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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없다. 다만 너무 이상한 인간만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본다.
최근 들어 흰머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나는 원래 새치가 없었기 때문에 나이란 놀랍구나, 하고 새삼 느낀다. 더불어 사진에 찍힌 내 얼굴과 몸집을 보고는 또 한 번 놀란다. 이 후덕한 아주머니가 나라니. 주말 아침엔 벼르던 새 안경을 맞추러 안경점에 갔다. 운전하거나 영화 볼 때만 쓸 안경인데 친절한 점원은 시력 검사 후 조심스럽게, 그러나 마치 가벼운 농담이라도 건네듯 ‘노안’ 검사를 해보겠냐고 물었다. 나의 차트에는 ‘중년 시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본 내 마음은 인형뽑기 기계 앞에서 거의 다 끌어올린 인형을 떨어트린 사람처럼 허탈해졌다. 나의 정신은 여전히 30대의 중반 즈음에 머물러 있는데 몸은 50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부조화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아,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나이 들고 있다는 증거겠지.
이제는 좀 어른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어른이 뭔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흰머리와 군살과 노안이 인격의 성숙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냥 누군가에게 뒤통수라도 철썩 얻어맞고 싶을 때 나는 이 책을 꺼내 다시 읽는다. 우치다 타츠루의 《곤란한 성숙》. ‘미성숙한 사회에서 성숙한 어른 되기’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성숙이라는 것이 곤란한 이유가, 어제까지 유용하던 장치로는 검사할 수도 없고 계량할 수도 없는 것을 몸으로 익힌 형태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어제까지 유용하던 장치로는 검사할 수도 없고 계량할 수도 없는 것을 몸으로 익힌 형태라니, 이게 무슨 말이지? 나의 정신적 스승, 우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치다 선생님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오늘부터 어른이 되어야지!”라고 다짐한 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그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상황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후의 응답에 가까운 일이라고 쓴다. 지금껏 겪어본 적도 없고 감당하기도 힘든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낸 후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른이 된다는 건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인 일이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먼저 있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응답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된다. 도무지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도 그것을 제대로 겪어낼 때 우리는 어른이 된다. 반대로 같은 상황에서 달아나거나 눈 감아 버릴 때 우리는 어른이 될 귀한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럼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꼭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어야만 하는 걸까? 좀 더 쉬운 방법은 없을까? 어른으로서의 매일매일은 어떤 걸까?
우치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고마운 선물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 그것이 어른으로서 매일을 살아가는 태도다. 이어서 우치다 선생님은 진정한 어른의 이미지를 오래된 미꾸라지 요리 식당에서 본 한 신사를 통해 그리면서, 그 신사가 주위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썼다.
작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사소한 것들에게 감사의 말을 던지는 것. 그렇구나. 그게 어른인 거구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세계에는 하나도 거저 주어진 것이 없다. 그리하여 사소한 것들마저 놓치지 않고 제대로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이 세계에서는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선 가장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와중에 하늘은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아름답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상처를 준다. 그런데 오늘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너무나 훌륭하다. 아무리 간절하게 바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흘린 물건을 낯선 이가 기꺼이 허리를 굽혀 주워 건네준다. 세상은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이다. 슬퍼하지 않을 도리가, 감사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가 《곤란한 성숙》을 여러 번 다시 읽는 이유는 사실 어른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어른이 되고 싶다니, 그런 대단한 야심은 품어본 적이 없다. 어른 같은 거, 누가 되고 싶겠는가? 가능하다면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러나 어른은 되지 못하더라도 이상한 인간이 되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 나잇값도 못 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닥쳐오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 앞에서 최대한 정신을 차려보고 싶다. 그럴 때 이 책은 나에게 여름날 들이켜는 시원한 보리차 한 잔 같은 것이 되어준다.
영화 〈굿 윌 헌팅〉의 청년 윌 헌팅은 가난한 고아다. 어린 시절 세 번이나 입양되었으나 파양당한 그는 양부모들에게 받은 학대의 상처를 마음 깊이 품고 있다. 희망도 꿈도 없이 청소부나 잡역부 같은 일자리를 전전하는 윌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시고 헛소리를 떠들고 주먹다짐을 하며 매일을 흘려보낸다. 그런 윌에게는 남다른 재능, 바로 천재적인 두뇌가 있다.
