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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아티스트 한예롤
아이의 세계를
함께 걷기
칠드런 아티스트 한예롤
CHILDREN ARTIST YELOL HAN
아이들이 순수하고 창의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건 개인적이고 사소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조카와의 대화라거나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들의 천진함처럼 순간적인 것들이라 잡아둘 수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도 참 애매하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그림이라면 어떨까? 아이들의 순수함이 그대로 종이 위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 그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아이의 세계를 발견하고, 종이 위로 끌어내는 한 여자를 만났다.
칠드런 아티스트
직접 만든 장르라고 들었어요. 간단히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아이들 그림에 손대지 않고 직접 그릴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해요. 끄집어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네요. 스토리텔링을 통해 아이가 생각하는 세계를 끌어내는 거죠. 예를 들면 토끼를 좋아하는 아이와는 토끼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나눠요. 토끼가 유치원엔 다녀왔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기 시작하면, 아이도 마음껏 말하기 시작하죠. 얘기하면서 그 아이의 세계에 함께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세계가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겨질 수 있게 하는 거죠.
아이들은 천방지축이잖아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예전에는 저도 영재미술, 아동미술을 가르쳤어요. 교육적인 부분을 강조하며 출발했죠. 내공을 쌓던 시간이었어요. 그때도 아이들 그림을 좋아했어요. 드로잉 하나에도 열광하고, 아이들 얘기만 들리고, 보였어요. 수업이 없는 날에도 동물원 같은 곳에서 만나 돗자리를 깔아놓고 함께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면서 이걸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또 아이들 세계에 상처를 내지 않은 채로 종이에 옮길 수 있을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수업이 얼마나 됐나요? 아이들과 함께하니 특별한 사건도 많았을 것 같아요.
수업을 막 시작했던 2008년에 만난 여섯 살 친구가 이제는 열세 살이 됐어요. 지호라는 아이예요. 계원예대에 미술 영재들을 가르치러 다닐 때, 일주일에 한 번 지호를 만났어요. 언젠가 상상동물을 그리는 수업을 준비해 갔는데, 저는 돼지에 날개를 단다거나 토끼 귀를 그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그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어요. 일단 거기서 한 번 놀랐죠. 그러다 지호 그림을 봤어요. 다른 아이들은 일단 뭘 알아볼 수 있게 그렸는데, 지호는 앞뒤도 형태도 없는 그림을 그린 거예요. 밑그림 작업도 없었어요. “이렇게 봐야 하나? 멍멍인가? 사자를 그렸어?” 묻는 제게, “아닌데….” 하는 거예요. “그럼 뒤집어서 봐야 하나?” 지호는 역시 아니라고 했어요.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어요. 잠시 후 지호가 그림에 대해 얘기해줬어요. “봄에 나비가 날아갈 때 나는 냄새를 그린 건데….” 그림을 보면서 지호 말을 들었는데, 정말 놀라웠어요. 순간이었지만, 봄의 어지러움과 내음이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눈물이 핑 돌았어요.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뛰어난 예술작품을 보았을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각종 정신적 충동)을 느낀 거죠. 피카소나 모네의 그림이 아니고, 6살 아이의 그림이라니…. 저는 절대 그렇게 그리지 못할 거예요. 지호 그림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 봄의 나른함 같은 게 담겨 있었어요. 냄새를 그린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에요.
이지호 6살 때 그림Ji ho Lee
다른 아이들은 주로 어떤 그림을 그리나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 있잖아요. 이를테면 ‘닌자고’나 ‘또봇’ 같은 캐릭터들에 관해서 얘기를 나눠요. 아이들이 완전히 푹 빠져 있거든요. 함께 그 세계로 들어가서 노는 거예요. 그런 아이와는 명화 오마주 작업을 해도 반드시 그 세계가 표현돼요. ‘별이 빛나는 밤’ 안에서도 닌자고가 전쟁을 하고 있고, 겨울왕국 사운드 트랙 ‘렛잇고’가 표현되기도 해요. 저는 그걸 존중해 줘요. 아이들은 자신만 그릴 수 있는, 내년에는 그리지 못하고 오늘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홈페이지를 보니 굉장히 다양한 작업이 소개돼 있던데, 어떤 수업이 있나요?
‘명화 오마주’ 작업을 주로 하고 있고요. 자화상을 그리는 ‘페이스 투 페이스face to face’, 버려진 박스에 상상동물을 그려서 서로 맞춰보는 수업도 있어요. 바닷가에서 주워온 오브제들을 조합해 보고, 따라 그리기도 하는 수업 ‘타피프로젝트’도 있고요. 갑자기 엉뚱한 물건을 따라 그리라고 하면 다들 겁을 내요. 못 그리겠다는 말부터 하죠. 그런데 가지고 놀던 걸 그려보자고 하면 다 하더라고요. 타피프로젝트는 여러가지 면에서 아이들 창의와 표현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진 수업이에요.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는 것, 매일 하는 일, 다짐 등이 있는지 궁금해요.
