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개의 ‘쓴’ 단상들

브런치와 함께한 오후의 이야기

여섯 개의 ‘쓴’ 단상들

브런치와 함께한 오후의 이야기

“아침 일곱 시, 알람 소리에 일어나 손을 더듬어 안경을 찾아 쓴다. 진하게 내린 쓰디쓴 커피를 마신다. 아침을 먹으며 오늘 해야 할 일을 노트에 쓴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선다.” 《어라운드》와 브런치가 한 달여에 걸쳐 ‘쓰다’에 담긴 이야기를 모았다. 짧지만 진한 여섯 개의 여운을 여기에 쓴다.

첫 번째 쓰다
사라져가는 것을 쓰다
글·사진 강지혜 (brunch.co.kr/@kangjak)

아빠의
웃음

지금 쓰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았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나는 또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았다. 고작 나라는 사람이 쓴다 해도 사라져 가는 것들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늦은 달, 펜을 드는 것은 또다시 마주할 생에 그것들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고 아빠가 들어오면 언니와 나는 망아지처럼 뛰어가 그 품에 안겼다. 아빠의 품에선 늘 진한 기름 냄새가 났다. 이곳저곳 검게 묻은 손으로 우리를 번쩍 들어 올려 하늘에 띄우며 아빤, 온 힘으로 우리에게 세상을 보여주었다. 하얗고, 푸르고, 높았던 세상. 그 손에는 우리에게 줄 과자,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신나서 환호할 때면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여름은 우리 가족이 좋아하지 않은 계절이었다. 사람들이 보일러를 사용하지 않으니 기름 배달하는 일거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적에는 그래도 겨울철에 정신없이 벌어서 여름을 충당할 수 있었지만, 도시가스가 들어오고부터 우리 가족에게 여름은 지겹도록 더운 계절이 되었다.열여섯 살의 겨울, 수업을 마치고 집 근처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아빠의 기름 차가 보였다. 오르막을 씽씽 오르는 다른 차들 사이에서 아빠의 낡은 기름 차는 아주 느리고 힘겨워 보였다. 다른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소리쳤고, 작은 창으로 정신없이 핸들을 돌리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아빠에게 달려갔다. 혼잡함 속에서 아빠는 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겨우 오르막을 올라 기름을 넣을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빠가 올라야 할 오르막은 한참 더 남아있었다. 나는 보조석에 앉아 다리를 구르며 아빠가 모아둔 사탕을 오물오물 먹었다. 창 너머로 길고 두꺼운 호스를 어깨에 메고 경사진 오르막을 오르는 조금은, 낡은 아빠가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사탕이 입에서 다 녹기도 전에 송아지처럼 엉엉 울었다. 돌아온 아빠가 왜 우냐고 울지 말라고 했을 때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나는 슬펐던 것 같다. 아빠의 웃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눈으로 보는 것이.

여름은 아프게도 더 더워졌고, 아빠의 한숨은 그만큼 깊어졌다. 어느 여름, 대학교 축제가 끝나고 늦게 집에 돌아왔다. 문틈 사이로 아빠와 엄마가 나누는 진지한 이야기가 들렸다. 아빠의 낡은 기름 차를 폐기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와 멍하니 벽을 바라봤다. 언제나 집 앞 주차장에 다른 차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수그리고 있던 작고 낡은 빨간 차. 그건 단지 생계 수단이 아니라 아빠, 아빠였기 때문이다. 바르르 떨렸다.

아빠가 어느 날 시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고 말했다. 하루걸러 하루를 꼬박 새워야 하는 고된 일인데도 아빠는 너무나 좋아했다. 햇볕에 그을린 살결은 점점 진한 갈색으로 변해갔고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그러나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들어온 아빠의 손에는 녹지 말라고 꽁꽁 포장해온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우리 지영이, 지혜 먹으라고 사 왔지. 아빤 너희가 맛있게 먹는 거 보는 게 가장 좋아.” 나도 아빠에게 잘 하겠다고 어색하게 말하면 아빠는 내리사랑이라며 너희도 너희 자식들에게 잘 해주라고 말할 뿐이었다. 

고작 나라는 사람이 쓴다 해도 사라져 가는 것들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하늘로 띄워주던 아빠의 젊던 순간과 웃음들. 그럼에도 나는 아빠의 사랑을 쓴다. 그날, 송아지처럼 울던 내 등을 도닥이던 아빠의 손이 너무나 따뜻해서 나는 울음을 멈추고 환하게 웃었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의 사랑을 마음에 써놓는다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것을.

