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덤덤히 이별하는 법

영화

그런 사람이 있었다. 감은 눈꺼풀을 하염없이 보게 되는 사람. 그곳에 당신이 나를 떠날 날이 쓰여있기라도 할 것 같았다. 주름이 남은 미간, 숨결 따라 오르내리는 눈썹, 솟은 코를 물끄러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떠났다. 아침부터 밤까지 바라봤던 사람이 사라진 빈방에선 나 혼자 잠들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나는 살고 싶어서 씩씩한 ‘조제’를 다시 보기로 했다. 헤어진 뒤, 당신이 밀어주던 낡고 정든 유모차가 아니라 전동 휠체어를 타고 쓱쓱, 덤덤하게 나아가던 조제의 뒷모습을.

맛있어? 당연하지 내가 만들었는데.”  

걷지 못하는 조제에게 허락된 세상 구경은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뿐이다. 누군가 장애가 있다며 해코지를 할까 두려운 할머니는 낡고 거대한 유모차 속에 조제를 숨겨 비밀 산책을 나선다. 어느 날 괴한의 습격으로 유모차가 고갯길에서 미끄러지고,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츠네오와 조제가 맞닥뜨린다. 얼결에 조제 집에서 아침밥을 얻어먹게 된 츠네오. 밥이 맛있다고 칭찬하자 조제는 수줍게 고맙다고 하는 게 아니라 “당연하지, 내가 만들었는데”라며 당당하게 답한다.

츠네오는 조제가 해준 폭신폭신한 달걀말이와 가진 것 없지만 당당하던 그 눈매가 생각나고, 혹시라도 괴한이 또 나타나진 않을까 걱정되어 조제를 찾아간다. 하지만 두 번째 마주친 괴한에게 호신용 식칼을 휘둘러버리는 게 조제다. 츠네오는 곧 그녀가 누군가를 지켰으면 지켰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고, 구름을 보며 “집에 가져가고 싶다”고 말할 만큼 세상을 사랑하는 조제를 좋아하게 된다. 어느 날, 사람들 눈에 잘 띄는 시간에 조제와 나들이를 하러 간 츠네오는 할머니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며 혼이 난다. 그는 조제를 찾아가지 않으려 애쓰며 여자친구를 사귀고 대학에 다니는 일상을 보낸다.

그럼 그쪽도 다리를 자르던지.”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츠네오는 조제가 혼자서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지 걱정되어 그녀를 찾아간다. 둘은 곧 함께 살기 시작하는데 츠네오를 빼앗겼다며 화가 난 여자친구는 조제를 찾아와 “네 무기(장애)가 부럽다”며 비아냥거린다. 그러나 츠네오는 조제가 장애인이어서 동정한 것이 아니라, 조제가 가진 빛나는 매력에 끌렸을 뿐임을 그녀는 사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질투를 숨기지 못하는 그녀에게 조제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다. 도리어 “그럼 그쪽도 다리를 자르던지” 쏘아 붙여준다.

둘만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둘은 츠네오의 가족을 만나기 위한 먼 여행에 나선다.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를 보고 싶었던 조제는 수족관이 문을 닫은 것을 보고 한껏 응석을 부린다. 그런 조제를 업고 이곳저곳을 다니던 츠네오가 본가에 가지 못하겠다고 동생에게 통보한다. 동생은 “형, 지쳤어?” 묻고 그는 침묵으로 긍정한다. 아마도 츠네오는 처음엔 조제가 세상의 모든 것을 신기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에 반했을 것이고, 자신이 조제의 튼튼한 다리가 되어줄 수 있음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느 연인들처럼 그들에게도 가장 좋았던 부분이 단점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나 혼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조제는 헤어짐이 머지않았음을 느꼈던지, 여행길 묵어가는 어느 밤 조개 모양 침대 위에 누워 츠네오에게 말한다. “네가 사라지면 나는 다시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빈 조개껍데기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래도 그것도 나쁘지 않아.” 조제의 이 말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의 ‘포기’로서, ‘건강한 네가 장애를 가진 나와 영원히 함께할 리는 없으니까, 언제든 보내줄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로 읽힐지도 모른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조제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마친 뒤 땅에 털썩 내려앉는 방식, 그것에서 나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았다. 수 없이 반복해온 생활의 동작 속에서 자신을 믿고 온몸을 내려놓는 순간. 자신이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잘 알고서 가벼워진 사람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 털썩, 인 것이다. 

호랑이로 태어난 호랑이는 다리가 있어 땅을 걷고, 물고기로 태어난 물고기는 다리는 없지만, 지느러미가 있어 헤엄을 친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조제에게 결핍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장애가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무시하고 그녀를 극복한 사람 취급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기만일 것이다. 다만 조제는 이미 자신을 받아들이고 오래오래 혼자 울음을 다 게워낸 사람이다. 그녀는 내 것이 아니었던 모든 것은 언제든 다시 사라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츠네오가 자신과 함께하는 순간이 당연하지 않았고, 오롯하게 기뻐했다. 그가 떠날 때도 선뜻 보내줄 수 있었다.

힘껏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한 조제는 츠네오가 떠난 빈방에서 홀로 울지 않는다. 그녀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산뜻하게 나아가는 뒷모습이 좋다. 더 이상 아무것도 태울 것 없이 마음을 가져다 쓴 사람의 현현한 뒷모습. 영화 밖 어느 부엌에서 조제는 오늘도 단정한 얼굴로 토란을 조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당신 없는 빈방에서도 따스한 밥을 지어 먹는 태도를 조제에게 보았다.

 

We Around Project
영화 속 그녀들을 말하다

 

에세이《혼자서도 일상이 로맨스겠어》(2019, 새움출판사)를 썼습니다. Humans of Seoul 인터뷰어, MBC 다큐스페셜 취재 작가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화제 스태프로 일하며 ‘글로 나와 타인을 위로하며’ 살고자 합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워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혹은 애달파서 응원하는 영화 속 여자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 도상희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