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적어 보내는 일에 관하여

납작해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글쓰기

롤모델은 비욘세. 마음의 말은 돌려 말하기보다 직구로 던지고 싶고, 서른 다섯 살까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포르쉐를 사고 싶은 사람. 일하는 여성으로서 필요한 것들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싶으며, 혼자에게만 편안한 세상은 없으니 같이 목소리를 내어야 변화가 생긴다고 믿는 외국계 IT 기업의 마케터이자 서른 두 살의 여성 – 꽤 멋진 커리어우먼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이 사람은 사실 – 쭈글이다.

일이 마음같이 풀리지 않을 때는 화장실에서 잘 울고, 스포츠카 운전을 꿈꾸지만 아직 평행 주차는 자신이 없으며, 뭔가 잘못된 일을 목도했을 때 바로잡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도 괜찮을까, 마음 속으로 여러 번 고민하는 왕쭈글이. 그녀의 마음이 누구보다 쉽게 쭈그러지고 자주 납작해진다는 것을 나는 안다. 바로 내 이야기니까.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 싶은 욕심과는 달리 밑천은 초라했던 신입사원의 쭈글이 시절, 회사 점심시간에 차이고 한껏 구부려진 어깨로 돌아와 분노와 슬픔의 이메일을 적던 찌질한 시간, 누군가의 폭언과 부당한 요구에 맞서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삭히다 결국 몸져누웠던 기간까지. 상황과 이유가 어떻든, 누구에게나 작아지고 납작해지는 오후가 있다. 깊은 구멍 속으로 숨고 싶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의자를 깊숙이 눌러앉는 방법밖에 없는 오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오후가 찾아오면, 나는 메일함에 들어가 새로운 창을 하나 띄운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얼굴들을 떠올린다. 가족보다 가깝게 지냈지만,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 나의 장점을 찾아주신 중학교 국어 선생님부터, 부쩍 어두워진 얼굴이 신경 쓰였지만 안부를 묻지 못했던 동료. 또 생각의 결이 비슷하여 친해지고 싶었지만, 계기가 생기지 않아 아쉬웠던 지인들까지. 많은 얼굴 중 선명해지는 사람의 이름을 ‘받는 이’에 적어놓고 두서없이 현재 나의 마음을 적어 나간다.

가볍게 안부를 묻고, 나의 근황과 일어났던 일들을 통해  느꼈던 점들을 적다 보면 신기하게도 나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이슈들의 원인과 결과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막연한 문제가 구체적인 질감으로 태어나면, 그때부터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지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패했다는 좌절감이나 막연한 걱정으로 일렁였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는 아주 쉽게 건네는 조언처럼, 문제의 해결책들을 수신인에게 당부의 말로 덧붙인다. 사실 그 조언은 나 스스로에게 주는 처방약이라는 사실은 비밀로 놔둔 채.

이메일 창에 마음을 적어놓고, 그 마음을 편지로 옮겨 담아 보낸다. 종이로 받는 마음이 가끔은 더 와닿으니까.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낼 카드, 1000원. 그리고 배송비 3500원. 서울 강남구 우체국

연차가 쌓일수록 우리는 얻어내야 할 것들을 영민하게 챙기고, 손해 보지 않는 것에는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방법을 배운다. 동시에 좋아하는 마음을 일상 속 행동을 통해 전달하는 것에는 게을러진다. 불현듯 얼굴들이 떠올라도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소중한 얼굴들을 쉽게 잊어버리곤 하니까. 그래서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글로 적어내고, 그 마음을 전달하는 일은 중요하다.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상상할 때 그것이 현실화가 되므로.  

무엇보다도 이렇게 마음을 적어 보낼 때, 납작하게 찌그러졌던 나의 마음이 조금씩 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먼 미래에도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적인 내 모습과 나의 동료들의 멋진 미래를 더욱 즐겁게 상상할 수 있다.

글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글을 적어내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읽는 사람도 믿게 되니까. 그래서 한껏 움츠러든 오후에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음을 적는다. 수신인 혹은 발신인, 누구든지 그 순간 납작했던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글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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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의 영수증

Youtube의 마케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고백이지만 노는 것만큼이나 일을 좋아합니다. 그만큼 생활의 밸런스를 중요하게 생각해, 오후 네 시가 되면 남은 하루를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저의 영수증이 하루의 리듬을 바꾸고 싶은 직장인에게 작은 가이드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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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보경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