진심의
편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우리 우정 변치 말자.’, ‘엄마, 아빠 둘째 딸이 많이 사랑해요. 이다음에 커서 효도할게요.’, ‘자기야, 늘 화내는 나를 참아줘서 고마워. 미안하고 사랑해.’ 한 장의 종이 위에 진심이라는 진한 잉크로 한 자 한 자 쓴 편지. 내가 깊숙이 밀어 넣어둔 그 편지 꾸러미를 발견한 것은 사무치도록 외로웠던 어느 밤이었다. 메신저 프로필 속에서 나는 한 방울의 외로움조차 느끼지 않는 것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우정 변치 말라던 우리는 작은 휴대폰 너머로 서둘러 약속을 정하고는 얼굴을 돌리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행복하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이미지들을 수차례 전송하는 엄마에게는 어딘가 애타는 마음이 느껴졌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던 너와 나는 조그만 대화창 위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차가운 이별을 했다. 그리고 나는, 계속 울려대는 메신저와 빡빡한 일정 속에서 문득 우두커니 멈춰서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니 그들의 표정이 나와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았다. 신호등 건너편 우산을 들고 있는 여자도, 지하철 맨 옆자리 꾸벅꾸벅 졸다 일어난 남자도, 공원에서 아이를 무릎에 누인 채 한곳을 응시하는 엄마도.

이러한 마음은 ‘다음 브런치’에 아날로그북클럽이라는 독서모임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책 안에 자신의 느낌과 진심을 적어 편지를 보내듯 서로 돌려 보는 모임이었고 처음엔 아무도 신청해주지 않는다면 지인들끼리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 글을 올린 다음 날 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우린 책을 돌려 보며 그 위에 진심을 적었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정신없이 일했다는 회사원, 수술실 앞에서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딸, 꿈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학생, 그들은 그동안 마음에만 담고 있었던 진심을 책 위에 한 자 한 자 더해주었다. 마침내 내게 도착한 책을 펼쳐 보았을 때 나는 또 울고 말았지만 그건 외로워서가 아니라 따뜻해서였다.

고작 나라는 사람이 쓴다 해도 사라져 가는 것들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두껍아 두껍아 손등에 손을 대고 나누던 접촉, 우표가 떨어질까 엄지손가락으로 몇 번을 꾹꾹 누르던 순간들. 그럼에도 나는 진심의 편지를 쓴다. 어렴풋이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세상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우리는 서로를 더욱 끌어당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청춘의
사랑

누군가 연애는 영원한 미완성의 애정이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4년 전 어느 날이었다. 나는 어떤 신비한 순간에 이끌려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내려다보는 그의 눈 아래서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나를 만났다.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빛.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나를 좋아하게 만든 사랑. 풀벌레 소리가 가득했던 가을밤, 벤치 위에서 나는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그때 그가 낮은 목소리로 고백하듯 그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내려다보는 그의 눈 아래서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나를 만났다. 두렵고, 간절한 빛.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나를 두려워하게 만든 사랑.
우리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딸, 지민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높이 아이를 안아 올리는 남편. 그 뒤에서 나는 희미한 그들을 지켜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나는, 그에게 더 아픈 말을 쏟아냈다. 온전히 사랑하지도, 온전히 떠나지도 못하는 겁쟁이 앞에 그들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과거로 마음껏 돌아갈 수 있는 어느 영화를 그는 무척 좋아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손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아 어디론가 먼 과거로 떠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가고 싶었던 곳은 나를 만나기 훨씬 전인, 그의 아픔을 만나기도 훨씬 전인 어느 고요한 날이었을 것이다. 사랑했던 할머니와 웃음 짓는 엄마, 아빠 곁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어느 날로.고작 나라는 사람이 쓴다 해도 사라져 가는 것들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서로를 향해 있느라 영화의 반도 보지 못했던 시간들, 겨우 타박타박 걸음을 뗀 아이의 손을 잡고 다가가는 따뜻한 여자의 모습도. 그럼에도 나는 청춘의 사랑을 쓴다. 어렴풋이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랑, 하고 있다면 지구가 자전하듯 언젠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올 것이란 것을.

두 번째 쓰다
너에게 마음이 쓰여
글·사진 정유진 (brunch.co.kr/@pongdang)

‘내일 만나자.’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울 때가 있었다. 해가 저만치 멀어지면 하루의 대화가 쌓여 책가방과 함께 덜거덕 소리를 낼 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혹시 친구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을지, 나의 작은 머뭇거림이 우리 사이를 흔들어놓았을까 고민하며 16동 아파트 관리실을 지났다.

13층 한구석에 자리 잡은 우리 집에서는 향기가 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에 가까워질수록 향은 짙어졌다. 매미가 울부짖는 한여름에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아파트 복도가 우리 집 같았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옆 동으로 향기가 건너갔다. 책가방을 내려놓으면 한껏 무거워진 하루의 기억도 조금 가벼워졌다.

