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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공동묘지’에 있다
어쩌면 나는 그때 사라지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고 사라졌다고 믿었을 때 이곳 체코 프라하 비셰흐라드Vysherad에 놓여있었다. 프라하에서 2주를 머물렀다. 2주 동안 숙소에 머물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만 한 배낭을 멘 채 떠나갔고 나는 숙소 주인이라도 된 양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숙소 주인은 오늘은 이곳에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투박한 말솜씨로 비셰흐라드에 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프라하 중앙역에서 지하철을 20분만 타면 된다고 말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비쉐흐라’, ‘비쉣라’ 같은 말이 들리면 내리라고 덧붙였다. 프라하의 동네 사람들이 주말에 산책하고 기도를 하러 가는 곳, 그곳에 관광객 차림의 내가 성 입구에서 뱅쇼를 마셨다.
성 입구를 통과해 커다란 공원을 지나면 작은 성당이 나온다. 성당 옆, 마당처럼 놓인 공동묘지에서 그날 하루를 보냈다. 의미는 모르지만 아주 천천히 묘비 문구들을 읽어보았고 묘비 위에 놓인 꽃을 어루만졌다. 묘지는 아름다웠다. 우리가 생각하는 묘지라는 단어에서 오는 보편적인 섬뜩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묘비 위에 놓인 꽃이나 빽빽이 놓인 묘비 사이에 가득 쌓인 낙엽은 어쩌면 낙엽이 떨어지고 꽃이 시드는 것처럼 그들의 죽음을 당연하게 만들어버렸다. 금 간 묘비 바로 옆에 놓인 장미꽃 줄기는 묘비에 간 금보다 더 가냘프게 보였다. 십자가 끝에 놓인 빨간 꽃은 절대로 시들지 않을 것만 같았고 오히려 더 당당하고 싱싱하게 붉은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보았을 때 그제야 나는 이곳이 묘지라고 해서 죽음과 슬픔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린 꼬마는 묘비 사이로 킥보드를 타고 지나갔고 노년의 커플은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어쩌면 그들의 죽음을 축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숙소 주인에게 물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은 그곳은 작곡가 드보르자크 그리고 프라하에서 이름을 떨친 수많은 예술가들이 묻혀있는 곳이었다. 가장 화려한 묘비가 드보르자크의 묘비였다. 동네 사람들은 산책 겸 이곳에 들렀다가 좋아하는 예술가 또는 조상을 추모하고 작은 기도를 들어달라고 고백했다. 이제껏 우리가 생각해온 추모나 고백, 죽음은 아주 어둡고 때로는 닭살이 돋고 자신만의 구덩이를 파 그곳에서 슬피 울고, 눈물로 고립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었나.
그때 나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 미래에 대한 질문은 받고 싶지 않았고, 어쩌면 정말로 사라지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라지는 꿈을 꾼다. 내가 사라지면 이 세상은 괜찮을까. 사라지는 나는 괜찮을까. 내가 사라지고 나서 남은 사람들은 괜찮을까. 당장에 내가 사라지고 나면 사랑하는 내 애인은 어떡하지. 사랑하는 내 아이들은, 사랑하는 내 친구들은, 내 부모님은. 아마 그런 고민을 가장 많이 할 것이다. 사실 그런 생각에는 아주 큰 모순이 담겨있다. 죽음에 바로 직결되는 게 묘비 위에 놓여있는 꽃처럼 붉은 사랑이라니. 비셰흐라드는 그런 곳이었다. 죽음과 사랑이 공존할 수 있음을 알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이유는, 동네 사람들의 쉼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예술을 통해 자신들의 생을 누구보다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은 아니었나 싶다. 헛된 죽음도 없지만 헛된 사랑도 없다고, 비셰흐라드의 묘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프라하에서 보낸 2주는 남들이 보기에 아주 긴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갓 20년을 살아온 나에게는 그토록 짧은 순간이 없었다. 프라하의 어디로 가면 사진이 잘 찍히고 어떤 맛집이 있는지 그런 건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이 골목에서는 달콤한 빵 냄새가 나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바에서 흘러나오는 연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비셰흐라드에 가서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의 생에 얼마나 생경한 사람인지를. 사라져버리는 것보다는 사랑을 택하자고, 이 작은 공동묘지에서 작게 읊조렸다. 적어도 내게 비셰흐라드는 그런 곳이었다.
비셰흐라드
Vysehrad
비셰흐라드는 프라하의 발상지로 ‘높은 곳에 있는 성’이라는 뜻에 걸맞게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높게 세운 장벽과 11세기에 건축한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의 분위기가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성당 옆에 자리한 공동묘지에는 세계적인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를 비롯해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등 체코를 빛낸 예술가들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해가 좋고 비석이 화려해 공동묘지라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글 사진 이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