계속 탐구를 하고 있어요. 물감, 크레파스만 재료가 아니라 자연의 많은 것들이 미술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올리브유에 가루로 만든 파스텔을 섞어서 써보기도 하고 낙엽을 빻아서 물감에 개어주기도 하고. 생크림을 짜놓고 포크로 그린 적도 있어요. 여러 가지 시도가 중요하죠.
아이들이 직접 찾아 나서기도 하나요?
보통 재료 제안은 제가 해주지만, 어느 정도 경험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원하는 걸 말하기도 해요.
수업의 아이디어는 보통 어디에서 얻나요?
타피프로젝트Topped project는 아버지와 어렸을 때부터 하던 놀이였어요. 페이스 투 페이스는 아이들이 인물을 모두 똑같이 그린다고 걱정하는 부모님들의 얘기를 듣고서 만들어 본 수업이에요. 연구를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하면 아이들 그림에 손대지 않고, 개성 있는 자화상을 그리게 할까?’ 제가 찾은 답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대화를 통한 스토리 텔링이었고, 또 하나는 ‘이미지를 읽어주는 것’이에요.
이미지를 읽어 준다는 건 무얼 말하나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대상을 관찰하는 방법이에요. 코끼리를 그려야 한다면 코끼리 사진을 일단 찾아요. 아이와 함께 사진을 보면서, “코가 이렇게 길구나. 주름이 엄청 많네? 코만 보면 할아버지 같아.” 또, “머리가 정말 크네? 다리는 왜 이렇게 두껍지? 다리가 몇 개나 있어? 귀는 부채 같은데, 흔들흔들할 수도 있을까?” 그렇게 대상을 읽어보는 거예요. 아이는 대답도 하고 고개도 끄덕이면서 결국 코끼리를 그리게 돼요. 저는 아이의 그림에 손대지 않죠.
모든 아이들에게 각자의 개성이 있겠지만, 수업 중에 찾은 공통점도 있을 것 같아요.
아이들은 순발력이 좋아요. 생각이 디테일하고요. 그리고 꾸며 말하기를 정말 잘해요. 어떻게 보면 거짓말인데, 그건 사실 스토리 텔링의 시작이기도 하거든요. 유치원을 안 다닌다고 말하는 애들도 있어요(웃음).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조금 늦은 질문이지만, 왜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나요?
그저 아이들 그림이 좋아서 시작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작업해 본 적은 없지만, 왠지 비슷한 느낌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어른들은 뭔가 목표를 가지거나, 잘 그려 보자는 의지를 갖잖아요. 그것도 좋긴 하지만, 저는 아이들의 무의식이 더 좋았어요. 더 재미있었고. 아이들은 ‘순수’를 미술재료로 쓸 수 있는 유일한 화가예요.
지금은 어떤 아이들과 작업하고 있나요?
간혹 미술 영재들만 가르치는 건 아니냐는 말을 듣곤 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여러 성향의 아이들이 있어요. 쌍둥이도 있고, 밝지 않은 아이들도 있죠. 자신의 그림에 너무 빨리 실망한다거나 아예 그리지 않는 아이들도 있고요. 난관이긴 하지만, ‘이 아이들의 세계를 종이 위에 끌어낼 수 있으면 된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뭔가요?
소통이요. 아이들 그림을 보고 맞았는지 틀렸는지 말하는 순간 소통은 끝이라고 생각해요. 어디에서 온 건지, 왜 그리게 됐는지 물으면서 그 아이에게 다가가야 해요. 그리고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죠. 이제 세모를 그리게 돼서 기뻐하는 아이에게 네모는 왜 그리지 못하냐고 재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고민되는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아이들 관계에서는 없어요. 그리고 아이들 그림에서도 없어요. 다만 앞서 말했듯, 이 작업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고민이 돼요. 저는 칠드런 아트에 관해 소개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나름의 사명감이 있어요. 화집이나 책으로 정리하거나 전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칠드런 아트를 통해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나요?
많은 걸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무얼 주고 있는지 자세히 생각해 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물어봐야겠네요(웃음). 그런데 ‘칠드런 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유는 있죠. 한 번은 해 질 녘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작업실에 걸어 놓고 멍하니 보다가 운 적이 있어요. 아이들 그림이 너무 좋아서요. 저는 이걸 어른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수업이 끝나면 모두 내팽개치고 엄마에게 달려가는 아이들의 그림이, 그 어떤 작가의 그림 못지않게 훌륭하고 또 묘한 감동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요. 저는 이 일은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림을 잘 그리고,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 때문은 아니에요. 다만 저는 다른 어른들보다 아이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잘 알 고 있는 것 뿐이에요.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정말 즐겁고요.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말해 줄 수 있나요?
있죠. 아이들만 하는 말들을 정말 사랑해요. 나른한 낮에 수업하고 있으면요, 아이들은 엉뚱한 대화를 끊임없이 나눠요. 초콜릿을 계속 달라며 떼쓰는 한 아이한테 다른 아이가 말해요. “자꾸 그러면 충치 가족이 너한테 또 이사 온다.” 그러면 정말로 초콜릿을 안 먹어요(웃음). 이제 2년 3개월 된 이 작업실, 해가 잘 드는 시간 그리고 아이들의 엉뚱한 대화. 그런 게 맞물리는 순간에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예요.