우리 가족은 풀을 좋아했다. 엄마는 아침마다 잎을 하나씩 닦으며 화초와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 시든 화분은 볕이 더 잘 드는 베란다를 차지했다. 일 년 내내 푸른빛을 뽐내는 건강한 아이들은 현관 밖에서 나를 맞곤 했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뚫고 장마가 시작되면 향기는 더욱 진해졌다. 생명을 품고 있던 흙이 물을 만나 진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 옆에서 내가 낮잠이라도 자면 꿈에서 내가 풀이 되었다.

밤에 이불을 덮고 천장을 바라볼 때마다 누군가가 떠오른다. 아무 일도 아닌 척했지만 이제야 마음이 쓰이는 사람, 조금 더 친절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못내 미안한 사람, 옆에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을 계속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내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말했어야지 이제 소용없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잠이 든다.

바질, 오레가노, 민트 같은 허브는 제때 물을 못 주거나 햇빛이 충분하지 않으면 쉽게 시들하다 말라 죽고 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적당량의 수분과 바람, 일조량을 체크해야 한다. 한낮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반가울 때도 있지만 거센 바람에 흙이 쓸려 가진 않을까 마음을 써야 한다. 밤이 되면 온도가 너무 떨어져 흙이 얼지는 않을지 신경이 쓰인다. 필요할 때 손길을 주지 못해도 쑥쑥 잘 크는 허브를 볼 때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일주일에 두 번, 잎을 똑똑 따서 샐러드에 버무리거나 반찬에 얹어서 밥상에 내놓는다. 미처 스며들지 못한 물방울이 아직 잎에 맺혀 있다.

마음에 남아 있는 친구를 초대해서 함께 밥을 먹는다. 화려하고 맛난 요리가 가득한 거리를 옆에 두고 소박한 한 상을 차려낸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13층 우리 집 한낮의 베란다 냄새가 다시 나기 시작한다.

해가 넘어가고 우리의 대화가 다시 가벼워질 무렵 허브에 물을 줘야 한다. 이제는 무거워진 책가방 대신 한껏 부푼 마음이 빙긋 웃는다. 길어진 그림자를 밟고 허브와 화초와 버섯이 향기를 뿜는다. 길었던 대화에 마침표를 찍고 반갑게 인사한다.
‘안녕, 내일 보자.’

세 번째 쓰다
시간을 쓰는 방법
글·사진 김현길 (brunch.co.kr/@zazzseo)

이른 아침의 냄새가 묻어 있는 희뿌연 플랫폼에 도착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약속된 열차에 올랐다. 무궁화호의 익숙한 그 냄새. 잊고 있던 오랜 여행의 기억들이 단번에 되살아났다. 순서 없이 뒤죽박죽으로 깨어나는 옛 추억들을 곱씹으며, 차창 밖에 시선을 던졌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었다고 하지만, 여행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이렇듯 공항보다는 기차역이 먼저 떠오르곤 했다.

여러 가지 교통수단이 있지만, 이동 중의 시간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기차가 가장 먼저였다. 대학생 시절, 대구에 있던 학교와 울산의 집을 연결해주던 동해남부선 구간이 나에게 가장 익숙한 기찻길이었다. 지난 여행 기록을 들춰보면 유독 기차에서 남긴 그림들이 많았다. 장거리 이동인 경우가 많아 그림을 완성할 시간이 넉넉히 주어졌고, 버스보다 상대적으로 안락한 탑승감 때문에 부담감이 덜했다. 지금도 이동 중에 남기는 그림의 절반 이상이 기차 안의 풍경들이다.

기념하고픈 여행의 순간이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심장은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하는 그 순간에 가장 힘차게 쿵쾅거리곤 했다. 설레는 여행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공간. 그곳은 바로 공항이다.
여행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공항이 가지는 의미가 작지 않지만, 돌아보면 여행 기록 속에서 공항에서의 순간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탑승 수속을 밟고 서둘러 짐을 맡기는 과정을 마치다 보면, 어느새 기내에 탑승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혹시 비행기가 지연되거나, 환승을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면 그 짧은 틈을 그림으로 담아보는 것은 어떨까. 나만의 독창적인 기록으로 여행의 시작과 끝을 기념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행위일 테니까.

전체 여정 중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낭비되기 가장 쉬운 것이 바로 이동 중에 흘러가는 순간들이 아닐까 싶다. 버스, 기차, 비행기 등의 소규모 공간은 기념할 만한 풍경은 아니기 때문에, 여행 기록으로써 의미 부여가 잘 되지 않는 소재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평범한 순간들은 그림으로 남겨 놓지 않으면 다시 돌아보기 어렵고 사라져버리기 쉬운 기억이 되기 쉽다.

