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詩詩한 이야기

평론가 부부의 사생활

시시詩詩한 이야기

평론가 부부의 사생활

말의 문턱을 넘는 일, 말의 결정적인 순간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어떤 말은 말로 태어나고 어떤 말은 말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말이 되지 못한 말이 곧 소멸된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여전히 말의 주위에 이상한 형태로 남아 특별한 말문을 연다. 우리는 그 말을 종종 ‘시詩’라고 부른다.

그의 이야기

연시戀詩 메들리

얼마 전 시인들의 연애시를 떠올려본 적이 있다. 특별한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굳이 연유를 따지자면 그쯤 읽던 책에 대략 이런 구절들이 있었다. “시를 가장 잘 읽는 방법 중 하나는 그것을 사랑하는 사랑에게 받은 편지처럼 읽는 것이다.”, “연애편지를 한 번에 독파하는 사람은 없다. 연애편지를 읽는 그 순간 우리는 누구나 섬세한 언어학자가 되어 한 언어가 지닌 표현의 다양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예민하게 생각하게 된다.” 맞는 말이다. 누군가의 말을 여러 번 음미하고 그 말의 숨은 맥락을 오래 고민하는 일을 우리는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좀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는 서로의 말을 대충 듣고 대충 이해하면서 사는 건 아닐까. 물론 모든 말을 여러 번 되새기며 사는 일도 꽤 피곤한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하루는 말들을 속절없이 흘려보내야 살 만한 날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날은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어 세워놓고 시간의 깊은 지층으로 파고들어가게 하는 내밀한 언어가 절실하기도 하다. 

그러다 얼마 전 폭설이 내린 날, 농담처럼 책상 위에 놓인 백석의 시집을 들춘 게 시작이었다. 백석은 “오늘 밤 눈이 나리는 게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라고 읊었던 시인이다(〈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가족, 친구, 이웃 그리고 연인)과 공간을 늘 떠올리며 살았던 사람, 만나면 꼭 생선구이를 앞에 두고 정종 한 잔을 나누고 싶은 사람, 백석. 먹는 것을 이야기하니 이성복 시의 어느 저녁도 떠오른다. ‘늦고 헐한 저녁’, 낯선 바람이 부는 미끄러운 거리를 통과해 간이 식당으로 저녁을 사먹으러 가는 길, 시인은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정처없다고 적었다(〈序詩〉). 시세계로 보면 이성복 시인의 짝은 왠지 최승자 같다. 지독하게 살고 지독하게 쓰는 시인 최승자는 마치 모든 삶을 전투처럼 살아내고 그 전투에서 승리할 사람인 것만 같다. 그녀는 연애의 감정 또한 전투적으로 다룬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에서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병/에// 꽂/아/다/오” 꽃병에 꽂힌 꽃처럼 나의 사랑을 가둘 수 없다는 말일까. 또는, 기어이 그 꽃병을 깨뜨려 낭만적 사랑의 허위를 들추어내겠다는 선언일까.

