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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내가 오늘의 나를 그리워한다
이건 퇴사하고 발리에서 서핑하는 이야기다. 시작부터 꼬여버린 여행이지만(《AROUND》 86호 참고) 어쨌든 발리에 도착했다. 서핑왕을 향한 위대한 여정이 시작됐다.
욕인지 칭찬인지 헷갈리는 말이 있다. 이를테면 ‘무식하면 용감하다.’ 같은 표현. 무지와 용기가 어떤 시너지를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발리의 바다 안에서 나는 그 두 단어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러니까 가진 능력에 비해 한없이 오만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나다.
“서핑 해본 적 있어요?” 발리에 도착한 첫날, 캠프 숙소를 소개하며 사장님이 물었다. 나는 괜스레 코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아뇨, 처음이에요. 하지만 어쩐지… (잠깐 쉬고) 서핑왕이 될 것 같은 강한 확신이 드네요.” 사장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 비슷한 걸 쉬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남자 화장실은 1층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내일은 새벽에 출발할 거예요.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세요.”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숙소를 떠났다. 그는 꽤나 자기 업무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다음 날 새벽이 밝았다. 전날까지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둘 마당으로 모였다. 까맣게 그을린 열 명의 서퍼들은 하나같이 헐렁한 쪼리와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아침 인사를 건넬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하품을 하며 승합차에 올라탔다. 멀리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마주하며 얼마를 달렸을까, 열 명의 검은 얼굴과 미래의 서핑왕을 태운 차는 발리 남쪽 바다의 어느 선착장에 도착했다. 사장님은 오늘 갈 곳이 ‘리프Reef(산호와 바위가 숨어 있는 바다)’라며, 파도가 들어오는 포인트까지 보트를 타고 이동할 거라고 했다. 그 말은 곧 발도 닿지 않는 깊고 시커먼 바다 위에서 2미터짜리 보드에 매달려 목숨을 의지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발이 닿지 않는 바다’라는 표현 속에서 난파된 배의 생존자들을 떠올렸고, 구조를 기다리다 의식을 잃는 사람이 바로 나일 거라는 불길한 상상을 했다.
“바다 수영은 할 줄 아시죠?” 사장님이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렇다고 답해버렸다. 동네 수영 센터에서 몇 년째 초급반에 머무는 실력이었지만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허풍을 떨었던 거다. 사실 따로 구명조끼를 대여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무도 그런 멍청한 질문은 하지 않는 눈치였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보트에 올라탔다. 바다로 몸을 던지며 마침내 서핑왕을 향한 대망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서핑은 우당탕탕, 뒤죽박죽,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슬랩스틱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오랜 꿈이 있었는데, 파도를 타는 두 시간 동안 평생의 소원을 이뤘다. 유튜브에서 보던 위대한 서퍼들처럼 고래만 한 파도 동굴을 통과한다거나 보드 위에서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꿀벌처럼 춤을 추는 듯한 기술은 시도조차 못 했다. 초보자용 스펀지 보드 위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넘어지고 통돌이 세탁기에 갇힌 빨래처럼 둥글게 둥글게 바닷속으로 휩쓸린 게 전부였다. 인간의 팔다리가 그렇게 유연하게 꺾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의 담당 인스트럭터Instructor(좋은 파도를 찾아 보드를 밀어주는 서핑 선생님) 뿌뚜는 자꾸만 바닷물을 마시며 헛구역질하는 내게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웰컴 드링크! 웰컴 투 발리!”