여행 후 이동하며 남긴 자잘한 기록들을 들춰보았다. 습관처럼 남겨놓은 보잘것없는 기록들로 인해 여행의 추억이 더욱 풍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낭비되는 나의 시간들을 그림으로 붙들어보는 건 어떨까. 남들과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그 누구보다 밀도 높은 여행을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기록하기 위해 시간을 쓴다.
하얀 종이 위에 흘러가는 시간을 쓴다.

네 번째 쓰다
나무젓가락을 쓰다
글 김은경 (brunch.co.kr/@ahala)

“쇠젓가락은 무거워서 들지를 못해.”
식구끼리 점심을 먹으러 간 냉면집, 아버지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가방에서 고운 니트 커버를 씌운 대나무 젓가락이 나온다. 아버지의 ‘외출용 젓가락’이다. 어머니도 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아버지의 젓가락에는 이미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한다.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젓가락을 잡으신다.

아버지는 40대에 나를 늦둥이로 얻으셨다. 올해 82세이신데, 딸인 나는 이제 30대 후반이다. 난 또래에 비해 이르게, ‘늙은 부모님과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친구들의 부모님이 한창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던 것과 달리, 아버지는 내가 10대일 적에 은퇴하셨다. 스물둘 무렵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다행히 증상이 경미한 편이라, 보름간의 입원과 재활치료로 몇 달 안에 정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당시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경험을 한 아버지는 덜컥 겁이 나셨던 모양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틈만 나면 나에게, ‘나중에 내가 떠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행동강령’을 전수하기 시작하셨다. 나 역시 재활치료실에서, 아버지가 유아용 셈하기 장난감의 알구슬 하나를 힘겹게 반대편으로 넘기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눈물을 삼켰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 행동강령 하나하나를 무겁고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아버지가 없으면 엄마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내가 힘들어졌다.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질리는 법이다. 하물며 ‘당장 내일이라도 내가 어찌될지 모르니 넌 늘 긴장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말은 오죽하겠는가. 아버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부모의 죽음을 가정하고 ‘그날’의 시뮬레이션을 해보며 아버지 사후의 대책을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하듯 떠올려보는 것은 정신적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창 꽃필 스물 초반의 나이에, 왜 나는 이런 우중충한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하나 싶어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버지의 레파토리는 ‘나는 이제 예전 같지 않고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였다. 나중에는 당신 사후의 행동강령 자체보다는, ‘아픈 아버지’를 가진 딸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충분히 여기에 걸맞은 태도로 부모를 대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그 과정에는 언제나 잡음이 있어, 아버지는 열에 아홉은 나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며 화를 내셨다. 자식이 되어 늙은 부모를 그만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나는 나대로 한다고 했지만, 늘 부모님에겐 모자라기만 했다. 내가 그렇게 몹쓸 자식인가 싶어 속상하기도 했고, 스물 초반인 나에게 이런 요구가 합당키나 한가 싶어 화도 났다. 또래 부모님들 중엔 자신들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러워하며 자식을 닦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노인이 되면 아이가 되고, 자기연민이 많아지며 쉽게 서러워한다는 것을 책을 통해, 그리고 집에서의 경험을 통해 알고는 있었다.나이든 부모와 살았기 때문에 노인 심리에 대한 책을 열심히 찾아 읽었고, 서점에서 같은 종류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죄다 중년 이상의 사람들인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었다. 어쨌거나,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이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당신의 기대치에 내가 어긋나면 서운해하며 화를 내셨고, 그런 아버지가 나를 부르기라도 하면, 내 표정은 나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나는 어떻게 해도, 아버지가 바라는 만큼 아버지의 불안에 공감할 수 없었다. 늘 평행선일 것만 같았던 부모님과 나의 간극은, 세월이 흘러 나의 내면이 조금씩 성장해나가면서 차츰 좁혀지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좀 더 철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20대 때와는 달리, 아버지를 내 ‘아빠’이기 이전에, 삶의 마지막을 향해 걷고 있는 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아버지의 ‘설교’가 다르게 다가오며 눈과 마음이 트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한 가정을, 직장에서는 한 부서를 이끌던 때가 있었다. 어머니와 열렬한 연애도 하셨을 거고, 자그마한 딸이 걸음마를 걷는 것을 보며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하셨으리라. 그때의 아버지는, 당신의 노쇠한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말을 안 듣는 자신의 몸을 싫어도 확인할 수밖에 없고, 매일 먹는 약은 늘어만 가고,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서 방문해야 하는 병원도 많아지기만 한다. 인생의 종착역에 언제 다다를지는 모르지만, 멀지 않았다는 것을 매일의 몸 상태를 통해 확인한다. 그러니 얼마나 두렵고, 또 외롭겠는가. 뇌졸중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엔, 달리 의지할 곳 없는 어린 딸이 얼마나 눈에 밟혔겠는가. 지금껏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사후 행동강령’은 철없는 어린 딸을 위한 걱정이었다. 나이든 부모를 두어 내가 괴로웠던 것이 아니라, 너무 어린 자식이어서 노쇠한 부모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결혼을 한 후에는, 딸을 믿고 맡길 곳(여성이 의존적인 존재도 아닌데 믿고 맡긴다는 게 영 마뜩잖지만, 저 시대 양반에겐 그게 삶의 진실인 법이다)이 생겨서인지 이전과 같은 설교는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여전히, 삶의 마무리 길을 걷는 인간의 두려움과 고독이 빚어낸 불안이 남아서, 눈만 마주치면 ‘내가 예전이랑 달라’, ‘입맛이 없어’, ‘걷지를 못해’라고 하신다. 사실, 실제보다 다소 과장된 부분이 없잖아 있다. 가출한 입맛은 고깃집 외식할 때엔 신기하게도 다시 돌아오고,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못 따라갈 만큼’ 빠르게 걷기도 하신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입버릇처럼 나오는 그 넋두리가, 한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이 담긴 애잔한 엄살인 것을 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작아 보일수록, 나는 아버지를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몇 년 전, 어머니가 심장질환으로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거쳐 열흘간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다. 그때의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약한 소리 한 번 하지 않으시고, 매일을 병원에 출퇴근하다시피 하셨다. 나도 퇴근 후 매일 병원에 갔다가,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순댓국을 먹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문득 아버지의 어깨가 작고 여리게 느껴져 손을 잡았다가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힘내자고 잡은 손이 너무 앙상하고 눅눅해서, 아버지의 쇠약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다음 날 어머니를 위해 챙겨올 물품들을 읊조리며, 깜빡깜빡 자꾸 잊어버린다고 비통해하고 계셨다. 난 그런 아버지에게 힘이 되고픈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아빠, 노인이 되면 왜 자꾸 깜빡깜빡 하는지 알아?”, “몰라. 왜인데?”,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남은 시간 동안 진짜로 중요하고 소중한 것만 기억하라고, 쓸데없는 걸 잊게끔 신이 그렇게 만든 거래. 그니까 아부진 마누라랑 딸내미만 안 잊어버리면 돼.”, “그래….”

