼한 다리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당신에게도 내 아름다운 영혼이 필요하다는 모드의 설득에 둘은 소박한 식을 올린다. ‘낡은 양말 한 쌍처럼’ 부족하지만 다정한 생활을 이어나간다.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
평소처럼 바닥을 쓸고 닦고, 아픈 다리로 멀리는 나갈 수 없어 창가에 앉아 튤립을 그리던 어느 날. 주문한 생선이 아직 오지 않았다며 한 여자가 찾아온다. 뉴욕에서 잠시 쉬러 왔다는 그녀는 모드의 화풍에 단박에 반한다. 누군가 알아주든 않든, 모드는 자신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순간을 오래 붙드는 하나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왔다. 누군가를 따라 하거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닌 모드의 그림은 자유롭고 독특했다. 그것을 알아본 그녀는 그림엽서를 요청하고, 모드의 그림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방송까지 나가면서 널리 알려진다.
그런 모드의 웃음을 TV로 본 숙모는 말한다. “끝내 행복을 찾은 건 우리 집안에서 너뿐이구나.”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았던 사람, 자신을 낮추지 않고 당당하게 원했던 사람, 삶이 주는 아름다운 것들을 그림이라는 자신의 언어로 기록했던 사람. 그게 모드였다. 혼자서도 붓 한 필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사람, 인간이 오롯한 혼자일 수는 없음을 겸허하게 인정한 사람, 그럼에도 외로움에 자신을 잃거나 매달리지는 않았던 사람. 그게 모드인 것이다. 그녀를 만나고 나온 극장 밖엔 온통 봄이 와 있었다. 붉고, 푸르고, 환하게.
에세이《혼자서도 일상이 로맨스겠어》(2019, 새움출판사)를 썼습니다. Humans of Seoul 인터뷰어, MBC 다큐스페셜 취재 작가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화제 스태프로 일하며 ‘글로 나와 타인을 위로하며’ 살고자 합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워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혹은 애달파서 응원하는 영화 속 여자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글 도상희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