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영화
대학 시절, J 언니네에서 며칠 함께 묵으며 포럼을 준비하던 초봄이었다. 우리 넷은 술에 취해 바람 부는 언덕길을 왁자지껄 올라갔다. 술을 잔뜩 마시고 밤을 걸어도 혼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우리는 꼭 <바닷마을 다이어리> 네 자매처럼 과실주 뚜껑을 열었다. 지난해 다 같이 담궜던 딸기주였다. 홀짝이다가 이야기하다가, 달구어진 얼굴을 식히려 옛날식 복도로 나가면, 저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였다. 우리는 난간에 기대어 울다가 웃다가 이내 아무렇게나 엉켜 잤다.
다음 날이면 눈을 비비며 아침을 차렸다. 계란이 반숙으로 잘 구워진 날이면 다 같이 손뼉을 쳤다. 아침 설거지가 끝나면 약속한 순서대로 누구는 빨래를, 누구는 청소를 하다가 각자의 오늘을 물었다. 그리고 다 함께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그 길엔 낮은 나무들이 많이 심겼더랬다. 살랑이는 나뭇잎 아래서 누구도 ‘오늘 하루도 열심히!’ 같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빛만 봐도 힘이 났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
가족이 별 게 아니구나, 같이 먹고 마시는 식구가 가족이지, 하는 마음을 선물해준 시절이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타인이었던 막내 ‘스즈’가 한 가족으로 스며드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바닷마을에는 첫째 사치, 둘째 요시노, 셋째 치카가 산다. 부모님의 이혼 후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세 번째 부인과 산다던 아버지의 15년 만의 첫 소식은 부고였다. 장례식장에선 남겨진 딸 스즈가 어른스러운 눈동자로 자매들에게 첫인사를 건넨다.
스즈의 반듯함, 제 나이로 살지 못하는 아이의 꼿꼿함. 그 모습이 첫째 사치의 눈에 밟힌다. 조문 온 사람들에게 인삿말을 해야 하는 순간, 스즈의 새엄마는 자기는 슬퍼서 못한다며 고작 열다섯 스즈에게 이 역할을 떠넘기려 하고 이때 첫째가 나선다. “아니요. 어른들이 할 일입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작은 아이가 새엄마 대신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살펴드렸으리란 것을.
“같이 살래?” 물음에 세 자매는 네 자매가 된다. 첫째는 스즈에게서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지려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까. 어른에게 응석 부리는 게 어색해져 버린 스즈가 측은했을까. 하지만 할머니는 첫째를 나무란다. “사람은 개나 고양이가 아니야. 너희 가정을 깨트린 여자의 딸이잖니.” 그녀는 대꾸하지 않는다. 스즈에게는 죄가 없으니.
스즈는 새로 맞이한 가족 속에서 점차 자신 안의 ‘아이다움’을 찾는다. 축구부에 들어가 신나게 공을 차고, 함께 밥 먹을 때 “맛있다! 더 주세요!” 표현하고, 함께 담근 매실주가 달다며 호로록 마시고는 꼬인 혀로 “엄마, 아빠 미워!” 속마음을 뱉어본다. 웃음을 되찾아간다. 세 명이나 되는 언니들이 “야, 그 블라우스 내꺼잖아~” 밥상머리 다툼을 하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다정히 말해주니까, 사는 것 같다. 그 시끌시끌함이 스즈의 볼에 생기를 가득 불어 넣었다.
“엄마는 금방 익는 해산물 카레를 해줬어.”
그런데도 스즈는 철모르는 아이는 되지 못한다. 언니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나는 한 가정을 깨트린 여자의 자식’ 이란 죄책감을 안고 지낸다. 세 언니의 엄마이자 자기 아버지의 옛 부인이었던 사람을 맞닥뜨리고는 그녀가 부드럽게 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스즈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사람들은 어머니라는 임무의 숭고함을 찬미하는 동시에, 이를 완벽하게 완수할 줄 모르거나 완수할 수 없었던 여성들을 모두 비난했다. (중략) 어머니의 역할에 갇히게 된 여성은 도덕적 비난을 받지 않고는 이제 그 역할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만들어진 모성》-엘리자베스 바댕테르
셋을 옛집에 두고 떠난 자매들의 엄마는 둘째의 기억 속에서 ‘금방 익는 해산물 카레’를 자주 했던 사람이다. 곰국 같은 걸, 불 앞에서 오래오래 정성 들여 끓여내는 그런 모성애 있는 어머니가 아니라 금방 익고, 몇 번이고 데워서 더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했던 사람. 첫째는 ‘우리를 버리고 간 사람’이라며 엄마를 원망하지만, 어머니라고 해서 더욱 야속해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들을 키울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으니 이들이 어른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미숙한 사람이라 비난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모성애의 부재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 아빠가 없는 바닷마을 자매들의 가정에서 일종의 가부장 역할을 한 것은 책임감 강한(부모의 부재라는 환경 속에서 그녀가 강해졌는지, 천성이 그러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첫째였다. 이들은 전형적인 가부장제(가장이 가족성원에 대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지배, 통솔하는 가족 형태)의 리더쉽과는 다른, 연대의 방식으로 서로를 키워내 왔다. 매일 밥상을 차리는 일부터 시작해서 스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자는 선택이나, 오래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는 일, 간호사 혹은 은행원이라는 직업인으로서 마주치는 일을 더 잘해내고 싶다는 고민 등…. 자매들은 이러한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 속에서 혼자서 문제를 삭이기보다는 열어놓고 이야기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삐치거나 밥상머리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가족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건강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보인다.
“여기가 네 집이야. 언제까지나.”
연대는 온갖 고통을 겪어낸 사람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사람은 덜 겪도록 모든 것을 최대한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너는 나보다 덜 힘들었으면 해. 그러니 내가 겪은 모든 걸 알려줄게.’ 하는 마음가짐이 연대라는 것이다. (이슬아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 중에서, 정혜윤의 말) 그런 마음으로 언니들은 넷째 스즈를 들였다. 첫째 사치는 “여기가 네 집이야. 언제까지나.” 믿음을 줬다. 간섭하기보다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 마을에서 어떤 스즈로서 살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도왔다.
둘째 요시노는 출근길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어봐. 그러면 매일 아침 눈 뜨고 싶어져.” 알려주고 발에 매니큐어를 발라주면서 “이건 남자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한 거야. 꾸미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말한다. 스즈에게 사랑의 기쁨과 자신을 가꾸는 일에 대해 알려준다. 셋째 치카는 스즈가 처음으로 마음 편히, 아버지와의 추억을 말해보는 사람으로, 아빠가 좋아했던 멸치 덮밥을 먹으면서 “돌아가신 아빠에 대해 (죄책감 없이) 말하고 싶을 때 언제나 말해도 돼.” 알려준다.
이런 세 자매 속에서 스즈도 아마 누군가에게 정성껏 알려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랄 것이다. 대학에 다닐 때의 내가 언니들과 함께 딸기주를 마시며 배웠던 것처럼. 부모를 떠나와 시작한 타향살이 속에서 언니들을 가족으로 느끼고, 그들로부터 내 시간을 들여 타인에게 따스한 밥을 해주는 마음을 물려받은 것처럼.
에세이《혼자서도 일상이 로맨스겠어》(2019, 새움출판사)를 썼습니다. Humans of Seoul 인터뷰어, MBC 다큐스페셜 취재 작가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화제 스태프로 일하며 ‘글로 나와 타인을 위로하며’ 살고자 합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워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혹은 애달파서 응원하는 영화 속 여자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글 도상희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