말하고 나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콧날이 시큰해졌다. 아버지는 내 손을 꽉 잡으셨다. 그래도 손아귀 힘이 영 세지가 않아, 내가 손에 힘을 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몸과 느려지는 정신을 붙들고, 매일을 작지만 묵직한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노인이 거기 있었다. 그게 나의 아버지이고, 나의 어머니였다.

요즘은 ‘가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더욱 그렇다. 아이는 자신의 움직임부터 신기해하며 주변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를 쓴다. 숟가락을 잡고 음식을 입에 가져다 넣는 것도 적응의 과정이다. 그 적응을 돕기 위해 부모는 아이를 돌보며, 격려하고 지지한다. 아이와 세대의 반대편에 있는, 늙은 부모도 나름의 적응을 하느라 애를 쓴다. 이전에는 필요 없던 지팡이가 필수품이 되고, 걷다가 잠시 쉬며 허리를 두드리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삶에 시한부 선고라도 하듯 늘어가는 병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척, ‘자식들 걱정하지 않게’ 몰래 앓고 마는 것도 연습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늙은 부모의 이런 적응을 아이의 그것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늙은 부모도, 아이 못지않게 큰 변화를 겪는다. 인생의 마지막을 예고하는 변화이기에, 낯설고 두렵다. 그리고 가족이라면, 구성원이 삶의 중요한 단계에 있을 때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 세대가 세상을 잘 받아들이도록 지지하는 것도 가족이고, 늙은 세대가 세상을 잘 마무리하도록 지지하는 것도 가족일 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못 먹겠다고, 못 걷겠다고 하신다. 그 말이 듣기에 불편하고, 안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들어 외면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이제는 말 뒤에 숨은 뜻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지금 이만큼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불안하다고, 외롭고 무서우니 날 좀 봐달라고 하는 외침이다. 아버지는 지난 15년간 당신만의 서툰 방식으로 어린 딸에게 손을 내밀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내가 10년이라도, 아니 5년이라도 빨리 이런 것을 알았더라면, 아버지의 남은 시간을 좀 더 덜 외롭고 따스하게 채워드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만간 부모님과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갈 예정이다. 아버지는 분명 쇠젓가락의 무게와 당신의 손아귀 힘의 관계를 논하며, 예의 그 ‘외출용 젓가락’을 꺼내실 게다. 그 젓가락으로, 입맛이 없다는 추임새와 함께 샐러드 두 접시와 밥 한 공기, 고기 1인분을 너끈히 드시기를 기대한다. 서툰 손놀림으로 수저를 입에 넣는 내 아이를 따스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것처럼, 역시 따스한 시선으로 아버지의 둔한 젓가락질을, 굼뜬 걸음걸음을 지켜볼 것이다. 잘 드시고도, 고집스럽게 ‘내가 요새 잘 못 먹어’라고 덧붙이시면, 남편과 눈을 마주치고 슬며시 웃을 것이다. 