장석남의 시에는 자주 연애의 감각이 묻어 있다. 〈배를 매며〉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호젓한 물가에 넋놓고 앉아 있다가 배가 들어오면서 던져준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이라고. 별것 아닌 말 같은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럴듯하다. 배를 매듯, 나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고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돕게 되고, 또 나도 모르게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그런 순간에 우리는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 모른다. 장석남 시인이 이별의 순간을 〈배를 밀며〉라는 시에 담았다는 사실은 아는 이는 알 것이다. 장석남 시인은 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섬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장석남이라는 배를 타면 자연스레 김종삼이라는 바다에 이른다. 김종삼 시인은 〈어부〉에서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썼다. 저 기적과 기쁨이 사랑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대학 때 문학반이라는 학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학회 고학번 남자 선배들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들려줄 만한 시라며 늘 외우고 다니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어이가 없는 게 결혼도 안 한 그이들이 외우던 게 바로 황지우의 〈늙어가는 아내에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도입부는 지금 들어도 여전히 설렌다.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거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많아서 말을 더듬듯 반복하게 되는 구절이 많은 이 도입부를 술 취한 가락에 맞추어 읆조리는 목소리를 만날 때면 술집의 불빛이 조금은 환해지는 것도 같았다.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자연스레 결혼식의 축시도 떠오른다. 나 역시 문학과 관련한 일을 하는 까닭에 친구들에게 축시 비슷한 것을 요구받은 적이 있었다. 한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는 박상순 시인의〈Love adagio〉를 읽어준 적이 있다. 그 시를 골랐던 이유는 “그의 마른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라는 구절이 뜨거운 사랑을 담고 있어서였고, 또 “그의 불행이 나의 지붕에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라는 구절이 슬프면서도 따뜻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나의 결혼식에서 친구 시인들이 낭독해준 시도 있다. 내가 가끔 고모라고 장난치듯 부르는 강성은 시인은 우리 둘을 새에 빗대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이 계절에서 저 계절로 어느 먼 나라의 깊은 숲속에서 우리는 함께 날아다녔다.”고 축복해주었다. 고민이 생길 때마다 찾는 형 같은 신용목 시인은 “그대여, 우리 사랑은 아무래도 덧나야겠습니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함께 흘러야 할 많은 날들을 꿈꾸어야겠습니다.”라고 낭독해서 우리 장인 어른의 눈물을 쏙 빼놓았다.

‘심장에 가까운 말’

나의 장인 어른은 시인은 아니지만 때때로 나에게는 시인처럼 보인다. 술을 너무 잘 드셔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결혼 초 아버님이 운전하시는 차의 옆자리에 앉아서 어렵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때, 질문할 것이 마땅하지 않았던 나는 무심코 나영이 커서 무슨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는지를 여쭤본 적이 있다. 아마도 낙동강변 도로를 지날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아버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해지는 강변길을 한참이나 내려오다 살짝 웃으시며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답하셨다. 아버님께서 그냥 잘 자라기만을 바랐다고 덧붙이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동시에 그 말이 너무 좋아 내 마음을 물들였다. 창밖에 흐르는 강물보다 아버님의 옆얼굴이 더 깊어 보였고 강물에 비친 노을보다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의 빛이 더 그윽했다. 그 말은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아버님의 ‘심장에 가까운 말’이 아니었을까. 

‘심장에 가까운 말’이란 제목의 시집을 낸 시인은 박소란이다. 박소란 시인의 시집에는 ‘가난한 사랑 노래’가 있다. 가난해서 사랑의 순간이 삶의 우선순위에서 자꾸 뒤로 밀리고, 가난해서 사랑이 자꾸 남의 일처럼 되어버린 사람의 목소리, 생활의 냄새가 지독하게 사랑의 기미를 집어삼키는 이야기가 그녀의 시집에는 녹아 있다. 나는 이 시집을 통해 ‘다음에’라는 말이 얼마나 아픈 말인지를 알았고 김밥천국에서 데이트를 나누는 친구들의 고된 삶을 슬쩍 엿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막 사귀기 시작했던 10년 전쯤에 쌀을 사러 들른 이마트에서 시식 코너를 몇 번씩 돌며 데이트를 한 적도 있다. 그때 먹었던 만두의 텁텁한 맛이 놀랍게도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 맛을 떠올리니 생각나는 시가 또 한 편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번에 기회가 닿을 때로 미뤄둬야겠다.

그녀의 이야기

시적詩的이고

사적私的인 언어

흔히 말과 문자를 통틀어 언어라고 여긴다. 여기에는 소리 대신 손동작으로 전달되는 수화나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읽어내는 점자 또한 포함된다. 그러니 달리 말해 언어는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 등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움직임과 변화의 내용들을 전달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언어의 전부일까. 철새와 풀벌레와 돌고래와 북극곰과 꿀벌에게도 나름의 언어가 있다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진 언어의 한계 없음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볼 여지가 일상의 곳곳에 있다. 가령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몸짓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요구를 표현하는 아기의 언어에 관해서, 혹은 너무나 많은 생각에 파묻힌 사람의 가장 시끄러운 침묵에 대해서. 그런 것은 너무도 개별적이고, 그렇기에 가장 내밀한 언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안에 그런 말들이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여전히 그런 말들이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혹은 모른 체하면서 살아가기도 하는 그런 말들 말이다. 

