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의 시선을 좇아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시선을 좇아서

경주의 장면들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말하고 나면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군가의 말을 빌려 순간을 연장하려 애쓴다. 말하면 흩어져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을 오래 좋아한 사람. 경주에서 내가 자주 생각한 사람은 1916년부터 1940년까지 수차례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이다. 그는 제대로 발견되지 않던 조선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썼다. 그가 적어내린 미美에 관한 기록을 곁에 두고 경주를 걸었다. 그의 시선을 좇으며 발견한 도시의 장면들은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나타났고, 잡힐 듯 보이다가도 멀리서 반짝였다.

안으로 가라앉으려는 마음

같은 흰빛이라고 해도 저 싸늘하고 날카로운 순백의 명나라 자기와 얼마나 다른가. 그것은 언제나 연한 물빛을 하고 있든지 혹은 분백에 싸여 있으며 또는 음울한 회백색을 띠고 있다. 거기에는 안으로 가라앉으려는 마음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과 예술》 중에서

야나기 무네요시Yanagi Muneyoshi는 일본의 미학자이자 민예(민중의 생활 예술)운동가다. 그를 설명하려면 우선 ‘조선 백자와의 만남’을 짚어야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4년, 약 13센티미터의 팔각 모양의 청화초화문각병靑華草花文角甁을 통해 조선 예술에 빠져들었다. 무명의 장인이 만든 기물에 매료된 그는 일제강점기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고, 서구 미학과는 다른 새로운 미학의 필요성을 깨달으며 민예론을 정립해나갔다. 그가 본 조선은 마을, 자연, 건축, 음악, 기물 등 거의 모든 것에서 선이 흐르고 있는 곳이었고, 조선인은 보라, 초록, 주홍, 금빛 등 화려한 색을 관심의 대상에서 끝내 제외하던 민족이었다. 그리고 그 선과 색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 도자기였다. 나는 그가 그토록 탐미하던 조선의 백자를 보고 싶었다. 경주의 우양미술관에서 내가 만난 백자는 사진가 구본창이 세계 각국의 백자를 찾아다니며 10년 여에 걸쳐 촬영한 것이다. 사진 속 백자들은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고 존재하는 공간에 있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배경과 사물의 경계 없이 편안하게 잠겨 있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공예문화》에서 조선의 도자기는 아름다움을 달성하려는 의식의 속박 없이 솔직하고 순조롭게 만들어졌기에 깊고 수수한 아름다움이 안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백자에 새겨진 시간의 흐름이 사진 속으로 깊게 가라앉는 모습 앞에서 우습게도 더 이상 백자를 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퍼하는 자는 신에게 산다

비애란 신의 마음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신은 위로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신의 마음은 슬퍼하는 자에게 이끌리는 것이다. 슬픔이 어찌하여 미를 낳는가. 또한 슬픔의 미가 어찌하여 그렇게도 사람을 매혹시키는가. 그것은 신이 생각하고 있는 슬픔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힘 있는 자는 자연에 산다. 그러나 슬퍼하는 자는 신에게 산다. 

–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과 예술》 중에서

진평왕에 대해 알고 있던 단 한 가지는 그가 54년이라는 시간을 왕으로 산 사람이라는 것이다. 경주 시내에서 주인을 알지 못하는 고분을 보다 왔으니 ‘왕’의 무덤으로 가는 길의 기분이 다른 건 당연했다. 왕의 무덤은 어떨까. 화려하고 거대하겠지, 얼마나 장대하고 위엄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진평왕릉을 향해 걸었다. 주변에는 듬성듬성 자리한 집과 논밭이 다였다. 볕이 길에 내려앉는 시간, 왕의 무덤은 나무에 가려져 처음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는 어떤 순서도 계산도 없이 서있었고 왕릉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다만 진평왕릉이라고 쓰인 작은 비석만 있을 뿐이었다. 진평왕릉은 온화하고 너른 품을 가졌다. 팔처럼 뻗은 능의 주변 길을 걷는데 멀리서 한 노인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아무도 없던 터라 혹시 내가 뭔가 잘못했나, 생각하는 찰나 노인은 능 앞에서 손을 모았다. 그는 고개를 연신 땅으로 떨구고 손을 비비며 무언가를 빌기 시작했고 나는 그 뒷모습을 두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기도가 끝나자 노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을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척박한 역사를 극복해야만 하는 조선의 예술을 비애의 미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것은 약한 자의 미가 아니라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으로서 가질 수 있는 미의 극치였다. 힘 있던 자는 소박한 자연에 살고, 슬퍼하는 자는 지상에 없는 신에게 산다. 다른 시간이지만 같은 곳에서 존재하는 두 사람을 보며 나도 마음속에 오래 담아둔 마음을 능 앞에 털어놓았다.