그간 어리고 철모르던 딸이라 헤아리지 못했던 노쇠한 아버지의 속내를, 남은 시간 동안에라도 열심히 귀 기울여 듣고, 보듬고 싶다. 언제가 되건, 아버지에게 나는 여전히 남기고 가기 걱정되는 어린 딸일 것이다. 그래도 이 지구별에서, 한 생을 함께하며, 아버지와 딸로서 괜찮게 살았노라고, 네 덕에 내 삶의 한쪽이 조금이라도 따스했노라고 미소 지으며 회고하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나에게 그 시에 한 단락을 추가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다음과 같이 적고 싶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람은 아이로 태어나 아이로 돌아감을 알고
늙은 부모의 마음 속 아이를 꽉 안아 주었으리라
그들이 어린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다섯 번째 쓰다
밥풀처럼
글 김보미 (brunch.co.kr/@wonderland)

“에이, 괜찮아요. 그래도 하루에 열 번은 안 하잖아요.”
사회 초년생의 ‘실수’는 백반집 김치 반찬 같은 것이었다. 입사 후 들었던 많은 말 중 기억나는 말이 하나 있다. 야자나무처럼 생긴 거대한 선인장이 시들어가는 흡연실에서 선배가 무심하게 스르륵 담배 연기처럼 내뱉은 말.
“잘하려고 하지 마. 실수해도 이상할 게 없어. 선배들은 네가 잘할 거라는 기대를 안 해. 실수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거야. 얼마나 좋으니?”
지독하게 현실적인 위로였다. 선배 말대로 우리들은 매일 실수를 낳았다. 봐줄 만한 실수만 하느냐, 치명적인 실수를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중대한 실수만은 하지 말자고 매일 다짐했다. 내가 얼마나 구멍투성이인지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누구보다 불안한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을 시작한 친구는 PD가 실수를 지적하자 이렇게 되받아쳤다.
“에이, 괜찮아요. 그래도 하루에 열 번은 안 하잖아요.”
당찬 배짱에 PD는 허허 웃고 말았다.
“허, 허허, 허허허허. 그래, 다행이다.”, “에에이, 막내가 다 그렇죠 뭐. 하루에 열댓 번씩 실수하고 그러는 거죠. 그래도 전 열 번은 안 하잖아요.”
이런 똑똑이를 봤나. 나는 상상도 못 한 혁신적인 답! 이 녀석. 좋은 작가가 되겠군. 그때 생각했다. 역시 떡잎부터 달랐던 친구는 거칠게 자라 작가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주제 파악이 빨랐던 나는 일찍이 직업 교체를 선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적당한 시기에 좋은 선택을 했다. 인생에서 잘한 선택이 몇 개 없는데, 그중 확실한 두 개가 있다. 방송 작가가 된 것. 방송 작가를 그만둔 것.
열 번씩은 아니지만 친구도 나도 실수투성이 시절이었다. 지금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 맞춤법, 띄어쓰기, 오타 확인은 그때도 문제였다. 아무리 봐도 꼭 내 눈만 피해 가는 녀석들. 왜 두 번 세 번을 봐도 안 보이다가 팀장님 손에만 넘기면 뿅 나타나서 ‘케헤헤헤, 또 속았지.’ 하고 음흉하게 웃는 것인지 얄미워 죽을 맛이다. 원고와 보도자료를 읽는 팀장님 옆에 서서 나를 향해 고개를 쏙 내미는 얄미운 오타들.
“네 이놈들!!! 가만 안 둬.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제발! 제발….”
그러나 여지없다. 요놈들은 금방 들킨다. 팀장님의 노란 색연필이 다가간다. 동그란 그물을 만들어 잡아 올린다.
“둥둥아. 나는 원고를 보는 사람이지 오타를 보는 사람이 아니다.”
팀장님이 점잖게 한마디 하실 때 내 얼굴은 이미 활활 불타고 있다. 그때는 책임진다는 게 두려웠다. 막내라서 실수를 해도 파급력이 크지 않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조금 번거로워지면 그뿐. 그래서 입봉하기 싫었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바람이었다. 두려워도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실수에 관대한 사람들과 유독 심하게 꾸짖는 사람, 실수 아닌 것까지 트집 잡는 사람들이 모두 곁에 있었다. A4 한 장짜리 보도자료를 종일 열 번 넘게 고쳐 쓴 날이 있었다.