선생님의 유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의 유년은 어땠을까. 갑자기 예롤 씨 얘기가 궁금해지네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학원교육도 받고 입시도 준비했었죠.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은 크레파스에 관한 거예요. 문방구 앞에서 항상 크레파스를 사달라고 졸랐대요. 집에는 이미 새 크레파스가 한가득 있었는데 말이에요. 베란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크레파스가 가득했죠. 가지런하게 정리된 색색의 크레파스와 냄새를 무척이나 좋아했어요. 그렇게 크레파스가 쌓여 있는 베란다에 작은 플라스틱 책상이 하나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저의 첫 아뜰리에가 생겼어요. 거기서 항상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부터 항상 화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다른 꿈을 꿔본 적도 없고요. 물론 고등학교 때 위기가 한 번 찾아오기는 했어요.
그림 그리는 게 싫어진 건가요?
아니요. 여전히 좋았는데, 제가 너무 못 그리는 거예요. 2년 동안 홍대 앞 입시학원에 다녔는데 저한테 가망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학원에서 쫓겨나듯 나왔어요. 그때부터 혼자 그림을 그렸죠.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두렵기도 했어요.
그래도 그림 그리는 걸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보고 그리는 걸 못해서 내내 지적받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손이나 종이를 보지 않고 사물만 보며 그리는 연습을 했어요. 블라인드 컨투어Blind Contour이라고 해요. 처음엔 주변 사람들 모습을 그렸는데 귀가 입에 가 있고 눈이 귀에 가 있어서 매번 웃었어요. 어떤 날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사람들 신발을 그리고 손잡이를 그렸어요. 50장도 그리고 100장도 그렸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정말 잘 그릴 수 있게 된 거예요. ‘이제 됐구나.’ 자신감이 생겼죠. 더 어려운 상황에서 연습했기 때문에 종이와 사물을 번갈아 보며 그리는 건 쉬웠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그림이 더 재미있게 다가왔어요. 새로운 재료를 써본 것도 그때쯤이에요. 구두약, 물에 녹인
커피 같은 걸 이용해 보기도 했죠.
그 시절 특별한 도움을 준 사람이 있나요?
아빠는 제가 꾸는 꿈도 지지해 줬지만, 꿈을 꾸는 과정도 지켜봐 줬어요. 그리고 감성도 영향받았죠. 아빠는 지금도 배낭여행을 다니고 제게 선물해 줄 돌을 줍기 위해 두 시간 동안 바닷가를 걸어요. 제게는 세상에서 제일 순수한 사람이에요(웃음).
프랑스에도 2년 있었다고 들었어요.
아이들 수업을 진행하면서 저는 매일 기뻤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일을 계속하려면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게 더 많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갔어요.
유학생활로 얻은 게 있나요? 어떤 생활이었는지 궁금해요.
그때 정말 가난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가난이 기회였던 것 같아요. 화실을 다닐 때 물감 살 돈이 없어 다른 재료를 사용해 보기도 했어요. 화실에 다니면서 모든 미술관을 무료도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죠. 집에서 말도 안 되는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미술관에 가곤 했어요(웃음).
아주 오래 하고 싶은 일
따로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도 있을 텐데, 혹시 부모나 지도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가 있을까요?
아까 말했던 타피프로젝트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놀이예요. 채집한 여러 오브제들을 가지고 동물 모양을 만들어 보면서 함께 무슨 얘기든 하는 거예요. 얘기를 많이 들어주는 게 제일 중요해요. 그리고 아이들 그림에 절대 손대지 않아야 하고요. 기준이 생기면 아이들은 너무 쉽게 자신의 그림이 잘못됐다고 여기고 그림에 엑스 표시를 해버리죠.
꿈을 가지고 있나요?
전 세계 아이들과 만나서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요. 지금 만나는 아이들에게서정말 다양한 세계를 발견했거든요. 이곳과 다른 환경의 아이들은 또 어떨까, 궁금해요. 그래서 영어 과외를 받고 있다죠(웃음).
아주 나중에는 어떤 모습일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된 제 곁에 여전히 지금처럼 어린아이들이 있을 것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녀의 작업실을 찾아간 날은 페이스 투 페이스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동굴 같은 귀가 있지?”, “동굴엔 박쥐가요! 거꾸로 매달려서.” 선생님은 대상을 읽어주고, 아이들은 내키는 대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각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관찰해 보라고 놔둔 손거울에 한 아이가 햇빛을 반사시켰다. 아이들은 모두 그림 그리는 걸 잊고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햇살 조각을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선생님도 아이들을 말리지 않고 함께 빛 구경을 했다. 내가 두 시간 동안 지켜본 수업은 내내 그런 식이었다.
Children Art L’ATELOLIER de Yelil Han
yelolhan.com
에디터·포토그래퍼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