캠프의 하루 일정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동이 틀 무렵 승합차에 실려 가장 좋은 파도를 찾아 서핑을 즐긴다. 서핑을 마친 뒤에는 해변 가판대에서 불량한 맛이 나는 음료와 군옥수수로 허기를 채운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승합차를 타고 코를 골며 잠든다. 숙소에 도착해 영상을 보며 그날의 서핑을 리뷰한다. 캠프에 오래 머문 사람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운 듯했다. 젖은 몸을 말릴 틈도 없이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녹화된 영상을 시청했다. 리뷰를 맡은 서핑 선생님은 우리 중 가장 까만 피부를 자랑했는데, 어쩌면 서핑의 숙련도란 피부의 그을림과 비례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머리를 하얗게 탈색한 탓에 영상 속 나는 일본 학원 폭력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불량스럽기 짝이 없었다. 요란한 외모에 비해 내 몸개그는 아주 처참했다. ‘저거 죽은 거 아니야?’ 의심할 정도로 심하게 날아올라 철퍼덕, 바다로 떨어지는 장면이 여러 번 반복됐다. 선생님은 내가 바다로 추락할 때마다 동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고난도 기술을 전수받은 경험자들과 달리 나의 피드백은 단순했다. 그저 보드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연습하라는 것.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주문이었다. 학창 시절 체육 실기에서 늘 S급 평가를 받았는데, 그런 내게 그저 ‘미끄러지지 않는 연습’ 따위를 주문하다니···.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나는 미끄러지지 않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쩌다 간신히 보드에 설 수 있게 돼도 그건 서핑이라기보단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캠프에 도착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숙소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마트에서 각자 먹을 맥주와 음식을 샀다. 우리는 서로의 나이와 직업, 출신을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오늘의 서핑 이야기만 했다. 모두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 파도를 탔다고 했다. 평일에는 일을 하고 주말이면 동해안으로 가 하루 종일 보드 위에서만 보낸다고. 한국의 파도는 ‘장판(파도가 낮고 잔잔해서 서핑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인 반면 발리는 언제 와도 ‘꿀파도’라며 진심으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파도 보는 법, 보드 고르는 법, 넘어질 때 더 폼 나는 자세 취하는 법, 한국에 돌아가서 함께 서핑 하자는 약속들. 모두가 신나서 떠드는 동안 나는 점점 말을 잃어갔다. 이곳에서는 실력이 곧 권력이다. 서핑 고수가 떠드는 동안 보드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나 같은 애송이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저 서핑, 서핑, 서핑. 당신들은 모두 서핑에 미친놈들 같아요. 일명 ‘서.친.놈’.” 괜히 심술이 나서 급발진을 해버렸다. 그러자 가장 서핑을 잘하는 동생 S가 내 어깨를 감쌌다. “형,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힘을 좀 빼면 형도 언젠간···.” 그는 ‘언젠간’이라는 말을 하며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처음 서핑을 발명한 사람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는 물 위를 걷는 멍청한 스포츠를 개발하면서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 믿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서핑은 개떡 같은 운동이다.
“형, 선셋 서핑 같이 할래요?” 다음 날, 아침 서핑을 끝내고 언제나처럼 시무룩해 있는 내게 S가 물었다. 해 질 무렵 바다로 가 서핑을 하면 기분전환이 될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 ‘절망감은 하루 한 번으로 충분한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함께 하자고 대답했다. 질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저녁 무렵 발리의 바다에는 해수욕을 하는 사람보다 서퍼가 더 많았다. 우리는 보드 위에 나란히 누워 파도가 오기를 기다렸다. 인스트럭터 없이 혼자 타는 서핑이라 파도를 자주 놓쳤다. 몸이 무거워 아침보다 심한 몸개그가 속출했다. 반면 S는 좋은 파도든 나쁜 파도든, 바다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멀리까지 춤을 추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는 아주 환한 얼굴로 “형, 힘들어 죽겠어요!” 하고 말했다. 석양이 빨갛게 S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렇게 힘들면 죽지 그래?” 내가 대답했다. “그럴까요?” S는 붉게 물든 바다 위에 죽은 듯 표류하더니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기지 않아요.”, “뭐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매일 밤 파도만 이야기하던 이 서친놈 시절이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석양에 취한 S는 잔뜩 감상적인 말을 늘어놓더니 민망한 듯 크게 웃었다. S는 왜 저리도 순수한 걸까? 그는 고작 바다에 떠 있는 이 작은 순간에 행복을 느낀다. 나는 그가 한국에서 얼마나 치열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을지 감히 짐작해보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누리는 이 백지 같은 기쁨이 사실은 아주 단순한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부끄러워 한다.
발리 생활 10일 차, 별것 아니지만 내게도 일상에 루틴이 생겼다. 아침 일찍 졸린 눈을 비비며 우당탕탕 서핑을 하고, 군옥수수를 먹고, 숙소로 돌아와 절망의 리뷰를 하고, 손빨래를 하고, 수영을 하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매일 새로운 해변을 걷다가 아무 곳에나 누워 태닝을 하고, 선셋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저녁으로 신선한 과일을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고, 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 나는 오늘 얼마나 서핑왕에 가까워졌는가? 그런 질문은 이제 하지 않는다. 그저 미래의 내가 부러워할 만한 오늘을 사는 중이라며, S의 하루처럼 내게도 순수한 기쁨들이 찾아오기를 열망할 뿐이다.
글·사진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