그날 쓴 보도자료는 우리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첫 번째로 기억하는 아이템이었다. 처음 편집 구성안을 받아보고 ‘음, 어렵지 않겠군.’ 하고 생각했다. 취재도 잘 되었고 흥미로운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다 예상을 빗나가서 종일 열 번도 넘게 고치고 또 고치고 나중엔 내가 쓰고 있는 게 반성문인지 보도자료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날 일기를 쓸 정신이 있었다면 ‘곤죽이 되었네.’라고 한 줄 적었을 것이다. 보도자료를 쓰기 며칠 전 선배의 심기를 건드린 것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일부러 트집을 잡은 것이라는 뒤늦은 심증이 생겼다. (너무 늦은 심증이군. 10년이나 지났잖아.)
시간이 갈수록 실수를 짚어주는 사람이 줄어든다. 책임이 커진다. 부담이 늘고 스트레스도 늘어난다. 그런 것이 다 월급 값이지 뭐. 가끔은 그때처럼 보도자료 내밀 듯 ‘제가 한 거예요.’ 하고 옛 팀장님께 결과물을 보여드린다. 그럼 팀장님은 이건 그 프로그램 냄새가 난다고 웃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때 배운 냄새를 빼지 못한다. 혹은 그건 실수로 다져진, 뺄 필요 없는 소중한 자양분일지도 모른다.

실수투성이 나를 참고 가르쳐준 사람들이 생각난다. 말도 안 되는 촬영 구성안을 비웃지 않고 성실하게 그림을 찾아준 조연출 선배. 구성안을 받고 얼마나 어이없었을지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첫걸음을 배운 순간은 기억에 선명히 자국을 남긴다. 5번 편집실. 편집기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음악과 편집의 교차를 설명해주고, 리듬감에 대해 설명해줬던 것이 기억난다. 배경에 깔았던 음악은 미카Mika의 ‘Ring ring’이었다.
지금도 나는 실수를 당연히 여기며 산다. 나의 실수도 누군가의 실수도. 내 입가엔 실수가 밥풀처럼 붙어있다. 그래서 내 눈에 보이기 전에 남들이 먼저 본다. 실수한 주제에 뻔뻔하게 군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 늘 생각한다. ‘밥풀처럼 붙어있다. 실수가.’ 그리고 내 실수를 말없이 견뎌준 사람들만큼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처럼 실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읽은 책에 이렇게 쓰여 있더라. “세상의 모든 문제는, 바보와 미치광이들은 언제나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는 반면 현명한 사람들은 자기 의심에 가득 차 있는 데서 비롯된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평생을 가도 완벽히 오타를 잡아내는 데는 영 실패할 것 같다. 맹세컨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내 밥풀이 너무 크다. 힝.

여섯 번째 쓰다
우산을 쓰다
글·사진 장광균 (brunch.co.kr/@character8)

구름은 이미 비를 머금고 있었다. 바로 쏟아진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하늘이었다. 하지만 난 우산을 챙기지 않고 현관을 나섰다. 손잡이에 엄마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우산마저 잃어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마 우산은 어제 잃어버린 자두 색 우산에 비해 훨씬 더 튼튼하며, 새것이기도 했다. 사실 우산뿐만이 아니었다. 지갑, 휴대폰, 키, 모자, 가방 등을 나는 자주 분실하고 다녔다. 심지어 어떤 날은 자전거를 길에 두고 온 적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돌아올 때는 깜박하고 버스를 타고 와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깜빡이가 되어 있었다.

깜빡이로 살면서, 나는 점점 나를 믿지 못했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복창’이었다. 몸에 지닐 물건을 혼잣말로 복창하면서 하나씩 챙기는 것이다. “지갑, 열쇠, 휴대폰.” 효과는 있었다. 적어도 세 개의 물건은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역시나 문제는 우산이었다. 챙기는 것보다 무사히 가져오는 것이 문제인 물건이었다. 더구나 손잡이 우산은 언제든 손에서 떠날 위험이 있는 불안감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우산은 비를 막아줄 도구가 아니라 그냥 짐이었다. 우산을 분실한 날은 우산 하나 챙기지 못하는 나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했다. 때문에 차라리 비에 젖는 것이 우산을 분실하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는 것보다는 덜 비참했다.

시립도서관 까지는 걸어서 15분이 걸렸고, 비가 그 정도를 참아주면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다행히 도서관 가는 길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건물들이 많았다. 비가 쏟아질 때, 옆에 카페나 편의점을 만난다면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며 비 오는 풍경을 즐길 수도 있었다. 집 밖으로 나와 몇 걸음을 옮겼을 때 콧등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집 밖으로 나오는 그 짧은 사이에 흐릿했던 구름은 먹구름으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비가 쏟아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제도 오늘 같은 먹구름이 잔뜩 겁만 주다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덕에 챙겨간 우산만 잃어버린 날이기도 했다. 그래도 급할 때를 대비해서 우산 대용으로 옆구리에 메고 있던 가방을 머리 위로 올려보았다. 다행히 머리는 가릴 수 있는 면적이었고 무게도 적당히 가벼웠다. 그런데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다. 아차 싶어 가방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도서관에 반납할 책이 보이지 않았다. 또 깜박한 것이다.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뒤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한숨을 쉬며 조용히 책 제목을 복창했다. 