애정과 염려의 낚싯줄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 다르다.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자주 거론되는 동시에 그가 주장한 비애의 미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수동적인 태도를 강요한 것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가 조선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아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그러나 나는 야나기를 존경한다. 그 누가 야나기만큼 한국의 미술을 사랑해보았냐는 반문과 함께 야나기가 지녔던 사랑과 존경의 자세만은 어제도 오늘도 배우고 있다.’고 썼다. 광화문, 석굴암, 도자기와 목공예품 등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조선에 대한 깊은 애정이 남아있다.

2016년 7월 울산에서는 지진이 있었다. 그 여진은 경주까지 퍼졌고 몇 달 후 경주는 두 차례 큰 강진을 겪었다. 그 후 나는 〈‘낚싯줄’이 국립경주박물관 유물들을 지켜냈다(《한겨레》)는 기사를 보았다. 기사의 요는 울산 지진에서 불길함을 느낀 박물관 관장과 직원들이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유물 오백여 점에 대한 고정 작업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박물관의 유물들은 무사했고 그 후 칠천여 점에 대한 내진 보강도 마쳤다고 한다. 경주로 가는 길, 나는 무엇보다 그 낚싯줄이 보고 싶었다. 박물관에서 자세히 보니 거의 모든 크고 작은 유물들이 낚싯줄로 고정되어 있었다. 팽팽하게 묶인 유물은 전혀 흉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줄에는 애정과 염려가 담겨 있었고 마치 그것만이 과거와 지금을 단단히 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줄에도 야나기 무네요시가 보내던 따뜻한 시선과 닮은 마음이 있었다.

택시 기사와 노을을

자연에 대한 무심한 신뢰, 이것이야말로 말기의 예술 중에서 놀라운 이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거기에서 미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과 예술》 중에서

내가 좋아한 도시들은 모두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분지라는 것이다. 경주는 토함산, 구미산, 남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다. 그 능선 덕분에 경주에는 잠자는 개의 오르내리는 배처럼 다정한 풍경이 있다. 고분과 산의 능선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먼 생각에 잠기기 좋았다. 여행의 마지막 날, 성건동에서 신경주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해가 지는 시간이었다. 피곤해서 창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밖을 바라봤다. 경주의 택시 기사들은 늘 좋은 가이드였지만, 그날따라 물어볼 것도 대화할 힘도 남아있진 않았다. 도로에 차가 많아져 속도가 느려졌을 때 창밖에는 연두색 철제 울타리에 가려진 고분의 모습이 보였다. 택시 기사와 나는 같은 모습을 보고 있던 것 같다. “철조망이 참 안 예쁘죠. 그냥 내버려 두던가, 담을 좀 낮추면 될 텐데요.” 경주에서 여러 번 택시를 탔지만 아름다움을 논하는 택시 기사는 처음이었다. “석굴암에서 불국사까지 산길 따라 내려가면 30분밖에 안 걸린다.”, “이렇게 돌아보는 관광 코스가 제일 효율적이다.”라고 말하는 기사는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는 자연에 대한 무심한 신뢰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짧은 여행길, 경주에서 만난 마지막 사람이라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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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포토그래퍼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