윌은 어떤 책을 읽든 그 내용을 사진처럼 기억하고, 그가 청소부로 일하는 MIT의 어떤 학생도 풀지 못한 수학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린다. 그리고 윌의 천재성을 발견한 수학 교수 램보는 폭행죄로 감옥에 갇힌 윌을 빼주는 대가로, 자신과 함께 수학 문제를 풀고 일주일에 한 번씩 정신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그러나 윌의 비뚤어진 마음은 상담 같은 걸 견디지 못한다. 몇 명의 치료사가 두 손 들고 떠난 후, 램보는 어쩔 수 없이 윌을 대학 시절의 룸메이트인 심리치료사 숀에게 데리고 간다. 램보처럼 성공한 학자가 되지 못한 숀은 커뮤니티 컬리지(지역 사회 기반의 2년제 교육 기관)에서 무기력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전 평생의 짝이던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숀이 상처로 겹겹이 방어막을 두른 윌을 상담하기로 한 것이다. 전처럼 상대를 조롱하고 상처 주며 자신을 지키려 하던 윌은,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최대치로 끌어내기 위해 몰아붙이는 램보에 대항해 그의 마음을 지켜주려 애쓰는 숀의 진심을 알게 된다. 이제 윌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며 숀과 대화하려 한다.
윌은 사랑을 믿지 못한다. 사랑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관계를 맺기보다 자신을 지키는 데 급급하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윌은 자신의 재능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려는 여자친구 스카일라에게도 상처를 주고 만다. 받은 상처만큼 타인에게 상처를 돌려주는 이유는 그들이 또 자신을 아프게 할 거라, 자신을 버릴 거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떠나는 것이 덜 상처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딱딱하게, 뾰족하게 굳은 윌의 마음을 숀은 이런 말로 풀어준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제야 윌은 숀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트리고 만다.
상처 입은 사람을 지나치지 않는, 자신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윌에게 사랑을 베푸는 숀의 행동은 우치다 선생님이 말한 타인의 요청에 응답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건네는 선물이었을 것이다. 나의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한 패스였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른의 일일 것이다.
우치다 선생님은 크리스마스 선물이야말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 패스라고 했다. 부모에게 받은 선물에 자식이 보답할 상대는 부모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다. 그렇게 이 증여의 행위는 대를 이어 지속된다. 이 행위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패스를 받으면 반드시 다음 플레이어에게 패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때도 크리스마스 아침이면 부모님이 현관 앞에 놓아둔 선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어차피 부모님이 주는 선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순진한 동생은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산타 할아버지를 믿었다. 그 애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나 현관 앞으로 달려가서 선물을 확인하고는 잔뜩 흥분해 폴짝폴짝 뛰며 소리쳤다. “누나, 왔다! 왔어! 산타 할아버지 왔어!” 우리 모두는 그 애 몰래 키득거렸다.
그랬던 내 동생이 얼마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무뚝뚝한 누나와 달리 다정하고 살가웠던 내 동생,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 했던 깔끔한 내 동생, 늘 웃는 얼굴이라 직장에서 ‘미스터 스마일’이라 불렸다는 내 동생, 그 애를 잃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동생을 잃은 후 머릿속에 가장 많이 떠오른 문장은 이것이었다. ‘이런 일을 겪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도 사람들은 계속 살아간다. 때로는 그 상실의 상처에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다. 그때 문득 우치다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어른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이런 아픔을 겪고 견디는 것도 어른이 되어가는 일의 하나겠지. 씁쓸하다.
그러나 내 아이들은 중년의 엄마가 중년의 외삼촌을 잃은 이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그 애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나의 상실과 슬픔은 내 아이들의 참조점이 될 것이다. 그 애들은 그 시절 어른들이 아픔을 견디던 모습을 떠올리며 계속 살아갈 용기를 낼 것이다. 나는 그런 형태로나마 내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건넬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나날들은 동생이 주었던 선물 같은 순간들을 차분히 복기하며 보내려 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마음 아파하면서도, 슬퍼하면서도 씩씩하게 살아가 보려 한다. 동생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 동생을 잃고, 나는 조금, 아주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그렇게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누나가 되어보려 한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점선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