책은 신발장 옆에 있었다. 우산을 생각하다가 두고 나온 것이었다. 책을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손으로 콧등을 닦으며 거울을 봤다. 앞머리도 살짝 젖어있었다. 하늘은 그 사이 더 어둡게 변해 있었다. 어제 아껴둔 비까지 한꺼번에 쏟아낼 듯한 표정이었다. 또 다시 우산에 대해 고민했다. 침을 삼켰다. 책만 반납하고 오면 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우산 손잡이를 놓지 않을 거라 다짐도 했다. 주문을 외우듯 우산을 세 번 복창하며, 엄마 이름이 적힌 손잡이 우산을 잡았다. 도서관을 향해 10분 정도를 걷는 동안 비는 쏟아지지 않았다. “쳇! 이럴 줄 알았어.”라는 푸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굵은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도서관을 불과 80미터 정도를 남겨둔 지점이었다. 나는 엄마 이름이 새겨진 우산을 펼쳐 들었다. 우산을 가지고 온 보람이 있었다. 장대비를 막아주는 손잡이 우산 창에서, 엄마의 스웨터 냄새가 났다. 어느새 우산 밖 풍경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로 가득 차있었다. 우산을 펼쳐 든 사람들, 건물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는 사람들, 어디론가 뛰어가는 고양이까지, 모두가 껍질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달팽이처럼 차분하게 자기만의 피신처로 숨어들어갔다.

하지만 끝내 피신처에 숨어들지 못한 달팽이가 내 시선 안에 들어왔다. 환자복을 입은 할머니였다. 껍질을 잃어버린 달팽이처럼 할머니는 굵은 장대비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겨우 옆구리에 걸쳐진 목발만이 할머니를 위태롭게 세워놓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달려가서 달팽이 할머니에게 껍질을 만들어 드렸다. “할머니 어디까지 가세요?”, “병원!”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병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사고로 입원 중인데, 외출했다가 병원으로 다시 들어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왜 혼자 다니세요?” 하지만 할머니는 입술을 몇 번 다실뿐 대답하지 못하셨다. 생각해보니 그 질문은 내가 들었던 불편한 폭언들 중 하나 같았다. 다시 공손한 제안으로, 아무렇게나 토해낸 앞선 내 질문을 덮고 싶었다. “저랑 병원 같이 찾아봐요. 제가 병원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껍질을 둘러쓴 할머니의 표정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두리번거리며 주변 병원을 찾았다. 도서관 앞 사거리 주변은 병원뿐만 아니라, 약국들로 즐비한 골목이었다. 아침마다 침과 뜸을 하며 물리치료를 한다는 할머니 말에 의지해 한방병원을 우선 찾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개원한지 얼마 안 된 한방병원을 찾아냈다. 나는 할머니에게 멀찍이 보이는 병원간판을 가리키며, 귀에 대고 병원 이름을 말했다. “바른 한방병원! 맞아요, 할머니?” 할머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 밤에도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하셨다. 병원까지 가는 동안 할머니는 마음 속에 가득 차있는 그날의 사고에 대해 쏟아 내셨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의 껍질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나만 살아남았어! 영감이, 영감만. 뭔 염병하고 이 꼴로 나만 살아남아서.” 나는 껍질이 벗겨진 할머니의 어깨를 꼭 안아드렸다. 거기서 엄마가 입었던 스웨터 냄새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내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할머니와 헤어지기 전까지 나는 머릿속으로 할머니께 해드릴 위로의 말을 생각했다. 하지만 적당한 말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또 다시 내 입은 방정맞은 말을 던지고 말았다. “할머니 힘내세요. 우산은 필요할 때 둘러보면 꼭 있더라고요.” 도서관에 도착해 책을 반납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다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옴을 알리는 듯 한 따가운 햇살이었다. 손에는 가져간 엄마 우산대신 새로 빌린 책들만 들려져 있었다. 엄마가 내게 남기고자 한 것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우산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나는 알고 있었다. 오히려 엄마의 우산에서 벗어나 스스로 새로운 우산이 되어가길 원했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엄마 이름이 새겨진 우산을 지키는 데만 머물러 있다.
우산을 짐으로만 여겼던 이유도 혼자 쓸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껍질을 잃은 달팽이 할머니를 만나서 깨달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비를 막아줄 우산을 새로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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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