언어에 대해서라면 그런 내밀함에 연관한 것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언어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이 세계 속에 풀어놓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내가 이 세계의 무엇과도 완전히 같지 않기에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만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언어는 때로는 그림이고, 때로는 음악이며, 때로는 몸짓이고, 때로는 그저 우두커니 앉은 몸뚱어리다. 모든 것이 달리 그렇게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해서 누군가를 설득하고 감동하게 만들기에, 그런 언어들은 가장 사적이면서 시적이다. 그렇게 모든 언어는 단 하나의 언어다.

언어는 겨우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존재의 처음, 혹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말랑말랑한 상태로 여겨지는 아기들은 끊임없이 말하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아기는 엄마, 아빠라는 호칭을 통과하고 나면 의기양양, 좀 더 자신 있게 자기에게 친숙한 대상들을 차례로 호명하기 시작한다. 맘마, 빠방, 부릉, 멍멍, 응가.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가리키면서 ‘이게 뭔지 알아? 내가 알려줄게’ 하는 자못 진지한 눈빛과 태도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것들을 부른다. 그렇게 불려 나오는 것들이 아기의 세계를 이루며 조금씩 그 세계를 넓혀간다.

그때 아이는 과연 제가 무엇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확실한 건 아이는 자신을 보는 어른들을 바라보고 있다. 탄성을 내뱉고 활짝 웃으며, 마치 이 세계의 주인공이 너라는 확신을 주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말이다. 아이가 무엇과 무엇을 호명할 때 그 과정에서 특별한 것은 어쩌면 아이의 덜 여문 발음이 아니라 아이의 말을 거듭 유도하는 어른들의 무장해제된 표정, 어쩔 도리 없이 그저 흘러나오는 환희의 표현들일지도 모른다. 웃음소리, 각종 감탄사, 그리고 온 얼굴의 근육이 이완된 듯한 표정을 포함해 뭐라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자잘하고 무수한 행복감의 표현들. 우리는 어째서 아기의 말 아닌 말 앞에 그렇게 한순간 경탄하고, 질리지도 않고 그 말을 거듭 청하며 저절로 시선과 발음을 아이의 그것에 맞추게 될까. 

각각의 음가가 정확히 발음되지 않은 채로 뭉뚱그려진 단어들, 그것을 주워 먹고 생겨나는 듯한 웃음들. 그런 것들이 아기와 어른 사이를 채운다. 그때 그 사이라는 물리적인 공간 내지는 거리감은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어른에게서 바로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를 거울단계라고 말한 바 있으나, 굳이 정신분석학의 설명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고 있다. 아기는 자신을 바라보는 자의 표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읽어낸다는 것을. 엄마가 울면 아기는 슬프고, 엄마가 웃으면 아기는 금세 기쁘다. 울음과 슬픔, 웃음과 기쁨 사이에 어떤 설명이나 논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아기에게는 엄마가 나이고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다. 

말을 터득하기 전의 아기에게 언어는 어른들이 말 대신 보여주는 표정과 소리와 동작이다. 아기의 눈이 해내는 소통과 이해의 방식은 언어를 배운 이후 말과 의미에 사로잡힌 우리의 대화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와 네가 언어를 통해서 소통한다고 할 때, 소통은 단순히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에 그치는 능력이 아니다. 언어 아닌 언어, 상대의 침묵을 포함해 말과 말 사이의 주저함, 멈칫하는 태도, 스쳐 지나가는 표정 같은 언어의 공백에서 우리는 좀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니까 언어는 우리가 각자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종류의 표현들, 그리고 그 표현을 감지하고 해석해내는 능력까지를 아우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저마다가 서로에게 한 사람의 몫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지치지도 않고 거듭 상대에게 요청해야 한다. 한 번에 바로 알아들을 수 없는 당신의 말을. 그 말을 기꺼이 받아 안고 자신의 세계 속에 들여놓으려 할 때, 이해해보려 애써야만 하는 그 비의에 거듭 기쁘게 경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서 겨우 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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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나영, 송종원